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장이 전두환 대통령이 기여한 몫의 1만분의 1이라도 대한민국을 위해 일한 게 있을까?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필자가 개인적으로 무척 혐오스러워하는 논리가 있다.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그게 조선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나? 다 일본제국주의가 자신들의 조선 지배를 견고하게 하려는 불순한 의도에서 한 것 아닌가? 그러니 높게 평가해줄 이유가 전혀 없다.’

일제시대에 대한 토론이 좀 진척되면 자주 나오는 주장이다. 그럴 때마다 이런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의 지적 수준을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나마 좀 배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제시대에 대해 갖추고 있는 방어 논리 즉 일종의 방탄조끼 같은 것이지만 이런 논리 구조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면서도 저 논리의 복제품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나 감독이 나름 정교하게 설계하여 영화에 집어넣은 논리라고 봐야 한다. <서울의 봄>은 바로 저 논리를 대중적으로 퍼뜨리기 위해 기획하고 만든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황정민이 연기한 전두광(전두환)은 12.12 당시 자신의 주변에 모여든 신군부 인사들에 대해 친구인 노태건(노태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저 안에 있는 인간들,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봐 그거 물라꼬 있는 거거든. 그 떡고물, 주디에 이빠이 처넣어 줄 끼야.”

12.12와 1980년 5월 즉 서울의 봄 당시 시국을 수습하던 신군부 인사들이 철저하게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무리를 이루고 쿠데타를 하고 정권을 찬탈했다는 영화 제작진의 이런 논리는 영화 상영 내내 표현만 바꿔 되풀이된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12.12 주역들이 전두광을 중심으로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장면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신군부 주요 인물들이 전두환의 5공화국 정권에서 무슨 고위직을 역임했는지가 파노라마처럼 흐른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목적이 이런 일신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는 메시지다. 긴장감 넘치게 전개되던 스토리를 마무리짓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마침표 찍듯이 관중들에게 그 결론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이제 이 글의 앞 부분으로 돌아가 일제가 추진했던 조선의 근대화부터 살펴보자. 일제가 자신들의 한반도 지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근대화를 했을뿐, 조선인을 위한 근대화는 아니었다고 인정해보자. 그렇다면 역으로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일본에게 조선을 팔아넘긴 이씨왕가는 그럼 지고지순하게 조선 민중을 위해 일하고 지배했나?

인류 역사상 어떤 지배세력도 순수하게 민중을 위해서 지배한 적은 없다. 지배 방식의 차이는 당연히 있었지만 그건 어떤 방식이 민중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고 지배 체제를 효과적으로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철학 또는 방법론의 차이였을뿐 그 지배체제의 목표는 대동소이했다고 봐야 한다. 폭정이냐 선정이냐의 차이는 정치철학 또는 능력의 유무에서 연유하는 것일 뿐이다.

조선인들에게 일제시대는 경제나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이씨왕가의 지배 당시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편안하고 배부르고 인권 친화적이고 법치에 근거한 시대였다. 이런 사실은 일제시대에 대해 편견을 버리고 조금만 냉정하게 살펴보면 금방 파악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무리들은 팩트가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서 일본에 대한 증오감을 부추길 필요에서 그렇게 행동할 뿐이다.

