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6차 핵실험,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PG).(사진=연합뉴스)
북한 6차 핵실험,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PG).(사진=연합뉴스)

북한 당국의 핵폭발 실험에 따른 방사능 피해 증언이 20일 나와 눈길이 쏠리고 있다. 바로 북한에서의 핵실험 문제에 대한 직접적 피해를 입었다는 북한 길주군 출신 탈북자들의 증언이 나온 것.

국제PEN망명 북한센터는 20일 광화문 일대 센터포인트에서 제20회 북한자유주간 행사로 함경북도 길주군 출신 탈북민들의 핵실험 피해 증언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는 북한인권국제대사를 맡고 있는 이신화 고려대학교 교수, 수잔 숄티(Suzanne Scholt) 북한자유주간 대회장이 함께 했다.

북한 핵실험은 이미 북한 당국에 의해 지난 2006년부터 최근까지 6번이나 강행되었지만, 핵폭발 이후의 이야기는 그간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북한의 폐쇄적 행태로 인해 그만큼 수집된 정보 및 첩보의 표본이 적은 탓이기도 하다.

비록 수집보고된 표본량이 적다거나 혹은 정량화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실제 북한 주민들의 증언은 이 사건 북한의 핵실험 이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주요 렌즈라고도 할 수 있다.

북한 핵실험 및 핵폭발 문제의 위력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증언이 갖는 의미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음이다.

이에 <펜앤드마이크>는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이날 북한자유주간의 '북한의 핵 시험 피해사례 증언회'에서의 증언들을 전문 형식으로 밝히고자 한다.

수잔 숄티 북한자유주간 대회장이 20일 광화문 일대 모 빌딩에서 열린 북한 핵실험 피해 증언회의 모두발언에 나선 모습. 2023.09.20(사진=조주형 기자)
수잔 숄티 북한자유주간 대회장이 20일 광화문 일대 모 빌딩에서 열린 북한 핵실험 피해 증언회의 모두발언에 나선 모습. 2023.09.20(사진=조주형 기자)

#1. "어느날 갑자기 핵실험장 들어서더니 귀신병 천지 지옥이 됐다"

북한의 핵실험 피해 증언에 나선 이는 함북 길주군 출신 탈북민인 이영란·김순복·남경훈·김정금 씨 등으로, 먼저 이영란 씨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발언록 전문 형식으로 소개한다.

▲저는 길주군에서 56년간 살았고, 70년대에 군 관련인들을 이주시켰고 핵실험장이 들어올거라고 누구도 예상 못했습니다. 2013년 3차 핵실험 이후 북한 뉴스에 나오니까, 이제 핵실험장이 되었다고 알게 되었다. 그때 기차가 서기도 했는데, 그 이후 일방 통과했었다. 군 관계자들이 무기를 고치기도 했고, 군 사택에도 일반인들이 못들어가게 되면서 어떻게 됐는지 이제 모르게 됐다. 거기에는 경비 군 시설만 있다. 당시 길주군에서 핵실험 했다고 해서, 우리는 장마당에 나갔을 때, 당시 사람들은 모두 미국이 꼼짝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오고나서 핵실험의 방사능 영향이 인간의 신체에 영향을 어떻게 주는지 알게 되면서 놀라게 됐다. 북한에서는 길주군 핵실험장에서 나오는 물을 갖고서 식수로, 생활수로 썼다. 제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같이 어울렸던 아들 동무들이 모두 결핵 비슷한 진단을 받았다. 그런데 그 병을 얻으면 통상 4일을 못넘긴다. 아들도 그 병을 얻었는데, 결국 살 수 없다고 했다. 그 이후 탈북하게 되면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어찌어찌해서...제 아들은 병을 진단 받은지 얼마 안됐는데 일어나지를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아들은 그 이후 북한의 혜산에 왔을 때 브로커를 통해 치료자금을 넘기니까, 아들이 평양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겠다고 했다. 아들이 결국 평양병원을 못갔는데, 당시 북한 당국이 이런 결핵 등의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일절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다며 봉쇄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류의 피해는 길주군 전체의 피해 사례라고 본다. 어디도 갈 수 없고, 병 치료도 할 수 없다는데, 지금은 한 집 건너 모두 폐암 등 암 환자 천지다. 사람이 살 수 없는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 사람이 산다는 것이다.

