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백여 년 전부터 시작된 일본의 조선 식민주의 통치는 현재 우리가 여러 가지 면에서 재고하고 재분석, 재인식해야 할 양상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서 통치를 원활히 하고 헤게모니를 획득하고자 한 노력은 상당히 성공했던 것이다.

조선에 구축한 법체계, 행정 등이 그러하다. 지금도 한국의 학자나 일반인에서는 일본의 통치가 잔혹하고 자의적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그 지배양식 아래 있는 권력과 통치의 논리에 대해 인식하려는 노력은 결여한채로 있다.

현재도 여전히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공헌했는가를 담론하는 것 자체는 사실 똥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필자가 지금껏 담론해온 식민지 조선에서의 근대성 논의는 수백번이고 이 똥구덩이 속으로 자진해서 들어간 거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위험성을 넘어서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정시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한국 성균관대의 교수 이철우 씨는 그의 저서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에서 "일본 통치하에서는 민주적 권력통제가 없었기 때문에 근대성으로부터 일탈하였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전통국가 간여하지 않았던 세밀한 일상생활까지 국가의 권력과 통제가 확대될 정도로 법통치체계가 정비되었다는 의미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고 지적했다.

이철우 교수의 논고에 따르면 조선의 법률, 사법문제에 대한 일본의 통제는 1905년 보호국 시기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한국 정부 내에 일본인 재정고문과 외교고문을 두고 모든 중요정부 부서에도 일본인 고문이 배치되었다.

1907년에는 새로운 '재판소구성법'을 공포해 일본은 사법권과 행정권의 분리를 시도하고 일본법을 본떠서 3심제를 도입했으며 최고심급에 대심원, 최하 심급에 지방재판소와 구재판소를 설치했다.

1909년에는 일본은 한국정부로 하여금 '한국 사법 및 감옥 사무 위탁에 관한 한일각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이리하여 한국의 사법주권이 상실하게 되며 일본이 근대법의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된다.

일본이 이렇게 한 원인은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일본인의 수준에서 보면 아직 한국에는 전근대적이고 기능하지 않은 법에 대한 개선이며 또 하나는 일본의 식민통치 안정화, 장기화, 항일운동에 대한 효과적 통제를 노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선통감부 시대 총검사장을 맡았던 쿠니부산가이 등의 회합기록 '조선 사법계의 과거를 돌아보는 좌담회'에 많은 정보, 자료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기능하지 못한 한국사법제도를 일본의 노력으로 개선했다"는 판에 박은 주장이 나온다.

필자가 하나 주목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보호정책시기와 조선총독부가 조선 말기까지 남아있던 가혹한 형벌제도, 노비제도를 포함한 토지제도, 조세제도를 폐지하고 여성재혼의 자유, 태형의 폐지, 연좌법의 폐지 등 법의 개선을 통해 전근대적 법체계를 근치하려 했던 노력도 보인다. 왜냐면 전근대적 법으로는 일제가 원활히 조선을 지배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그것을 제거해야 하는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보호국 기간 중요한 법령들을 구상, 제정했는데, 1906년의 '토지가독증명규칙'은 토지의 상품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입법이었다. 일본은 한국이 진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적이해관계를 보장하고 확보해 줄 사법 체계를 시급히 도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민전법을 제정할 목적으로 한국 습관에 관한 조사를 했다. 사법 영역에서 180개 민법주제, 48개의 상법주제에 관해 조사하여 일본의 민법, 상법에 따라 선별했다. 그리하여 1912년 '습관조사보고서'를 간행하였다. 이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습관의 유사성, 차이성을 조사한 것으로서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한일병합 후 총독부의 '조선에 시행할 법령에 관한 건'이 조선통치의 칙령 겸 법률로 되었으며, 총독은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닌 제령 제정권을 지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은 1912년 '조선민사령' '조선형사령'을 공포했는데 이 중에는 일본 현행의 민법, 민사소송법, 상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 주요 법전들이 죄다 도입되었다.

그리고 보안법, 출판법, 신문지법 등 언론과 정치 행동 규제를 위한 보호국 시기의 법들이 일제치하 35년 동안 효력을 냈다. 민법 차원에서 '조선민사령'은 한국의 관습이 적용될 여지를 주었으며 한국인의 관습은 공적 질서에 관련되지 않는 한 법률 규정보다 우선되었다. 이리하여 일본의 법학자들은 '조선민사령'은 한국 관습이 존속할 여지를 너무 과도하게 남겨주었으며 조선의 법체계를 너무 독립시켰다면서 경제적 거래에 혼란을 준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이리하여 일본식 습관도 조선의 고유한 사회생활에까지 도입되었다고 이철우 씨가 지적하고 있다. 실질적으로 한국의 현행 법체계는 일본 식민지 시대의 전통을 이은 것이 적지 않으며 근대법치체계가 근대 유산으로서 많이 적용시킨 것도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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