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 자료는 1980년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청 사회과 행정서기로 근무하던 조성갑 씨의 사체 수습에 대한 진술조서다. 조성갑 씨는 노정계 직원이었기 때문에 사체 수습은 본인의 담당업무가 아니었으나 복지계는 물론 어느 누구도 그런 일을 하려 하지 않아 자신이 나서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그는 사체 수습에 나서 광주교도소, 광주고등학교, 광주 동구 대의동 소재 YWCA 등 시내 곳곳에서 사체를 수습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사체가 암매장되어 있을 것이라고 신고한 지역을 답사했으나 대부분은 암매장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도중 숨진 시민들의 사체를 수습하는 장면. 광주시 공무원 조성갑 씨는 자진해서 광주시 일원의 사체 수습에 나서 40여 구를 수습한 내용을 검찰에서 진술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위 도중 숨진 시민들의 사체를 수습하는 장면. 광주시 공무원 조성갑 씨는 자진해서 광주시 일원의 사체 수습에 나서 40여 구를 수습한 내용을 검찰에서 진술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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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술조서(요지) 성명: 조성갑(주거 광주 동구 학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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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1980년 5월 당시 진술인은 무엇을 하던 때인가요.

답 그 당시 저는 광주시청 사회과 노정계에 행정서기로 근무했습니다.

문 노정계에서 사체 수습을 담당했던가요.

답 원래 복지계에서 그 업무를 맡아야 하는데, 그 당시 복지계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그러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 터라 제가 나서게 된 것입니다.

문 어떤 방법으로 사체 수습에 나섰는가요.

답 처음에는 계엄사나 광주교도소 측에서 어디에 사체가 있으니 수습하라는 연락을 해주면 그 장소에 나가 수습을 하다가 나중에는 제가 스스로 나서서 광주시내 외곽의 사체가 묻혀 있을 만한 곳을 찾아다니며 확인작업을 했습니다.

문 진술인이 그 당시 사체를 수습한 일시, 장소 및 그 경위들을 순차적으로 진술하세요.

답 1980년 5월 27일경 그 당시 보사국장 강형수가 계엄사인가 어디선가 전화연락을 받고 저와 노정계장 이무길 등 3명이서 시청 내에 있던 보건소 앰뷸런스를 이무길이 운전을 하여 광주교도소로 가보았더니 운동장에 군인들 판초 우의로 싸여 있던 사체 1구가 있어 그 사체를 싣고, 다시 광주고등학교로 가서 보니 1구는 수위실에 하얀 천으로 덮인 상태로 있었는데 조금 있으니까 보호자가 와서 인수하여 갔는데, 그 사체는 광주고 수위였으며, 또 1구는 광주고 체육관 동쪽 유리창 밑에 쓰러져 있었는데 머리에 총을 맞아 피를 줄줄 흘린 상태로 죽어 있어 그 사체도 검안하기 위해 차에 실어 2구를 전남대 병원 영안실로 안치했습니다.

문 그 당시 사체의 상태는 어떠했는가요.

답 광주교도소에서 발견한 사체는 25세 정도의 남자였는데 M16 총에 맞았는지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는 상태였으며, 그 당시 교도소 측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말바우시장 근처에서 작전을 하다가 총에 맞아서 죽었다고 했는데, 죽은 지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아 부패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주고에서 발견한 사체는 30대의 건장한 청년이었는데 그 사체를 끌고 나오는데 피는 줄줄 흐르고 몹시 무기웠습니다.

문 나중에라도 두 사체의 신원이 밝혀졌는가요.

답 그것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광주교됴소에 묘목이 급히 심어져 있었다

 

문 그 후에 사체를 수습한 경위를 진술하세요.

답 그러한 사체를 수습하다 보니 제가 진압 군인들의 만행에 격분하여 감정이 격해지자 보사국장이 저보고 더 이상 사체 수습이 나가지 말라고 하며 시장에게도 보고를 해버려 저는 알았다고 하고 더 이상 공무상으로는 나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후 행불자 가족들이 시청에 몰려와 행불자 신고를 하며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제가 다시 나가기로 했습니다.

1980년 5월 28일경 시민들이 사체가 있다고 하는데도 시청직원 아무도 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저의 외삼촌인 문병길과 함께 광주 동구 대의동 소재 YWCA에 가서 3층 통로에 총을 맞아 쓰러져 있는 25~26세 정도 되는 남자 사체 1구를 발견하고 시청 사회과로 전화하여 사체가 있으니 차를 보내라고 연락했습니다. 당시 박 기사가 운전하는 청소차인가가 와서 사체를 실어 전남대병원 영안실에 안치하여 놓았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사람이 YWCA 총무로 고아였다고 했습니다.

광주 동구 동명동 소재 전남여구 학교 담 뒤 천변에 쓰러져 있는 35세 정도 보이는 남자 사체 1구를 발견하여 차에 실어 전남대병원 영안실로 안치했는데, 나중에 들으니 이름은 모르지만 약종상을 하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문 계속 진술하세요.

