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대한민국 정통성의 근원으로 헌법 전문에까지 집어넣어 드높게 기릴 만한 가치가 있는가?

#. 1919년에 만세운동이 폭발한 이유는?

3·1운동은 조선인들이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하여 191931일 한일병합조약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 벌인 사건이다. 국사편찬위원장을 역임한 국사학자 이태진 교수는 3·1운동을 한국 민족사에서 우뚝 솟은 장엄한 역사로 정의한다.

현행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 유추하면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운동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렇다면 3·1운동이 하필이면 한일 병합이 단행된 지 9년 후인 31일에 폭발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무렵 한반도를 강타한 자연재해와 전염병을 원인으로 지목할 수 있을 것 같다. 1918~1919년 조선 북부지방에 미증유의 가뭄 닥쳐 이 일대 주민들이 극심한 기아에 허덕였다. 또, 전국에 콜레라가 대유행하여 사망자가 속출했다. 돌림병의 위세가 대단하여 주민들이 환자를 버리고 도주하여 그 참상이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수십 년 만에 폭풍우가 닥치는 등 대재앙 참사가 겹치면서 한반도는 미증유의 재난에 처하게 되었다.

 

#. ‘죽음의 정치학의 탄생

이 와중에 은퇴하여 덕수궁에서 안락한 삶을 살던 이태왕(고종)이 사망하면서 온 나라가 술렁였다. 고종을 진찰한 일본인 의사들은 사인을 뇌내출혈(뇌일혈)이라고 발표했는데, 고종이 독살됐다는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그 결과 고종의 장례 예행연습일(191931)에 대규모 시위가 폭발한 것이 3.1운동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3·1운동은 이른바 한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 촉발된 시위가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죽음의 정치학’, 즉 시체 데모의 전형에 속한다. 사실 우리 근대사에서 죽음의 정치학의 원조는 고종이 아니다.

신기료장수(신발 수선공) 김덕구는 18981121일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의 철야 시위에서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와 맨주먹으로 싸우다 숨졌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는 그가 비록 신분은 미천하나 개혁운동을 하다 순국했으므로 애국과 충의를 기리기 위해 의사(義士)로 추대함으로써, 이 나라 의사의 원조가 되었다.

의로운 죽음을 거족적으로 기리기 위해 김덕구의 장례는 만민장(萬民葬)으로 거행되었다. 121일 그의 장례에 수만 명의 시민이 참여했다. 상여 앞에 대한제국 의사 김공덕구지구(大韓帝國 義士 金公德九之柩)’라고 쓴 명정을 높이 들고, 상여 뒤에 김 씨의 부인이 작은 가마를 타고 따랐다. 그 뒤로 시민과 학도들이 행진했으며, 만민공동회 회장 고영근이 시민을 대표하여 축문을 지어 바쳤다.

김덕구의 만민장, 고종의 장례식이 촉발한 3·1운동은 946년의 대구 10월 폭동, 19604·19 의거 등으로 이어진다. 한 인간의 죽음이 변혁의 에너지로 상승 작용을 일으켜 정치적 격변을 몰고 오는 것은 일종의 죽음의 정치학이다. 이러한 죽음의 정치학이 반복되는 이유는 윤치호의 지적대로 한국인이 10%의 이성과 90%의 감성으로 살아가기 때문 아닐까?

 

#. 일본 정부, 고종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결정

고종이 사망하자 일본 정부는 그의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정중하고 성대하게 치르기로 결정한다. 일본에서 죽은 자가 국장을 받으려면 황족이거나, 메이지 유신 공헌자이거나 국가에 결정적 기여한 공훈 있어야 한다. 고종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공훈은커녕 갑오개혁 중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 헤이그에 밀사 파견 등 일본을 국제적으로 곤경에 빠뜨린 애물단지였다.

 

3.1운동은 고종의 사망과 장례를 계기로 발생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의 정치학'의 한 전형이다.
3.1운동은 고종의 사망과 장례를 계기로 발생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죽음의 정치학'의 한 전형이다.

 

일본 정부는 현직 총리 재임 시절 한국 병합을 성사시킨 가쓰라 다로(桂太郎)에게는 국장을 허가하지 않았다. 때문에 병합당한 고종에게 국장을 허락하기 위해서는 국가(즉 일본)에 대한 드높은 공훈을 급조해야 했다. 이 난감한 과제를 귀족원(상원에 해당) 의원 마에다 도시사다가 총대를 메고 나선다.

