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 조사를 주장했던 파견검사들, 전두환사령관 주최 망년회에 불참한 검사는?

12·12사태를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개봉 나흘만에 관객 100만명을 돌파하면서  장기 침체에 시달리던 한국 영화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 영화는 김성수 감독의 성향에 따라 전두환 전 대통령 등 12·12사태의 주역, 신군부를 철저한 악당으로 묘사하고 있다.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이 영화가 얼마 남겨두지 않은 22대 총선에 미칠 영향에 까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다.

44년이나 지난,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 당사자들 또한 대부분 사망한 시점에서 영화가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이런 역사적, 정치적 의미 보다는 관객을 사로잡는 긴박함과 총격전 장면 등 작품성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는 것이 평론계의 지적이다.

12·12에 대해서는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합동수사본부가 최규하 대통령 및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재가를 받지않고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불법 연행한 점을 근거로 반란행위에 해당된다는 법률적 판단과 당사자들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 상태다.

그러나 당시 합수부 파견검사로 비교적 제3자의 입장에서 지켜봤던 사람들의 증언은 이와 사뭇 다르다.

서울중앙지검장과 서울고검장,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현재 법무법인 주원의 대표를 맡고있는 이건개 변호사는 기자와 만나 나를 비롯한 파견 검사 대부분은 10·26 직후에 전두환 본부장에게 박 대통령 시해 당시 궁정동 현장에 있었던 정승화 총장을 엄중 조사해서 김재규와의 연루혐의를 추궁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전 본부장이 직속상관이자 계엄사령관인 정 총장에 대해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못해 일을 키운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19791026일 김재규 중앙정부부장에 의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자동적으로 군과 검찰, 경찰을 지휘하는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수사를 벌였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에는 서울지검의 공안부 및 특수부 검사 7명이 파견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군 선배, 이용문 장군의 아들 이건개 검사도 그중 한명이었다.

이건개 검사의 선친 이용문 장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창군(創軍) 멤버중 한명으로 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수도사단장, 남부지구 경비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이용문 장군은 1953624일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을 지휘하던 중 전라북도 남원군 운봉면 상공에서 타고있던 경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 당시 그는 주말을 맞아 대구에 군무중이던 후배 박정희를 만나 저녁을 먹으러 가던 길이었다.

19615 · 16군사정변 후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대구 근교에 있던 이용문 장군의 묘소를 수유리로 옮기는 이장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8년부터는 매년 육사에서 이용문 장군배 승마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검사가 된 이용문 장군의 장남 이건개를 각별히 챙겼는데, 대통령 비서실의 사정담당 비서관으로 차출하는가 하면, 1971년에는 28살의 그를 서울시경국장에 임명하기도 했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경찰조직의 개혁을 위한 것이었다.

이건개 검사는 청와대에 함께 근무한 인연으로 전두환 보안사령관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10·26 당일 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건개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을 알려주고 자신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게됐다면서 내일 아침 일찍 내 사무실로 와달라고 했다.

이에따라 합수부에 파견된 이건개 등 서울지검 검사들은 보안사 요원들이 조사해서 만든 김재규 박선호 박흥주 등 관련자들의 조서를 검토해서 추가로 조사해야 할 내용을 지시하는 등 수사지휘를 했다. 필요한 경우에는 김재규 등을 직접 신문하기도 했다.

이건개를 비롯한 검사들은 초기부터 전두환 본부장에게 정승화 총장의 조사 필요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전두환 본부장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럴 필요가 있나?” “그렇게까지 해야되나?”라는 말만 되내였다고 한다. 이건개 변호사는 이를 두고 군인들이 검사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고 윗사람 눈치를 살피는구나 라고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연말 인사에서 동해경비사령관으로 내보내는 것이 좋겠다는 정승화 총장의 건의가 누설되고, 이에 전 사령관이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의 재가없이 체포에 나섬으로써 하극상에 의한 반란행위가 된 것이다.

이에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은 나중에 법정에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명백히 연루된 정황이 있는 정승화 참모총장이 자신을 향해 수사망이 좁혀져오자 합수본부장인 나를 교체하려고 했기 때문에 비상한 방법 즉, 기습이 아니고서는 체포할 수가 없었다는 취지로 항변했다.

실제로 12·12때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하나회 소속 신군부 인사들을 반란군의 거점인 수경사 30경비단으로 불러 모으면서 이렇게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경유하지 않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체포재가서를 들고 간 이유이기도 했다.

19791212일 그날, 전두환 보안사령관겸 합동수사본부장이 정승화 총장에 대한 체포재가서를 갖고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간 것은 저녁 540분쯤이다.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공관에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기 위해 도착한 시각은 7시경.

하지만 최규하 대통령은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데리고 오라는 등의 이유를 대면서 12시간 가까이 결재를 해주지 않았다. 전두환 사령관의 신군부측이 1공수여단을 육군본부가 아닌 국방부 청사에 투입한 것도 노재현 장관을 찾기 위해서였다

최규하 대통령이 정승화 총장 체포를 재가해준 것은 노재현 국방부장관의 건의 때문이었다. 노 장관은 모든 상황은 끝났고, 더 이상 지체하시면 우리 군끼리 충돌에 의한 유혈사태를 피할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신군부가 정승화 총장 체포한 배경을 놓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의 차이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의 주축은 박정희 대통령이 키운 것이나 다름없는 하나회 출신들이 주축인데, 10.26 이후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수본부장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에 대한 분노,  복수심에 가득차 있었던 반면 정승화 총장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12·12 사태에서 승리를 거둔 신군부측 장성 및 고위 장교들은 이틀 뒤인 14일 보안사 마당에모여 승리를 기념하는 사진을 찍고 자축파티를 한다. 그리고 일주일쯤 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수부에 파견된 검사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면서 망년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파견검사 7명 중 한명이 그날 지방에서 중요한 일이 있다면서 참석하지 않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합수부에 파견된 검사들은 5공화국은 물론 6공화국에 들어서도 1순위로 검찰내 요직을 차지했다.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전두환 사령관이 주재하는 망년회에 불참한 검사는 그렇지 못했다. 요직은 고사하고 한직을 전전하다가 검사장 승진 또한 사시동기 보다 몇 년 지나 노태우 정부의 마지막해에 간신히 했다.

12·12 파견검사 중 한명이 서울지검 부장검사를 하고있을 때 같이 합수부에 갔는데 왜 그 사람만 다른 대접을 받고있느냐고 물어봤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전두환 사령관 주최 망년회에 지방에 일이 있다면서 못온다고 했는데 그 다음날 새벽에 서울의 한 호텔 사우나에서 우리랑 마주친거야. 우리가 지방간다고 해놓고 서울에 있었네라고 하자 더듬더듬 말을 못하더라고. 12·12가 터지니까 무서웠던 모양이야. 나중에 역적이 될까봐...“

하지만 그 또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자 검찰에서 고검장까지 승진했고, 김대중 정부 때는 장관급 공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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