이런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과 신군부 그리고 5공화국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두환에 대해 ‘살인마’라는 고정관념에 근거해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5.18의 경험 때문이다. 하지만, 5.18의 비극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미처 의도하지 못한 돌발 상황의 결과라고 봐야 한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이후 우리나라 지배세력의 최대 목표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혼란과 희생을 줄이면서 포스트 박정희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게 자신들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위해서도 그렇고 국가와 사회의 관점에서도 필수적인 과제였기 때문이다. 신군부는 그런 지배세력의 이해관계를 가장 적극적으로 실현하고자 현실에 뛰어든 그룹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신군부에게 교훈(?)을 던져준 사건이 있었다. 1979년 부마항쟁 진압의 경험이 그것이다. 당시 경찰력으로 진압이 어렵던 시위는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단시간에 수습됐다. 부마항쟁 진압에 투입되었던 3공수 지휘관은 육사 13기이자 하나회 멤버였던 최세창이었다. 당시의 경험은 신군부 멤버들에게 ‘공수부대를 투입하는 것이 시위를 가장 빠르게 최소한의 희생으로 진압하는 수단’이라는 교훈으로 공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하나회에는 부마 지역과 광주의 정서적 차이를 설명해줄 호남 출신이 거의 없었다. 장세동이 있었지만 그는 육사 16기로 선배들 사이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울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신군부는 최대한 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주 지역에 공수부대를 투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던 것 같다. 물론 이 결정은 사태를 악화시키고 두고두고 전두환 등 신군부 출신들을 옭아매는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가 의도적으로 광주의 유혈 비극을 초래했다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최소한의 기본적인 논리만 갖추고 있어도 도출 가능한 결론이다.

전두환 등 신군부가 12.12나 서울의 봄, 5.18 과정에서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충족시키려는 동기가 강했을까? 필자는 그들에게 그런 동기도 없지는 않았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스로에게 부여된 일종의 역사적 책무에 대한 부담감(다르게 표현하자면 사명감)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신군부라는 집단이 그렇게 일사불란하게 행동할 수 있는 배경은 그런 사명감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

신군부에 대항해 싸웠던 김대중 김영삼 등 이른바 민주화 세력은 그런 사리사욕 없이 순수한 동기에서만 행동했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양김이 보여준 대립과 분열, 갈등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그렇게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김과 함께 민주화 투쟁에 나선 학생운동 출신들이 이 나라에 끼쳐왔고 끼치고 있는 해악도 마찬가지다.

포스트 박정희 시대의 과제는 사회 전반의 유연화 개방화 합리화라고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목표를 실현하는 방법론이다. 신군부와 민주화 세력의 충돌은 이 방법론의 차이를 둘러싼 갈등 때문이었다. 신군부는 혼란을 최소화하고 질서를 유지하면서 박정희 이후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고, 민주화 세력은 혼란의 전면화도 감수하고 전면적으로 박정희 시스템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고자 했다.

어느 방법론이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선택한 방법론에도 상당한 타당성이 있다는 사실조차 부인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그건 전두환 대통령과 5공화국이 실제로 달성한 성과를 보면 알 수 있다.

5공 정권은 야간 통행금지를 없앴고, 중고등학생들의 교복과 두발을 자유화했다. 컬러TV 방영을 허용했고, 프로스포츠 시대를 개막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악명높은 연좌제를 폐지했다. 최저임금제 시행 등 저임금 해소에 적극 노력한 것도 전두환 정권의 노력이었다.

전두환 시대를 얘기하면 흔히 3저 호황 얘기가 나오지만 이것은 객관적인 조건에 관한 설명일 뿐이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이 한국 경제를 위해 달성한 가장 큰 업적을 말하려면 중화학공업 구조조정과 정보통신 인프라의 정비를 들어야 한다.

중화학공업 육성은 박정희 대통령이 자주국방 달성과 경제구조 선진화를 위해 정권의 명운을 걸고 추진한 과제였지만, 그만큼 어마어마한 부담을 안겨 사실상 박정희 정권 몰락의 출발점이 되었다. 박정희의 뒤를 이은 전두환 정권에게 중화학공업의 과잉 투자를 해소하고 구조를 합리화하는 것은 정권의 안위뿐만 아니라 국가 생존의 백년대계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숙제였다.