답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사체를 수습하러 갈 때는 항상 박 기사와 같이 다녔는데 그 다음날인 5월 29일인가는 광주 동구 대인동 소재 구 공용터미널 욕조 안에 있던 20세 정도 되어 보이고 총상을 입고 죽어 있는 군용 판초 우의로 싸여 있는 남자 사체 1구를 발견하여 전남대병원에 안치했습니다.

같은 날에 광주교도소에서 사람이 많이 죽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보았는데, 소문에 듣던 장소에 가보니 묘목이 급히 심어져 있는 것처럼 엉성하게 되어 있는 곳이 있어 그곳을 삽으로 파보았더니 포플러 나무 옆 도랑에 한 구덩이에 2구씩 가마니고 암매장되어 있는 사체 8구를 발굴했습니다.

또다시 교도소 정문 앞산에 묻혀 있다는 곳을 찾아가 풀이 뭉개진 부분을 파보았더니 과연 남자 사체 2구가 묻혀 있어 발굴하여 조선대병원에 안치했습니다. 나중에 조선대병원에서의 검시 결과에 의하면 포플러 나무 밑에서 발굴된 사체는 대부분 맞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 이름 중 안두희라는 사람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시내 곳곳에서 사체 발견

 

문 계속 진술하세요.

답 그날 또다시 광주 동구 지원동 소재 1번 종점에서 화순 쪽으로 가는 도로 옆 고랑에 쓰러져 있는 여자 사체 1구가 포함된 사체 7구를 발견하여 상무관으로 안치했습니다. 그날 사회과에서, 상무대에서 사체를 수습해 가라고 온 전화를 받아 저에게 알려주어 그 당시 상무대 근처 백일지구 사격장에 가보았더니 군인들이 사체를 오는 대로 묻으려고 큰 호를 두 개 파놓은 다음 발견되는 차례대로 묻어오고 있는 상태 같았습니다. 제가 가서 이미 묻혀 있는 남자 사체 11구를 발굴하여 상무관에 안치했습니다. 그때 보니 사체 대부분이 총상을 입고 죽은 상태였는데, 발굴 당시 사체에서 소독약 냄새가 많이 났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다음에 주남마을 주민이 “군인이 두 명을 끌고 올라갔었는데 아마 죽었을 것”이라고 하여 가르쳐 준 대로 현장으로 가보았더니 진압봉이 부러진 채로 있어서 그 근처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지점에선가 썩는 냄새가 나서 냄새 나는 곳을 뒤져 보니 잘잘한 자갈밭에 뼈만 나온 손목 부분이 뾰족하게 나와 있어서 그곳을 삽으로 파보았더니 몹시 부패된 남자 사체 2구가 있어서 그 사체를 상무관에 안치했습니다.

그런 다음 인성고등학교 앞산에서 7세 정도 되어 보이는 남아 사체 1구를 발굴하여 상무관에 안치했는데, 그 사체는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지만 시위대가 묻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그 후 효덕동 소재 주택 옆에 논이 있었는데 논바닥에 죽어 있는 20세 정도 되어보이고 총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남자 사체 1구를 발견하여 상무관에 안치했습니다.

그 후에는 31사 근처에 사체가 있다고 하여 그곳으로 가서 그 당시 천일버스 종점 옆에 판초 우의로 싸인 채 묻혀 있는 남자 사체 1구를 31사 병력과 함께 발굴하고, 이어서 31사 병력이 안내하는 대로 일골부락 산속에서 남자 사체 1구를 발굴했습니다. 그 당시 천일버스 종점에서 발굴된 사체는 김상택으로 밝혀졌으며, 일곡부락 산에서 발굴된 사체는 옷을 몇 겹이나 껴입은 것으로 보아 정신이상자로 보였는데 모두 총상을 입고 죽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광주 검찰청에서 그 당시 차장검사가 자휘를 하여 주남마을 뒷산에 사체가 매장되어 있다고 하며 헬리콥터까지 지원하여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체가 있다는 곳이 산속이라 내릴 곳도 마땅하지 않아 사양했습니다.

서방다방에선가 지금 산에 사체가 있는데 가지러 갈 사람이 없으니 지원할 사람이 없느냐고 했더니 젊은 사람 2명이 나서기에 그 사람들과 같이 관을 준비하여 산으로 갔습니다. 20사단 병력이 안내해 주어 꼭대기에 묻혀 있는 사체를 발굴하게 되어 상무관에 안치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체가 조대부중생이었던 김주열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렇게 40여 구 정도의 사체를 수습했는데, 발굴 날짜는 자세히 기억할 수 없어 다소 틀릴 수도 있습니다.

