#. 15억 중국인은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잃었을까?중국의 15억 인구는 어떻게 하늘이 한 개인에게 부여한 천부의 자유를 잃고 공산당과 그 수괴인 1인 독재에 침묵·순종하며 살아왔으며,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근본적 의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역작이 발간되었다. 캐나다 맥마스터대학 역사학과에 재직 중인 송재윤 교수의 3부작 『슬픈 중국』이 그것이다. 『슬픈 중국』 3부작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다. 지금까지 마오쩌둥이 저지른 광기의 학살극을 중국공산당은 ‘대약진운동(The Great Leap Forward)’이니 ‘문화대혁명’
25일 마감된 KBS 사장 공모에 고대영 전 사장이 깜짝 지원했다.고 전 사장은 박근혜정부에서 사장으로 임명됐다가 문재인 정부 들어 해임됐다.최근 법원으로부터 해임무효 판결을 받아 명예회복을 했다.한차례 사장을 지냈던 고 전 사장이 차기 사장에 응모한 것은 그 자체로 화제가 되고 있다.KBS 이사회에 따르면 이번에 실시한 26대 사장 후보자 공모 결과 12명이 지원서를 제출했다.최재훈 KBS부산방송총국 기자(전 KBS노동조합 위원장)과 전진국 새미래포럼 회장(전 KBS 부사장), 배재성 한국스포츠미디어학회 학회장(전 KBS N 부사
윤석열 대통령은 24일 "변호사 시험 과목 위주의 교육 편중 현상을 해소하고, 다양한 전문 분야의 법조인을 양성하기 위해 법조 인력·교육 정책을 검토해 보겠다"고 밝혔다.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대통령실에서 이상경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이사장, 호문혁 초대 이사장, 김종보 이사, 정현미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원장과 오찬을 곁들인 간담회에서 이들로부터 법학교육의 현실과 여러 애로점에 관한 건의를 경청한 뒤 이와 같이 말했다고 대통령실이 보도자료를 통해 전했다.법학교육 제도 개선방향과 관련한 법학계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마련된 이날 간담
박형준 부산시장이 2일 오전 부산시청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산진구 전포동에 있는 6600㎡ 규모의 국방부 유휴부지를 활용해 '광무 워터프론트 파크'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광무 워터프론트 파크' 사업은 동천·문현혁신도시와 연계한 워터프론트와 지원시설을 구축해 지역 활력 거점을 만들고 동천 일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도시혁신사업이다.부산시는 이번에 확보한 국방부 부지를 국제금융센터(BIFC) 추가 구역으로 확보해 혁신도시 이전기관들의 성장을 위한 새로운 공간으로 활용하고, 디지털 금융
베이징 다리에 중국 시진핑 주석을 '독재 매국노'라고 지칭하고 중국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현수막이 걸렸다. 중국 공산당대회를 며칠 앞두고 있는 베이징에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 소식이 외신에도 퍼져나가는 등 국제적 눈길을 끌고 있다.베이징에 등장한 현수막은 총 두 개로 하나는 시 주석에 대한 비판, 나머지 하나는 중국 체제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전자는 한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후자는 '不要△要▲' 형식으로 돼 있다. 즉 '△는 필요치 않고 ▲를 원한다'는 문장 구조다.
시진핑을 두고 중화권 비평가들은 ‘총가속사’(總加速師)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브레이크 없이 내키는 대로 가속페달을 밟아 중국 공산당의 ‘멸망 속도’를 높이는 지도자란 표현이다. 전랑외교(戰狼外交)는 물론이고 국내 경제, 사회정책 등 여러 측면에서 그가 어디까지 갈지는 예측이 불가능하고 범인의 상식을 뛰어넘는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 과거 문혁시대로 회귀하려 한다는 정도의 분석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지만 그 속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 17일 시진핑은 중앙재경위원회 주임 자격으로 회의를 주재했다. 시진핑의 공식 직함은 중국 공산
2015년 중국 정부는 야심차게 반도체 굴기를 선언했다. 10년간 1조위안 160조원을 투자해서 15%인 반도체자급률을 2025년까지 75%로 올리겠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5년이 지난 2020년 현재 반도체 자급률은 여전히 15%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도체 기업들의 실질적 파산도 줄을 잇고 있다. 푸젠진화 반도체, 우한 홍신반도체, 난징 타코마반도체, 쳉두 글로벌파운드리 등의 실질적 파산, 칭화유니그룹의 회사채 디폴트 등이 중국 반도체 산업의 현상황을 잘 보여준다.실패들이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과거가 되풀이되는 성격이 강하다. 중국
북한의 국무위원장인 김정은은 지난 5일부터 진행 중인 제8차 당대회에서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핵추진잠수함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혔다.북한의 관영 선전매체들은 지난 5~7일 진행된 노동당 제8차 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핵장거리 타격 능력을 제고하는 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핵잠수함과 수중발사핵전략무기를 보유할 데 대한 과업이 상정됐다”고 9일 전했다.농축도 20%에 미만의 우라늄을 추진 연료로 사용하는 핵잠수함은 기술적으로는 무기한 잠항이 가능해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은밀히 침투해 기습 공격이 가능하다.