상당한 논란도 있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중화학공업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한국은 선진국으로 가는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지금 대한민국이 누리는 번영과 경제적 여유는 사실 이 업적에 근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전두환이야말로 포스트 박정희 시대를 설계하고 구축한 주인공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정보화는 김대중 정권의 공로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완전한 왜곡이다. 정보화의 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뿌렸으며 물을 주고 가꾼 것은 전두환 대통령이다. 김대중은 앞선 정부가 해놓은 작업의 과실을 거두었을 뿐이다. 5공 당시 정보화를 상징하는 사업이 5대 국가기간전산망 구축이다. 행정, 교육·연구, 국방, 공안 전산망과 금융 전산망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사실상 세계 최초의 인터넷 컨셉으로 1980년대에 빌 게이츠가 동참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한국에 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전두환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사실 평화적인 정권교체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1980년 개정된 5공화국 헌법에서부터 단임제의 정신은 확고부동한 원리로 자리잡았다. 비록 간선제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이 문제 역시 1987년 민주화 투쟁과의 타협을 통해 해결됐다. 애초에 일인 장기독재를 막는다는 5공화국 헌법정신이 없었다면 이런 타협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전두환은 박정희 이후를 실현한 주인공이자 동시에 전두환 이후를 직접 실행한 주역이라고 평가하는 게 맞다.

자, 이제 이 글의 시작 부분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신군부 군인들이 영화 <서울의 봄>이 주장하는 것처럼 권력과 일신상의 영화를 위해 작당을 하고 쿠데타를 했을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런 동기가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계속 언급되는 것처럼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쿠데타이자 반란이 되는 것인데 오직 불순한 사리사욕 때문에 군부 엘리트들이 일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치단결해 행동했을까?

군부는 근대화 초입 단계의 한국 사회에서 가장 조직화되고 앞선 교육을 받은 엘리트 집단이었다. 박정희가 안보의 부담을 감당하면서 전면적인 산업화에 나설 수 있었던 것도 군부 엘리트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하나회는 11기 이후 정규 4년제 육사 출신들의 핵심이었다. 이런 엘리트들이 개인적인 사리사욕만으로 목숨을 걸고 12.12와 5.18의 주역으로 나섰다는 해석은 군에 대해서도 인간에 대해서도 시대에 대해서도 무지몽매한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전두환은 6공화국 들어 5공 청산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이 과정에서 ‘해외로 나가라’는 제안이 많았다고 한다.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적어도 일신상의 평안은 보장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 나라에서 죽었으면 죽었지 도망치듯 해외로 나갈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신군부의 수장이자 전직 대통령으로서 명예를 고민한 결과였을 것이다.

최근 파주시장 김경일은 전두환 대통령의 유해가 파주에 묻히는 것을 극렬 반대하며 SNS에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는 전두환의 유해는 파주에 올 자격이 있을까요’라고 묻고 있다. 영화 <서울의 봄> 이태신의 대사를 인용한 발언이다. 나는 역으로 김경일 시장에게 “당신이 전두환을 그렇게 공격할 자격이 있느냐”고 묻고싶다.

김경일이 전두환 대통령이 기여한 몫의 1만분의 1이라도 대한민국을 위해 일한 게 있을까? 인간적으로 전두환이 평생 보여주었던 용기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을까? 전두환을 욕하는 게 시대적 대세인 시대에 전두환을 욕하는 데 가담하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비겁함의 발로일 뿐이다. 전두환 대통령 유족이 파주의 개인 지주에게 땅을 사서 유해를 안장하는 것조차 가로막을 정도로 파주시장의 권력이 어마어마한 것인지도 묻고 싶어진다. 그거 전형적인 관존민비 작태이자 권력 남용 아닌가?

전두환을 짓밟는 이 시대는 비겁하고 잔인하다. 필자는 대학 졸업을 열흘가량 앞두고 전두환 정권 타도를 주장하는 단독 가두시위를 조직해 잡혀간 경험이 있지만 지금 와서는 전두환에 대해서도 5공화국에 대해서도 미처 알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당시의 필자만큼도 용기를 낸 적이 없었던 자들이 전두환 짓밟기에 앞장서서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면 가소롭고 혐오스럽다. 송장에게 발길질하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전두환의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 끽소리 한번 내보지 못했던 자들일수록 더 기승이다. 하긴 전두환 정권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던 젊은이들이 마치 그 시대를 온몸으로 돌파하며 살아온 것처럼 날뛰는 경우도 적지 않더라만.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前 국민의힘 광주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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