▲그곳은 핵실험 오염수가 흘러나와 나재천을 통해 동해바다로 간다. 북한 주민들은 모두 이런 물을 마시고 산다. 길주군의 핵실험장이 들어서고서, 산천어가 온데간데 없어지고 송이버섯류가 그렇게 많이 나온다. 언젠가부터는 갑자기 송이버섯류도 아예 없어졌다. 핵실험장 건설에서는 16호 정치범 수용소 인원들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20리도 안되는 구간에 위치한 곳이다. 정치범 수용소 인원들도 많이 죽었다. 함경북도에서 각 농장들로부터 정치범 관리소 인원이 아니라 농민들을 보냈다. 그 농민들 가보니, 먼저 있었던 군 관련 시설을 써야 했는데 앞서간 그들도 시설을 쓰다가 강냉이도 모두 남긴채 떠나갔다.

▲길주의 제 가족들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다. 이걸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저는 제 아들의 죽음도 볼 수조차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모른다.

북한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사진=연합뉴스)
북한 함경북도 풍계리 핵실험장.(사진=연합뉴스)

#2. "길주군 마을에서 함부로, 그것도 아프다고 말하면 어느날 사라진다"

이번에도 길주군 출신 탈북민 김순복 씨의 증언담이다. 그의 이야기 역시 발언록 형식의 전문으로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길주군 출신인데, 핵실험장이 생기면서 길주군 일대 풍계리 핵실험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맞닿으며 살아왔다. 어느날 결핵류 병, 피부 관련 질환자들이 급격하게 늘었다. 어린아이들도 관절염으로 고생했는데, 아들과 딸도 늘 기침과 감기를 달고 살았지만 낫지를 못했다. 이런 증상을 밝히면 안된다는 분위기였다. 동네의 사람들이 없어지거나 산의 자연물들이 없어져가는 현상이 계속됐다. 길주군의 자연물들은 없어지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모두 빠져나가려고 했다.

▲결핵환자와 암환자들이 늘어났는데, 다들 워낙 생활이 어렵다보니 핵실험장 근처에서 피해를 입었다고 말할 처지도 되지 못했다. 핵실험장을 폭파한다고 할 때 주민들은 기다렸지만 그 이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TV에 보면 김정은(국무위원장)의 딸(김주애)가 나오는데, 이곳 길주군의 물을 마시도록 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내 딸은 세상을 떠났다.

다음은 길주군 출신 탈북민 남경훈 씨의 이야기다.

▲저는 길주군에서 태어나 50년 이상 살다가 탈북했다. 고향의 이야기, 길주군의 풍계리 핵실험장이라니...하나원에서의 조사관이 건강에 대해 물어볼 때 어쩔 수 없다는 취지의 답변을 한 바 있다. 방사능 문제로 식수가 오염되었다지만, 당에서 하는 일이고 이를 물어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눈감고 귀를 막고 살수 밖에 없다. 핵실험장이 생겨난 저의 고향 길주군은 철도가 있는 곳인데, 풍계리는 맑은 계곡이 흐른다는 곳이면서 높은 산들이 많다. 핵실험장이 세워지기 전 남재천에서는 물고기를 잡고 어죽을 쑤어먹었던 곳이다. 송이버섯을 따러다니기도 했다.

▲풍계리 일대에서는 '사도'라는 곳이 있다. '뱀사(蛇)'를 쓰는 이유는 뱀이 많아서인데, 핵실험 이후부터 뱀이 없어졌다. 피폭으로 식수가 오염됐을 거라는 시선은 많은데, 어느날부터 돌덩이들이 수도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동네에서는 관절염 환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는데, 다들 이를 보고 귀신병에 걸렸다며 두려워했다. 당시 배고픔 등으로 힘들어했기에 이에 대해 말할 수 없었다.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활동 재개.(사진=연합뉴스)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활동 재개.(사진=연합뉴스)

#3. "조선인민군에 입대한 동생, 간신히 돌아왔지만 온몸이 피투성이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탈북민 김정금 씨의 이야기다. 북한의 조선인민군에 강제로 입대하게 되어 북한 내 핵 관련 시설 경계부대에서 근무했다가 끝내 생사를 달리하게 된 동생의 이야기다.