 

시민 제보, 소문 듣고 사체 수습 시도

 

문 위와 같은 외에 발굴하지는 못했더라도 사체 수습을 시도한 사실이 있는가요.

답 예. 그러한 사실이 있습니다.

문 그 일시, 장소 및 경위 등을 기억나는대로 진술하세요.

답 위와 같이 사체를 발굴한 후에도 그 당시 무성한 소문에 따라 여러 곳을 다녀보았는데, 소문에 광주 남구 송암동 소재 그 당시 분뇨탱크에 사람을 죽여 빠뜨렸다고 하여 그해 5월 말경 제가 그곳에 가서 긴 대막대로 일일이 분뇨를 휘저어 보았으나 사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 분뇨통이 있는 곳의 뒤 야산에 그 당시 군인들이 야영하던 흔적이 있고 그 위로 공동묘지가 있어서 그곳에 암매장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사체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문 그 당시 분뇨통 주변의 상황은 어떠했는가요.

답 제가 보기에는 사람이 빠져 죽은 상황은 아닌 것 같았으며, 주변에 옷가지나 신발 등이 많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문 그곳 분뇨통의 구조 및 크기는 얼마나 되었는가요.

답 콘크리트 구조물로서 한쪽이 20m 정도 다른 한쪽이 30m 정도 되었는데, 그 당시 광주시의 분뇨를 처리하기 위하여 모아 두던 곳이었습니다.

문 그러한 분뇨통을 대막대로 저어 사체가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가요.

답. 예. 사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적으로 수면에 뜨기 때문에 대막대로 휘저으면 사체가 있었다면 틀림없이 뜰 것이 분명한데 뜨지 않은 것으로 보아 거기에는 사체가 없었던 것이 맞을 것입니다.

문 그 당시 분뇨통이 있던 곳은 현재 무엇이 들어서 있는가요.

답 지금은 모두 메워져 공원이 되어 있습니다.

 

소문과 달리 암매장 사체 없는 경우도 많아

 

문 분뇨통이 있는 곳 뒤 야산에서는 어떻게 매장 여부를 확인했는가요.

답 그 당시가 여름이라 야산에 풀이 파랗게 나 있었는데, 매장을 하기 위해 땅을 파헤쳤으면 그런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문 그 외에도 사체를 찾기 위해 확인한 곳이 있는가요.

답 예. 앞에 진술한 바와 같은 주남마을에서 사체 2구를 발굴한 지점에서 약 1km 정도 더 떨어진 지점에서 공수부대가 야영을 한 것이 생각나 그곳에도 사체가 매장되어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해 5월 말경 산에 올라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커다란 분지같이 호가 크게 만들어져 있었으며 거기서 공수부대가 야영을 하며 불을 땐 흔적 등이 있었는데, 그러한 야영지 주변을 샅샅이 뒤져 보았으나 매장 흔적은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광범위하여 저 개인적으로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문 그 외에도 확인한 곳이 있는가요.

답. 예. 그 위에도 그 당시 무성하던 소문에 따라 조대(조선대) 뒷산에서 학생이 총을 맞아 피를 낭자하게 흘렸다고 하여 가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으며, 광주 북구 용전 소재 생용저수지에 19구를 수장시켜 버렸다고 하여 그곳에도 가서 저수지 주변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흔적이 없었으며, 수면에 떠오른 사체도 없었습니다.

문 그 당시 광주교도소 근처 교도소 밖 소나무 숲에 4구의 사체가 매장되어 있다는 소문도 있었는가요.

답 그런 소문이 있었으면 제가 확인하여 보았을 것인데, 그러한 소문이 없었습니다.

문 그렇다면 광주비행장 초소 등 황룡강 주변에 사체가 매장되어 있다거나, 광주 화정동 소재 잿등에 사체를 암매장했다는 등의 소문도 듣지 못했는가요.

답 예. 저는 그러한 소문을 듣지 못했으며, 아마 나중에 떠돌던 유언비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문 그 당시 진술인말고 다른 기관 등에서 사체 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선 곳이 있는가요.

답 그 당시 저희 시청 외에는 아무도 사체 수습에 나서지 않았으며, 제가 광주교도소에 사체를 수습하러 갔을 때도 교도소 직원이 아무도 나와 보지 않았었습니다.

문 진술인이 위와 같이 남들이 하기 실어하고 힘든 일을 발 벗고 나선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그 당시 저는 공무원이기는 했으나 시위대의 입장에서 진압 군인의 만행을 보아 왔기 때문에 누가 하지 않으면 저라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문 진술인은 시청 공무원으로서 위와 같이 사체 수습 작업을 언제까지 했는가요.

답 위와 같은 업무를 담당한 사회과에서 1982년경까지 근무하다가 주택계 등 다른 부서를 거쳐 나중에 5.18 피해자 배상을 위한 지원과가 창설되면서 그때 지원과로 소속되어 5.18 피해 배상 대상자 조사 업무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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