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Ⅵ. 기 타안병하 경찰국장 면직 처분※ 안병하(28年, 강원 양양) : 육사 8기, 총경 특채, 경무관 승진(’71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5회 내용은 ‘군 재진입 후 경찰 활동(5.27~)’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경찰은 5월 27일 새벽 5시 계엄군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4회 내용은 ‘계엄군의 철수 이후 경찰 활동(5.22~5.27)’이다. 이 자료에 의하면 경찰은 5월 21일 도청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3회 내용은 ‘계엄군 투입 이후 경찰의 역할(5.18~5.21)’이다. 이 자료에서 전남경찰은 군이 투입된 다음날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2회 내용은 ‘5·18 이전 시위상황 및 경찰의 대응(5월 초~5.17)’이다. 1980년 5월 17일까지 경찰은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전남지방경찰청이 발간한 『경찰관 증언과 자료를 중심으로 한 5‧18 민주화운동 과정 전남경찰의 역할』 자료다. 전남지방경찰청 5․18 민주화운동 관련 경찰 사료수집 및 활동조사 TF 명의로 된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전남경찰청 소속 경찰의 활동상황을 정리해 놓았다. 이 자료를 통해 광주사태 당시 광주 일대에서 시위진압에 나섰던 경찰들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제1회 내용은 위 자료 서두에 수록된 강석복 전남지방경찰청장의 ‘5·18 민주화운동과 경찰’이다.이 글에서 강석봉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서울지검에 제출된 광주 투입 계엄군의 실탄 자급 일시 자료다. 자료에 의하면 5월 20일 21시50분에 광주에 투입된 3공수여단에 실탄이 배부되어 장착했으며, 그로부터 1시간 20분 후인 23시10분에 3공수 16대대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된 11대대, 12대대, 13대대, 15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실탄을 발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광주사태 최초 투입부대 및 실탄 지급일시-----------------------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로 활동했던 김영택 씨의 검찰 진술 내용이다. 김영택 기자는 검찰에서 “5월 22일 계엄군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나타난 500여 명의 시위대는 신군부 측이 광주 시위를 악화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들여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영택 씨의 주장은 확실한 근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진술인의 친지의 미확인 소문을 토대로 한 내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 일원에서 시민들이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총기를 탈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임채문 씨는 나주에서 트럭을 타고 해남경찰서로 이동, 트럭으로 무기고 철문을 들이받아 부순 다음 M1 소총을 탈취했다. 그는 탈취한 총기를 시민들에게 나눠준 후 집으로 귀가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피의자 임채문 신문조서(제3회·요약)-------------------------------------------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시위진압작전에 투입됐던 김완배 3공수여단 12대대장의 체험기다. 김완배 대대장은 광주 출신으로서 1980년 5월 20일 새벽 광주에 도착하여 시위 진압에 나섰으며, 이후 광주교도소 방어작전 등에 참여했다. 특히 김완배 대대장의 광주 대의동 본가는 광주MBC방송국이 불타면서 집의 일부가 불타는 피해를 당하기도 했다. 이 체험기는 육군본부가 발간한 『역사자료』에 들어 있는 내용으로서, 김영삼 정부 하에서 5.18 특별법에 의해 수사가 진행되었을 때 참고자료로 검찰에 제출된 것이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학생수습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던 김종배 당시 조선대 무역학과 3학년 학생의 피의자 신문조서다 자료를 통해 당시 시민군 지도부이 움직임과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을 엿볼 수 있다. 김 씨는 검찰에서 “계엄군과 계속 대치하고 있으면 광주사태가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고, 외국이 여론도 민주주의·인도주의 차원에서 과도정부에 대단히 불리하게 전개되어 4.19의 선례에 따라 과도정부가 전복될 것으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당시 광주에서 제화공이었던 최영철 씨의 광주사태 체험기다. 공수부대원의 가혹한 시위 진압에 분노한 최영철 씨는 5월 19일부터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5월 21일 오후 3시, 광주공원에서 무기를 지급받고 시민군으로 활동했다. 이 와중에 5월 24일 송암동 효덕초등학교 앞에서 계엄군에게 체포되었다. 최 씨의 검찰진술을 통해 당시 계엄군의 진압과정, 시민들이 무장하는 과정, 그리고 송담동 효덕초등학교 부근에서 광주 시내에서 철수하던 공수부대와 잠복하고 있던 전교사 교도대 병력 간에 오인사격
