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우리에겐 아직 생소한 '학지'란 단어부터 해석하기로 하자. 학지는 근년 일본지식사회와 논단에서 사용빈도가 높은 어휘인데, '학문과 지식'이라는 사전적 해석으로 통한다. 메이지 이후 개국시기 서양 학문·지식을 수용, 이입하여 전근대까지 중국 학문에 얽매였던 학문적 해방을 구가하는(또는 비판적 성찰의 심경적 뉘앙스가 다분히 스며 있는) 이 단어는 근대 일본인의 조어이다.물론 아마 그 어원을 따지면 필자의 속단으로는 '중용(中庸)' 제 20장의 한 귀절 '학지이행(學知利行, 인간이
중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1949년 수립된 이래 권위주의적 통치체제가 유지되어 왔다. 특히, 시진핑(習近平) 총서기가 2012년 취임 이후 과거의 마오쩌둥(毛澤東) 시기의 극단적인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로 회귀하고 있다. 국내정치와 대외정책에서 중국이 막다른 골목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권위주의적 통치체제의 지속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쟁이 중국 국내외에서 발생하고 있다.우선 중국에서 현재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을 보기로 하자. 첫째, 시진핑의 독재 강화와 권력집중화 현상이다. 시는 자신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일당독재체제를 강화하여 마
1. “문화혁명 5인 소조”: 모주석의 사전포석 요문원의 “해서파관” 비판은 적의 화약고를 향해 발사된 불화살이었다. 불화살이 사령부의 나무기둥에 꽂혀 불길이 스멀스멀 타올랐지만, 적진의 장수들은 전쟁이 임박했음을 눈치 채지 못했다. 불화살의 발사명령을 내린 장수는 다름 아닌 모택동이었고, 요문원은 그저 밀파한 자객인 셈이었다. 자객의 칼놀림이 위협적이었기에 오함을 보호하기 위해 일군의 지식분자들이 싸움에 나섰다. 피 튀기는 사상투쟁이 시작되었다. 생사를 가르는 “말의 전쟁”(war of words)이었다. 주은래의 압박을 못 이겨
1. 팽진(彭眞, 1902-1997, Peng Zhen)의 저항1965년 11월 초 를 비롯한 북경의 주요언론들은 모두 요문원의 글을 거부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요문원의 글은 부득이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에 실릴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거의 3주가 지난 11월 29일 와 에, 11월 30일 에 요문원의 같은 글이 게재됐다. 그 20여일의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강력한 권력자가 북경의 언론사에 외압을 넣었으며, 북경의 언론사들은 저항하고 있었음
1. “대반란의 기획” 1965년 11월 30일 에 실린 요문원의 비평 은 문화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이 한 편 문제의 글로 요문원은 일약 문예계의 기린아로 급부상한다. 그는 이후 모택동의 부인 강청(江靑, 1914-1991, Jiang Qing), 상해의 좌파작가 장춘교(張春橋, 1917-2005, Zhang Chunqaio)와 함께 이른바 "문혁 4인방"의 한 명이 된다. 요문원의 비평문은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치밀하게 기획되고 준비된 "대반란" 수뇌부의 비밀무기였다. 물론 대반란
인류사최대의 기근 (2): "정치가 인민을 굶겨죽이다!"[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8回. “人類史 最大의 饑饉”(2) 대약진은 대기근으로 귀결되었다. 1958년-1962년 중국 전역에서 3천6백만에서 4천5백만 명이 아사(餓死)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어야만 했을까? 인류사 최악의 대기근의 와중에 대체 중공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엇을 했던가?