병합하던 해의 일을 곰곰이 회상해 보면 이왕(순종) 전하가 세계의 대세를 깊이 통찰하시고, 또 우리 메이지 대제의 마음을 능히 이해하셔서 동양의 평화를 위해, 조선의 복리를 위해 화평하고 크게 번창하는 오늘이 있도록 인도하셨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또 이태왕(고종) 전하가 우리 황실을 깊이 신뢰하시고 마음으로부터의 성의로써 이에 동의하여 도와주신 것도 매우 큰 힘이 되었다고 본 의원은 깊이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마에다 의원의 발언에 의하면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으로 넘기는 데 흔쾌히 협조함으로써 병합이 평화적으로 이뤄진 점이 그의 공적이 되어 국장을 받게 된 셈이다. 국장을 허가했으니, 이왕이면 화끈하게 조선 민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본 정부는 고단수 처방전을 내놓는다.

그간 일본의 국장 비용은 이토 히로부미 45천 엔, 황족인 다케히토 친왕 5만 엔이었다. 놀랍게도 고종의 국장 예산은 이들의 두 배인 10만 엔. 통 크게 인심을 써 관계자들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들었다. 당시 고등문관시험(요즘의 행정고시)에 합격한 고등관 초임 월급이 70엔일 때다. 고종의 국장 비용은 자그마치 고등관 초임 월급의 1,428배에 달하는 거액이었다.

 

#. 비폭력 무저항 시위 전국으로 번져

국장 일정이 33일로 결정되자 전국에서 참여자들이 몰려들어 경성(서울)행 열차 승객이 폭증하기 시작한다. 227일 아침 부산발 경성행 열차는 전시의 군대수송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인파가 경성에 운집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민족진영에선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의지는 뜨겁게 표출하되 방식은 비폭력 평화적 방식으로 정리되었다. 손병희는 일부 세력이 비폭력 무저항 평화운동이 아닌, 실력행사를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宇都宮太郞)에게 무지한 인민이 폭동 일으킬지 모른다는 특급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손병희였다.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을 표방한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인 손병희.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을 표방한 민족 대표 중의 한 사람인 손병희.

 

그는 31일 파고다 공원의 군중 앞에서 연설 계획을 취소하고 인사동 요정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방식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민족 대표들은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독립 의지를 표명했지만, 피 끓는 열혈 청년 학도들은 입장이 달랐다.

그들은 파고다 공원을 뛰쳐나가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고종의 국장 참여를 위해 상경한 사람들이 이에 가세했다. 국장 후 귀향한 사람들이 도시마다, 동네마다 시위를 퍼뜨림으로써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일본 정부가 비용을 댄 국장이니 장례 절차는 영결식은 일본식, 매장 절차는 조선식으로 절충형으로 진행되었다. 일본식으로 거행된 영결식에 초대받은 사람은 조선 귀족, 각지 유력자 800명으로 한정되었다. 만세운동 여파로 선택받은 800명 중 실제 참석자는 이완용·송병준 등 70여 명에 불과했다.

반면에 조선식으로 진행된 묘역 매장의식에는 15천여 명 운집하여 적막한 국장과 대비를 이루었다. 고종 매장의식에 참여한 조선 민중의 심정은 이랬을 것이다. 

저것은 총독부가 권력으로 이태왕 전하의 유해를 빼앗은 것이다. 우리는 저항할 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고 본다마는, 조선인은 별도로 고래의 전통에 따라 봉장할 것이다. 전하의 유해는 일본인 손에 있어도, 영혼은 우리 조선인에게 있다.”

 

#. 묘비에 쓰일 호칭 문제로 3년간 갈등

고종 국장의 피날레는 묘비에 새길 관직 호칭 문제였다. 이왕가 측은 망자의 호칭을 고종 태황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독부 측은 하늘 아래 황제는 일본 천황 한 분뿐이니 황제 칭호 절대 불가 입장을 완강히 고수했다.총독부 측과, 이왕가 사이에 타협과 절충이 쉽지 않았다.

총독부가 절충안으로  내놓은 () 대한 고종 태황제 를 이왕가 측이 거부하여 3주기가 되도록 묘비를 못 세우고 갈등만 증폭됐다. 조선 풍습에 의하면 3주기까지 봉분 앞에 비석을 못 세우는 것은 역적 아니면 천민임을 뜻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펄쩍 뛴 사람은 고영근이었다.