‘조국 흑서’ 저자로 여권에 대한 비판을 내놓고 있는 김경율 경제민주주의21 대표(회계사)가 “대깨문(여권 강성 지지자)의 폐해가 매우 심각하다”며 비판에 나섰다.김 대표는 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깨문들에 대해 사회는) 깊은 사회 병리로 받아들여 처방이 내려져야 하고, 무엇으로부터 기인했는지 연구도 뒤따라야 한다”며 이같이 적었다.그러면서 “과문하지만 사고의 지향과 행태는 유사하되 지식인들과 여론 주도층에 의해서 전혀 견제나 통제가 안 이루어지는 점에서 유럽 등지에서 나타나는 극우와는 달라보이고, 문혁 당시의 홍위병들이 가장
펜앤드마이크 창간 후 현재까지 캐나다 맥매스터대학 송재윤 교수가 연재하고 있는 '송재윤의 문혁춘추'가 책 '슬픈 중국'이란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3부작 중 1부작으로 '인민민주독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2019년부터 시작된 홍콩의 자유화 운동과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대하는 중국 정부의 행태는 중국 정치체제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국을 위협하는 경제 규모와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가 아닌 중국 대륙에서 살아가는 인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
1. 남방정치(南方政治) 모택동은 1965년 11월 12일 북경을 떠나 호북성의 무한과 절강성 항주를 오가며 생활했다. 1966년 7월 18일에야 그는 다시 북경의 땅을 밟게 된다. 문화혁명의 불길이 막 치솟기 시작하던 최초의 8개월 간 그는 북경을 떠나 있었다. 1950년대부터 이미 모택동은 중앙정치가 난마처럼 꼬이면, 훌쩍 떠나 남방으로 가곤 했다. 1953년 12월 모택동은 헌법을 수정한다는 명분으로 항주로 내려가 서호의 빌라에 머물렀는데, 당시 중앙정치는 부주석 고강(高崗, 1905-1954 Gao Gang)과 중공중앙조직부
‘중국공산당 바이러스’(CCP Virus)로도 불리는 역병의 진앙지, 우한(武漢)이 있는 중국 후베이성 사람들은 중국 내에서, ‘잠재적 보균자’ 취급을 받는, 편견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중국 당국은 녹색·황색·적색의 세 가지로 분류되는 ‘건강QR카드제(制)’를 실시하면서 녹색 코드를 인증 받은 후베이인들은 자유롭게 전국통행을 허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작 베이징은 후베이인(人)들의 입경을 봉쇄하고 있으며 다른 성(省)에서도 후베이인들은 녹색 코드를 제시해도 강제로 격리되거나 쫓겨나기 일쑤다. ‘후베이인이’라는 신분자체가 독일 나치
1. 주석님의 호화열차 1965년 12월 초, 계획대로 요문원의 오함 비판이 전국의 주요 매체를 장식하자 모택동은 유유히 북경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후 8개월 그는 북경에 돌아가지 않은 채로 상해와 장강 이남의 도시들을 오가며 지냈다. 모택동은 원할 때면 언제든 어느 곳이든 불쑥 찾아가서 맘대로 머물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무한, 항주, 광주 등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는 모택동만 사용하는 호화 빌라들이 있었다. 항주에 가면 그는 서호(西湖) 부근에 위치한 청나라 거상의 빌라에 머물렀다. 16만 평에 달하는 호화판 저택이었다. 무
1. 왜 다시 문혁인가? 여전히 중국현대사를 찬양하면서 한국현대사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의 위상을 살피고 대응할 겨를도 없는데 왜 하필 지금와서 문혁을 들춰내냐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중공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문혁 피해 관련 통계를 하나만 돌아 보자. 1978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경에서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공작회의가 개최됐다. 모택동 사망 2년 2개월 후, 사인방 체포 2년 1개월 후의 일이었다. 형식상 당시의 국가주석 화국봉(華國鋒, 1921-20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1. "수정주의에 반대하라!” 1965년 11월 30일 화요일 북경시내. 최저기온 영하 8도의 싸늘한 기온. 북에서 불던 바람이 슬그머니 남으로 방향을 바꾼 그날. 매캐한 석탄재가 날렸음에도 푸르스름한 하늘빛이 수줍게 드러나는 맑은 날씨였다. 이른 새벽부터 북경시내는 북적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청년들, 더운물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들,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학생들, 일터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노동자들. 모두가 분주히 바쁜 일상을 서두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큰 사건이나 사고는 딱히 없어 보였다. 그날
1. 문화혁명: 대중운동인가? 관제데모인가? 공식적으로 “중국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은 1966년 5월 16일 중공중앙위의 통지가 정부 각 조직에 반포되면서 시작되어 1976년 10월 4일 4인방이 전격적으로 체포될 때까지 무려 10년 동안 전 중국을 혼란, 폭력, 살육, 기근 속으로 몰아넣었던 극단적인 “대중운동”(mass movement)이었다. “대중운동”에 국가공인의 발발과 종결의 시점이 있다는 사실은 지독한 패러독스(paradox)이다. 모름지기 대중운동이란 권력의 부패나 국가의 폭력에 맞서는 인민의 자발적인 저항이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1일 새벽 청와대가 작위적으로 선정한 의인들과 함께 산행길에 오르며 '팬덤 정치'로 새해를 열었다. 한국의 상당수 언론매체는 문 대통령을 만난 등산객들로부터 "탄성 섞인 반가움의 인사"가 흘러나왔다며 찬사 일색의 기사 제목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현 정권의 '팬덤 정치'에 환호하지 않는 일반 시민들은 청와대와 한국 언론에 조롱을 쏟아내고 있다.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문 대통령은 새해 아침부터 산에 올랐다. 경기 구리시 인근 아차산 등산로에서 시작해 용마산으로 내려오는 총 4.37km 구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