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서울은 매력적인 도시다. 600년을 자랑하는 역사를 거쳐 "세련된 세계수준의 모던 도시적 풍경과 동방예의지국의 역사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룬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는 정평이 있다.

서울의 역사는 위정자가 바뀔 때마다 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을 바꾸었으며 한양, 한성 그리고 경성이라는 명칭으로 바뀌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오늘날 서울 거리를 걷노라면 여기저기서 역사의 단절이 단편의 풍경으로 되어 나타난다.

서울의 역사는 그의 명칭에서도 잘 나타난다. 한산주, 양주, 광주, 남경, 경도, 한양, 한성부, 경성부 그리고 서울. 이것이 전부 서울의 옛 명칭의 계보다. 신라시대에서 일본 식민지시대까지 불려진 명칭에서 우리는 서울의 유구한 변천사를 짐작할 수 있다.

서울은 조선 초기 성립한 도시 한양에서 출발하여 요새도시로 변모하여 일제시기에는 경성으로 그리고 서울로 큰 변용을 거듭해왔다. 서울 탄생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풍수문화가 있었다. 중국에서 전해온 풍수지리사상에 의해 정해진 수도로서 고려말기의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에 의해 풍수를 보아 한양에 수도를 정했다고 전해진다.

한국어 고유어에서 '서울'이란 수도의 도읍을 의미하는바, 따라서 서울은 고유명사인 동시에 일반명사이기도 하다.

서울은 백여년 전 근대도시로 변모한다. 특히 수도로서 근대 모던 도시로 급격히 변용하는 근저에는 일본 식민지배가 뒷받침되어 있다. 물론 서울의 근대 변모에는 일제 이전 시기의 서양문화 영향을 빼놓을 수 없다.

개화시기 1880년대 서울 도성안은 일본, 미국, 러시아 등 공사관이 들어서고 외국인 거류지가 탄생된다. 그리하여 정동 일대는 전체가 건축박물관이라 해도 좋을 만큼 대한제국 시기 일제 식민지시대의 건축이 즐비하게 늘어선다. 이 지대는 한국 근대사의 발상지의 하나로서 처음 한글 신문이 생기고 외국인과 한국 관료 지식인의 파티가 열린 장소다.

개화기 서양 열강의 외교시설이 밀집해지고 외국인 거리로서 '양인촌'이라 불렸다. 고종이 경복궁에서 도망쳐온 러시아 공사관도 정동에 있었고,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중명전도 정동에 있었다. 정동은 개화기, 대한제국시기 및 일본 식민지시대의 외국 문화의 향이 풍기는 역사적 공간이며 외국이 한반도를 에워싸고 각축을 벌인 축도이기도 하다.

1900년까지 러시아 공사관, 영국 공사관, 프랑스 공사관이 준공되며 또한 교회, 병원, 호텔, 클럽 등이 늘어선 정동은 그대로 서양의 길거리로 변모된다. 러시아인 손탁여사가 세운 손탁호텔도 유명하다.

고종은 경운궁을 수리하고 신고전주의 건축양식의 정전인 석조전을 외국인에게 의뢰하여 서양 국가 모델을 추구한다. 독립문, 공원건설 등 서울을 근대 도시로 건설하려는 고종의 노력이 엿보인다. 그러나 고종의 대한제국은 일본에 의해 와해되고 1905년 을사늑약을 계기로 한국 통감부가 들어서며 1910년 8월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일제시기의 서울은 경성이라 칭했다.

경성은 일본의 주도로 도시 건설 계획 하에 급격히 변모해간다. 1912년 도시 계획법에 의해 경성시구개정계획이 실시되며 도로수개건설이 우선되었으며 제1기 공사는 1913년에서 1918년, 제2기 공사는 1919년부터 실시됐는데 거액의 국비를 투자한 대규모 사업이었다.

경성시구개정의 모델은 도쿄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파리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경성시구개정예정계획선도"를 보면 도로의 직선화와 바로크형 방사선장의 도로계획이 정시(呈示)돼 있었다. 손정목의 '일본통치하의 조선도시기획사연구'는 경성시구개정을 파리의 대개조와 유사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실 파리와 같은 방사선장의 도로가 아닌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도시의 모습은 급격히 변용됐다.

일본식민지 시기 자본주의 성장으로 변모된 서울의 모습에 대해 경기대 건축대학원 안창모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식민지화와 함께 이 땅에 시장경제시스템이 들어왔고, 이는 식민지 자본주의 형성으로 이어졌다"고 밝히고, 특히 단성사, 조선극장, 우미관, 동양극장 등 여러 극장과 카페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시설은 근대문학의 소재로 자주 등장했다는 것이다. 

반면 자본주의의 '그림자' 또한 있었다고 지적한다. 토막촌이라 불리는 슬럼이 고시정(현 후암동), 도화정, 신당리와 북아현리 등에 형성된 결과 1940년대 말엔 토막인 숫자가 비공식적으로 3만6천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백년전 서울은 근대화를 맞으면서 행인지 불행인지 '일본'이란 타자의 지배하에서 '경성'이란 이름으로 모던도시로 변화한다.

경성에서 서울로 돌아온 서울은 100년전 근대를 일본인의 여과장치로 맞았던 조선민족의 역사적 축영으로서 역사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식민도시구조를 어떻게 탈피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재편성할 것인가 하는 것은 한국의 도시건설의 후식민지적 과제로 되고 있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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