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동아시아 근대사 중 왜 일본이 솔선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이는 오늘날까지도 매력있는 연구과제이다. 흔히 일본의 성공을 졸속히 서양을 따라배우는데 누구보다 아선 '원숭이 흉내'라고 감성적 인식으로 일축하려 한다.

이런 인식 자체에 큰 결함이 있다. 여기에는 왜 일본만이 성공할 수 있었고 그 이유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하는 원인, 배경 규명이 감성적 인식으로 대신해버렸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민족적, 감성적 인식으로 편향돼, 사실 한국, 중국의 일본연구, 인식은 방대한 연구시설과 인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성적, 정서적 내지 정치적 차원에서 답보하고 있는 수준이다. 이점은 심히 안타깝다.

언필칭 '원숭이 흉내'라는 표현으로 일본을 감성적으로 비하시키려는 경조한 태도가 이미 일본의 심층인식을 저애하는 장애물을 스스로 설치한 셈이 된다. 필자가 근대사를 읽으면서 발견된 근대 일본은 결코 '원숭이 흉내'라는 말로 일축시킬 수 없는 유연한 문화력이 구비돼 있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일본의 한문의 소양이 이미 백여년 전인 에도시대 말기에 서민에 이르기까지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필자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솔선 근대화에 성공한 중요한 원인은 바로 에도시대에 한문의 소양을 습득한 데 있었다. 즉 환언하면 한문의 힘이 국력으로 되어 서양 근대문명을 수용할 토대가 이미 중국이나 조선보다 널리 비치돼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내실에 대해 좀더 상세히 고찰하기로 하자.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이라는 말이 정시하다시피 한문은 동양의 세계어였다. 한문은 하나의 불가결의 교양이었으며 그 자체가 전근대 아시아를 지배한 고위 언어였다. 한문으로 중국인, 한국인 그리고 일본인도 필담으로도 의사소통이 잘 되었던 것이다.

한자가 일본으로 유입된 것은 2천년 전 일본의 야요이 시대였다. 야마토 민족에게 있어서 추상적인 개념은 한어를 통해 완성되었으며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를 거쳐 막말, 메이지에 이르러 한문은 일본 문명에 기적적인 고도성장을 가져다 준다.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야마토 민족은 6세기 경에 한자, 한문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되며 근근히 200년 사이에 고도성장을 이루어 8세기에는 '일본인'으로 형성된다. 그리고 한문은 훈독법으로 읽는 방법을 창설하여 일본식으로 한문을 해독했다. 이는 한자문화권에서는 미증유의 방법이다. 일본 메이지대학의 문학연구자 가토 도오루 교수는 일본의 한자문화의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한자를 '외국문자'로 보지 않았다. 2. 한자에 음독과 훈독으로 읽는 법을 만들었다.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는 한자는 음독 뿐이다. 3. 하나의 한자의 독법이 복수로 다양했다.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는 한자는 일자일음이 원칙이었는데 말이다. 4. 한자를 토대로 일찍이 민족 고유의 문자를 창조했다. 가나의 발명은 한반도의 한글이나 베트남의 문자보다 빨랐다. 5. 중국에 한어를 역수출하여 '은혜갚기'를 한 유일한 외국이다. 즉 메이지 시대의 일본인이 만든 '신한어'는 현대 중국에서도 보급되고 있다. (가토 도오루, '한문의 소양')

일본무사라 하면 야만인으로 간주하기가 십상이지만 에도 시대의 한문 붐에 의해 일본의 무사는 중국이나 조선의 사대부, 선비 못지 않은 문화적 교양인이 되었다. 에도 시대에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조선에서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여 문화교류를 했는 바, 조선통신사들은 유교의식으로 일본을 야만으로 경시하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그들까지도 당시 일본의 출판업 호황과 한적 출판물의 풍부함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조선에는 한문을 해독할 수 있는 것은 상류지식인에 제한돼 있었다. 일본처럼 한문훈독법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인이 한문을 읽을 수 없었던 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것이 일본과 조선 한문 독법의 차이였으며 결국 조선이 근대에서 일본에게 뒤지는 원인의 하나로 되었다. 조선의 식자층이 엷었으며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일본의 지식인은 해외정보를 열심히 수집하고 조선과 중국에서 수입한 한문서적을 탐독하여 흡수했으며 중국 청나라 내부에서 금지된 서적도 일본에서는 일반인을 향해 팔고 있었다. 명말청초 청군이 한국을 학살한 기록서 '양주10일기'나 '가정도성기략'은 청나라의 금서였지만 일본에서는 공개출판돼 널리 읽혔다. 그뒤 일본 유학을 온 노신은 이 두 책을 접하고 인쇄하여 중국으로 보냈다고도 한다. 이 두 책은 '멸만흥한'의 기폭제로 되기도 한다.

에도 시대의 한문 붐은 일본을 넘어서 동아시아 근대사에 큰 영향을 준다. 청국에도 없는 중국 고전서적이 일본에서 남이 잘 보존, 보급돼 있었기에 근대 중국 지식인들은 일본에서 중국의 귀중한 서적을 사들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중국문화'라고 이들은 표현하기도 했다. 에도시대 한문 문화의 중심으로 된 것은 무사계급과 보통 백성 정인이었다. 그러나 막말이나 메이지에 이르러 무사나 정인만 아니라 농민까지도 한문을 배우게 된다. 1860년대 일본의 식자율은 54%로 세계 1위였다고 한다. 하급무사는 물론 야쿠자나 농민마저 한문을 장악하고 읽을 수 있었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있는 일이었다.

이렇게 에도시대에 이미 '에도 문명 시스템'이란 문명이 형성됐으며 풍부한 한문소양으로 서양의 문명충격을 흡수할 문화풍토가 마련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시아에서도 '일본이 한문의 힘을 국력으로 바꿀 수 있는 유니크한 힘'이었다. 필자는 일본 근대 성공의 단순히 메이지유신보다도 그 앞서 전근대 에도 시기에 이미 한문의 풍토로 근대화를 맞이할 힘이 양성되었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 연구를 더 심도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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