이 문건은 5월18일 오후 광주에 투입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안부웅 중령의 피의자 신문조서 요지다. 안부웅 대대장은 광주에 투입된 이래 계속 시위대에 쫓겨다니다 5월21일 도청 앞에서 포위돼 생사의 기로에 섰고, 시민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던 당시 상황을 적나라하게 증언하고 있다. 안부웅 대대장은 초기에는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에게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에서 조준사격은 없었다”고 했다가 신문이 거듭되자 “62대대로부터 실탄을 얻었다”, “전남도청 앞 옥상 건물에 대원을 배치해 조준사격을 했다”,
이 문건은 1980년 5월18일 새벽에 최초로 광주에 투입되어 유혈 진압을 전개했던 제7공수특전단 33·35대대장의 검찰진술 요지다. 두 대대장은 검찰진술에서 5월18일 광주 투입 첫날 공수부대의 과잉진압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으며, 정웅 31사단장이 공수부대 운용에 있어 미숙한 점이 있었다고 지적했다.-----------------------------------------------------------------------------------------권승만 당시 7공수 33대대장 진술조서(요지) 1996년 1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청 사회과 행정서기로 근무하던 조성갑 씨의 사체 수습에 대한 진술조서다. 조성갑 씨는 노정계 직원이었기 때문에 사체 수습은 본인의 담당업무가 아니었으나 복지계는 물론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을 하려 하지 않아 자신이 나서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체 수습에 나서 광주교도소, 광주고등학교, 광주 동구 대의동 소재 YWCA 등 시내 곳곳에서 사체를 수습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사체가 암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신고한 지역을 답사했으나 대부분은 암매장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술
[편집자 주] 이 자료는 서울지방검창청이 광주사태 당시 시위 도중 사망한 시민과 경찰관들의 사망 원인을 분석한 자료다. 자료를 분석해 보면 사망 원인 중 M16에 의한 사망자가 96명으로 가장 많고,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도 26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카빈 소총은 시민들이 예비군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을 한 것이다. 따라서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시민군의 총격, 혹은 오발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 광주사태 진행 과정에서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은 5월 19일부터다. 이날 2명의 시민이 타박사로 사망했다.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가 조선대 학생들의 유인물을 입수하여 5월 25일 서울시내 일원에 배포한 것이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유인물을 입수한 후 “이 글은 광주에서 벌어진 처참한 상황을 직접 목격한 조선대 학생이 인간으로서는 차마 논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사선을 뚫고 가지고 온 유인물을 본 학생총회에서 편집한 글입니다”라고 설명을 달아 서울시내에 뿌렸다. 하지만 이 유인물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누가 작성한 것인지 등은 밝히지 않았고, 또 자신들이 편집한 내용
[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장 시위대로 활동하던 김유○ 씨의 피의자 신문조서 요약 내용이다. 광주시민 김유○ 씨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가 발생하자 친구를 찾으러 시내에 나갔다가 시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김 씨는 시위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총을 들고 시위를 할 때, 고물상에서 일할 때보다 훨씬 자유스럽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힘이 생겨 주위의 데모대와 함께 어울려 계속 데모를 했다”고 답했다. 그는 또 무장을 하고 다니다가 오발 사고를 내서 35세 가량 된 청년을 중태에 빠뜨린 내용이 신문조서에
[편집자 주] 이 문건은 1979년 12․12 사태 다음날 신군부의 조종에 의해 정승화 후임으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임명된 이희성씨의 검찰 진술조서 일부다.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두환은 계엄사령관인 이희성 씨에게 결재를 받은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군 인사 등 일반 업무는 측근인 노태우나 정호용을 통해 직접 예하부대에 지시했고, 계엄사령관이 발령하는 포고령도 보안사 요원들이 알아서 발령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전두환이 관사를 도청하지 않는가 불안해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1980년 초에 참모총장을 그만 두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