이태왕 고종의 무덤 앞에 '조선 태황제' 비석을 무단으로 세워버린 고영근. 그는 민비 암살에 동원됐던 우범선을 일본에서 죽인 인물이다.
이태왕 고종의 무덤 앞에 '조선 태황제' 비석을 무단으로 세워버린 고영근. 그는 민비 암살에 동원됐던 우범선을 일본에서 죽인 인물이다.

 

민비 시해에 앞장섰던 우범선을 일본에서 암살한 강경파 고영근은 분연히 일어선다. 192212, 그는 불시에 고종 태황제글씨가 새겨진 비석을 고종 봉분 앞에 무단으로 세워버렸다. 이 소식이 바이러스처럼 퍼진 상황에서 한 번 세운 비석을 허물면 또 어떤 사회 변혁운동이 일어날지. 난감해진 총독부 측은 이 사태에 눈을 감음으로써 고종 태황제묘비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맹신한 조선인들

미국 대통령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 후 각 민족은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이 권리는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라는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한다. 이른바 민족자결주의 선언이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또는 투르크제국 판도 내의 소수민족이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창한 것일 뿐, 조선 독립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내용이었다.

조선인들은 순진하게 이를 믿었다. 믿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이라는 종교적 신념으로 받아들였다. 총독부 관리의 회고에 의하면, “전국에 걸쳐 미국 존중, 미국인 신뢰하는 정도가 극에 달해 통제 불능 상태였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 민중은 윌슨 대통령이 조선 독립을 돕기 위해 가까운 시일 내에 방문할 것이라며 윌슨 대통령 환영을 준비하는 자도 나타났다. 그분이 비행기를 타고 나타나실 것인데, 초행길에 경성이 어디 붙어 있는지 잘 모를 것 아닌가. 그리하여 북한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는 자마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경성 일대 조선 민중은 목을 길게 빼고 북한산 바라보며 윌슨 대통령 나타나기만 기다리다 지쳐 만세운동에 나선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 당시의 회고담이다.

 

#. 묘지 규칙의 후폭풍

총독부는 조선 민중의 반일 만세운동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나름 반상의 계급 질서를 타파하고,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등 할 만큼 했다고 자부했던 터라 심리적 멘붕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들은 반일 시위의 원인을 심층분석한 결과 묘지 문제가 결정적 이유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조선은 예로부터 부모나 조상 시신을 명당 터에 모셔야 후손 번창, 당대발복한다는 풍수 사상을 맹신해 왔다. 덕분에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명당을 선점하기 위한 쟁투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명당에 묘를 쓰면 밤에 몰래 파묘하여 자기 부모를 갖다 묻는 범죄행위가 만연했다.

전국의 산하를 죽은 자들이 차지하고 누웠으니, 이래서야 무슨 근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문명 퉁치를 표방한 조선총독부는 병합 2년 만에 명당풍수에 젖은 조선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벼르고 나섰다.

19126, 총독부는 종래의 미신·누습을 타파하고, 이로부터 생기는 많은 범죄와 쟁송을 예방함으로써 민력의 육성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묘지 화장장 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을 발동한다. 이 규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묘지는 공공단체에서 설치한 공동묘지 이외의 곳에 매장을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조선 사람들의 풍수도참, 명당풍수 문화를 뿌리뽑기 위해 일본은 묘지규칙을 제정, 공동묘지에 묘를 쓰도록 강제했다.
조선 사람들의 풍수도참, 명당풍수 문화를 뿌리뽑기 위해 일본은 묘지규칙을 제정, 공동묘지에 묘를 쓰도록 강제했다.

 

각 지자체별로 공동묘지가 조성되었고, 죽은 자는 반드시 이곳에 매장하는 제도가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명당풍수에 쩔어 있는 조선 사람 입장에서 볼 때 험지, 악산에 부모 묘를 쓰는 것은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후레자식이 된다. 결과적으로 묘지 규칙은 불효자 양산이라는 민심을 거스르는 정책으로 낙인찍혔다. 묘지규칙에 에 대한 반발로 시위에 대거 참여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이 총독부 측의 견해다.