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Amartia Sen, 1933)은 “언론의 자유가 있는 민주국가에서 대규모 기근이 발생한 사례는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1回. “自由人의 亡命” 1. “아, 천안문,” 어느 서글픈 추모회 지난 주 월요일 (2018년 6월 4일) 홍콩의 빅토리아 공원에 10만을 웃도는 대규모 시위군중이 모였다. 백발성성한 노인, 중년부인, 대학생, 어린이들까지 함께 모여 손에 촛불을 들고 29년 전 북경 천안문 대학살의 진상규명을 외치며 중공정부의 일당독재를 규탄했다. 오늘날 홍콩과 마카오를 제외한 중국 대륙의 어느 도시에서도 그 같은 추모 집회는 허용되지 않는다. 대학가의 공개토론도 열릴 수 없었으며, 천안문 사태를 조명하는 신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20回. “中央書記處의 秘密” 1. “먼저 쓰라고 해놓고선······.” 중국의 백화제방운동(1957)과 반우파(反右派)운동(1957-1958)을 생각하면 뇌리에 겹쳐지는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1985년 서울 서북지역 한 중학교 교실에서 일어났던 일. 30대 중반의 한 미술교사가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지금부터 빈 종이에 이 선생님에 대한 불만과 건의사항을 자유롭게 써라!” 뜻밖의 요구에 어리둥절해진 학생들을 향해 교사가 거듭 말했다. “뭐라고 써도 좋으니 깨알같이 너희들의 생각을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9회. “빅브라더의 精神世界” 20세기 세계사에서 인간평등을 모토로 삼은 대부분의 공산주의 정권들은 일인독재와 인격숭배의 디스토피아(dystopia)로 귀결되고 말았다. 대체 어떤 이유 때문에 수백, 수천만, 혹은 10억 이상의 인간집단이 단 한 명의 영도자를 그토록 흠모하고, 추종하고, 숭배하게 되는 걸까? 영웅적 카리스마 때문일까? 매스미디아의 선전선동 때문일까? 계급투쟁, 인민해방, 민족주의 등등의 이념들 때문일까? 세뇌교육 때문일까? 감시와 처벌 때문일까? 억압과 통제 때문일까? 대체 그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8회. “百花齊放, 右派사냥” 1. 못 다 핀 꽃송이들 1957년 4월 말부터 6월초까지 중국 전역에서 들불처럼 이른바 “백화제방(百花齊放)운동”이 일어났다. 백화제방이란, 수많은 종류의 꽃들이 모두 활짝 피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경쟁하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8세기-3세기)의 “백가쟁명(百家爭鳴)”과 짝을 이루는 성어(成語)이다. 1956년 소련의 흐루쇼프(1894-1971)가 탈(脫)스탈린 운동을 전개한다. 이어서 폴란드와 헝가리에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고, 소련군은 탱크를 몰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歷史] 16回. “文字獄: 그물 치고 떡밥 뿌리고” (2) 1. "文化侵略”이란? 몇 년 전 상해의 한 국제학회에서 목격한 한 장면. 네덜란드 외교관 출신 패널리스트가 중국의 인권문제에 관해 언급하자 방청객 한 명이 매섭게 질문했다. “서방 시각으로 중국인의 인권을 거론한다면, 그 자체가 문화침략이 아닙니까?” 송곳처럼 날선 질문에 패널리스트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인권이란 모든 인간에 적용되는 보편적 개념입니다.” 방청객은 따져 물었다. “각 나라마다 역사와 문화가 다르고 인민의 체험이 다른데, 일방
[文革春秋: 現代中國의 슬픈 역사] 12回. “中國의 인텔리들, 어쩌다 自由를 잃었나?” 1. 중공정부가 외치는 자유와 민주란? 오늘날 중국 전역에선 2012년 12월 중공 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채택된 24자 12단어의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을 흔히 볼 수 있다. 공공게시판, 건물벽, 관공서, 대학교정, 호텔로비, 택시계수기, 심지어는 화장실벽에도 어김없이 사회주의 핵심가치관이 적혀 있다. 국가의 목표로서 “부강, 민주, 문명(文明), 화해(和諧),” 사회적 지향으로서 “자유, 평등, 공정, 법치,” 공민(公民)의 덕목으로서 “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