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 국제문화연구원장
김문학 일중한 국제문화연구원장

 

개화파 엘리트 김옥균 등이 주도한 1884년 갑신혁명(갑신정변)은 결국 3일천하로 실패로 돌아갔다. 김옥균을 필두로 한 개화파는 갑신혁명을 통해 혁명정부를 수립하고 14항목에 달하는 정치강령을 발표했다.

그 주요내용은 청국으로부터의 독립자주, 신분제도의 폐지, 인민평등의 권리, 조세제도의 개혁, 경찰제도의 신설, 행정기구의 개편 등 근대화 개혁, 근대국가의 창설에 위한 요긴한 조치들이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한 군주입헌제 국가를 지향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미 청국이 세계정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별 개혁을 보이지 못한 시국하에 일본 메이지 유신만이 개화파들이 추구한 이상적인 개혁 모델이었다. 독립자주, 부국강병으로 근대국가의 건설을 지향한 개화파의 정책이 그대로 줄곧 실행해 나갔다면 조선의 그뒤의 운명은 바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가슴아프게 조선의 내부로부터 있은 근대화 개혁은 언제나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수포로 돌아갔다. 이번 혁명의 실패의 원인은 구경 어디에 있었을까?

한국 국정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는 그 이유를 "개화당의 인물들이 너무 성급하게 서둘렀기 때문에 준비가 부족했으며 개화당 개혁에 대한 일반 국민의 이해가 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원인은 당연히 원인 중의 하나이지만 절대적 원인은 아니라고 필자는 본다. 더 중요한 원인은 다른 곳에 있었다. 즉 절대적 본질적인 원인은 조선왕조 내부의 보수세력이었다.

한마디로 찍어 말하면 민씨정권(민비)의 반격이었기 때문이다. 민비를 비롯한 민씨정권이 조선 근대사에서 노정시킨 행동은 거시적으로 보아 조선근대화의 장벽이 된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민비가 남몰래 밀사를 파견하여 청국군의 병영으로 가서 고종과 민비를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니 청국에게는 조선정변 개입에 대의명분의 구실을 주게 된다.

당연히 개화당 혁명가들은 청군의 개입을 상정했지만, 그들의 상상 이상으로 청군은 결사적으로 임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고종 이상으로 권세를 부리던 원세개는 청군 1500명을 거느리고 창덕궁을 공격했다. 이미 청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전하여 베트남을 잃었기 때문에 조선이란 종속국까지 일본식 유신을 거쳐 독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개화당이 기대했던 일본군은 150명에 지나지않았는데다 갓 탄생한 조선의 혁명정부를 지키는 데 소극적 태도였으며 전투도중 후퇴하였다. 2년 전의 임오군란과 같이 민비가 청군을 요청하고, 청군은 조선개혁을 괴멸시키는데 혈안이 되었다. 결과 개화파가 대부분 피살당하고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9명 리더는 일본에 망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근대 조선의 개혁에 민비와 청국은 늘 반동적인 장벽이 되곤 했다는 것이 발견된다. 그러나 조선근대사 인식에서 한국에서는 지금까지도 청국에 대한 마이너스적 태도를 외면하고 일본에 대한 개혁을 규탄, 매도하기를 즐긴다. 그리고 민비에 대한 역사적 역행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식이 부족한 드샇다.

민비의 역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894년 3월 민비는 자객 홍종우를 파견하여 상해에서 김옥균을 암살하고 또 그 시체까지 조선으로 끌고와 능지처참 형을 가하는 바, 그것이 또한 청일전쟁의 하나의 원인을 만들어 준다. 실제로 민비와 청군의 갑신정변 탄압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청국에 대한 강경론이 커졌으며 내각에서는 청국에 선전포고를 주장하는 자도 나왔다. 그리고 민간에서도 청국응징의 궐기대회와 데모가 일어났다. 1885년 이노우에 가오루가 전권대사로 군함 3척을 끌고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로 가서 김홍집과 <한성조약>을 제결하여 일본에게 사죄 보상하였다. 김옥균 암살사건 후에도 일본의 대청전쟁론이 불등했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 발표된다.

그럼 계속하여 갑신혁명 실패의 원인을 추궁해 보자. 필자는 많은 착종한 원인에서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겠다.

(1) 임오군란이 있은지 2년 후에 발발한 갑신정변이었으나, 임오군란 당시의 실패경험을 교훈으로 섭취하지 않았다. 민비가 임오군란때처럼 밀사를 보내 청군을 끌어들여 신정권을 일거에 무력으로 짓부셔 버렸다.

(2) 한국에서는 '일본의 배신의 치명상'이라고 하는데, 김옥균 등이 일본의 지원을 과대하게 기대하고 상응한 무력확보가 결여했다.

(3) 중대한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개화당은 치밀히 기획, 전략전술이 모자랐고 내부 밀고자가 있어 정보가 샜다.

(4) 개화당은 혁신을 주장한 김홍집 등 대물 정치가와 연합해야 했지만 단독으로 행동했다.

필자는 한마디로 '적은 늘 내부에 있다'는 격언으로 실패원인을 같이 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21세기 오늘도 한국의 현실은 이와 다름없음을 느끼며 필자는 가슴이 아프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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