총독부는 묘지 규칙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집행함으로써 조선인의 관습·풍속을 무시하여 불평불만을 사게 된 점을 인정한다. 3·1운동 후인 19199월 묘지 규칙을 약간 완화하게 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 대통령 문재인의 3·1운동 사망자 10배 뻥튀기

조선총독부 공식 집계에 따르면 3·1 만세 시위 참가자는 106만 명. 19193월 당시 전체 인구 1,6788,400명 중 6.32%.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했고, 12천 명이 체포된 것으로 집계했다. 신복룡 교수와 일본 학자 야마베 겐타로(山辺健太朗)3·1 운동 참여자는 총독부 수치의 절반 정도인 50만 명 정도가 참여한 것으로 추산했다.

국사편찬위는 20192, 3·1운동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오픈했다. 여기엔 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3·1운동과 관련된 각종 자료와 수치가 망라되어 있다. 이곳에 올라와 있는 자료에 의하면 3·1 운동 사망자 수는 725934명이다.

그런데 문재인은 대통령 재임 시절인 20183·1절 기념사에서 “3·1운동 당시 7,500여 명의 조선인이 살해됐고 16,000여 명 부상”으로 연설했다. 이때는 국사편찬위의 데이터베이스 오픈 전이니 무지의 소치였다 치자.

다음 해 2월 정부 차원에서 국가 예산을 들인 데이터베이스가 오픈되어 3·1운동 관련 사망자 수가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93·1절 기념사에서 대통령 문재인은 “1919, 한 해에만 전국에서 7,600여 명 사망, 16,000여 명 부상이라고 전년보다 사망자를 100명 더 부풀렸다

이는 작심하고 학계 연구 결과를 뒤집으려는 고의적 작태 아니고 무엇인가. '죽창가'를 오매불망 섬기는 자를 법무부장관에 임명한 대통령이니 3.1운동 사망자 10배 뻥튀기 쯤은 애교로 봐줘야 하나?

 

#. '사회주의의 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나라

3·1운동은 한국 사상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유는 비폭력·무저항, 국제 외교를 통한 독립 쟁취 시도가 실패하면서 다수의 한국인이 사회주의·공산주의·아나키즘, 무장 폭력 투쟁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의 저자 임경석은 3·1운동을 한국 사회주의의 어머니라고 평할 정도다. 당시 조선총독부 내무·경무국장으로 재직했던 아카이케 아츠시(赤池濃)독립 만세 소동(3·1운동)은 세계 혁명(공산혁명)과도 관계가 있고, 3 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도 관계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판단하면 할수록 만세 소동 사건은 만만한 사건은 아니었다”(이충호 편역, 조선통치 비화, 국학자료원, 2012, 97)라는 평을 내놓았다. 쉽게 말하면 3·1운동의 배후 세력이 공산주의였다는 뜻이다.

여러 가지 의심스런 이유 때문에 개화 선각자 윤치호의 3·1운동에 대한 인식은 일반 대중과는 크게 다르다. 그는 독립이 주어져도 조선인은 국가 운영 능력 없어 독립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봤다. 이런 상황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 시위 해 봤자 백해무익하며, 오히려 일제의 무단통치를 연장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국 독립에 대한 윤치호의 냉정한 이성적 성찰은 그의 일기 곳곳에서 발견된다.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대중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현대 국가를 다스리겠다고?(1919228)

주먹만 가지고 기관소총에 덤벼드는 행위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다(1919511).

누군가가 나 혼자 조종한다는 조건으로 비행기나 잠수함을 준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그걸 받을 수 있겠나?(1919711)

3.1운동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손병희와 천도교를 격렬하게 비난한 윤치호.
3.1운동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손병희와 천도교를 격렬하게 비난한 윤치호.

 

게다가 윤치호는 3·1운동의 주역 중 하나인 손병희와 천도교에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그는 천도교 지도자들이 만세 시위에 참여한 이유를 자신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가난하고 무지한 신도들로부터 수백만 원을 사취한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 이름 날린 후 영예와 명성 등에 업고 감옥에서 나와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서. 수십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손병희 같은 사기꾼에게 다년간에 걸쳐 농락당해왔다는 것이야말로 조선 민족이 아직 독립국으로서 생존 향유할 만한 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증거다.”(윤치호 일기, 1919420)

이러한 3·1운동을 우리는 대한민국 정통성의 근원으로 헌법 전문에까지 집어넣어 드높게 기리고 있다. 이쯤 되면 대한민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를 향해 가려는 것인지 도무지  헷갈리기만 한다. 올해 3·1절에도 어김없이 이 나라 언론은 반일·배일 기사를 쏟아내느라 여념이 없을 것이고, 정부는 3·1운동을 기리느라 바쁠 것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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