▲저는 지금까지 핵실험에 대하여, 핵기지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핵기지에 대해 말할 때에는 그에 따르는 대가, 가족들에 대한 뭔가의 행태가 있어서다. 저는 청진에서 태어났고, 제 동생은 1990년대 군(조선인민군)에 입대했다. 각종 물리학, 수학 대회에 나갔는데 동생이 있었던 당시 북한 당국의 NPT 탈퇴선언이 있었는데 분위기가 계엄령 수준이었다. 원래는 대학에서 기술을 배우려고 했던 동생은, 군에 입대하게 됐다. 북한의 학급 반장을 했을 당시 강제적으로 군에 나가게 됐다.

▲하지만 제 동생은 13년 동안 한번도 집에 오지 못했다. 집에 오는 방법은, 2xx이라는, 부대번호명칭, 특수부대, 즉 핵기지로 가게 됐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됐다. 제 동생은 연변 핵기지, 그곳을 지키는 부대였다. 핵기지도 아니었는데... 그 주변을 지키는 그런 부대였다. 그래서 제 어머니가, 평양에 줄을 대서 들어가보니 군인들이 모두 말라 비틀어져서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다는 게 제 어머니의 이야기다. 이후 군 관련자들에게 물어보니, 제 동생은 핵기지 경계부대로부터 간신히 빼내게 됐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핵기지 시설에서 근무하는 사람은 40을 넘기지 못한다고 해서 나오는 경우가 없습니다. 40살을 넘기지 못한다니...그 이후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갔습ㄴ다. 그런데, 동생이 다리를 저는데, 다리에 피고름이 잔뜩 있었다. 악어가죽 같았다. 온몸을 뒤덮었는데, 너무 놀라 동생에게 물어보니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숨기려고 했다. 동생 말을 들어보니 열손가락을 찍고 나왔다는 것이다. 밥을 먹고 시설 관련, 어떤 이야기도 하지 말라고 하여 가족들에게도 이를 밝히지 않으려 했다. 겨우 한다는 소리가, '누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기 있는 군인들 모두 제대시키지 않아요', '어차피 다 죽을 사람들이니까요'라고...

▲여러분, 여러분들은 핵기지에서 제대한 사람 못봤을 것이다. 이후 제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쫓아왔다. 결국 저는 탈북을 했고, 동생에게 약값을 보냈는데 어느날 제 동생이 '누나, 제가 많이 아파요'라고 했다. 제가 한국에 와서 두부 한모 아껴가서 약값을 모았는데, 동생이 아프다고 했다. 그날이 언제냐면, 3월말, 천안함 폭침 사건이 있던 날이다. 그 때 동생의 아내가 제게 말하길 '죽었다'라고 전했다. 이런 사람들이 저 하나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핵기지에서 제 동생처럼 죽어가고 있다. 저는 한국에 와서 핵기지에서 있었다는 사람들을 찾으러 다녔다. 핵기지에 들어갔다가 병치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계속 핵기지에서 운전기사로 물건을 운반했다는 것인데, 이 사람은 나무 함짝을 뜯어봤더니 그 안에 영어로 쓴 글씨가 있었고 또 뜯어보니 계속 함짝이 나왔다는 것이다. 영어로 되어 있었고.

▲이 사람은 세번 뜯고 겁이 나서 원위치 했는데, 그 다음날 보위부(국가안전보위부, 북한의 보안통제기구)에서 내려와서 요양치료 받으라고 해서 1xx보안소에서 운영하는 곳인데 깊은 산속에 병실이 늘어서 있다.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자꾸 요양하라고 하는 것인지 의아했다는 것이다. 한달 정도 되는 시점에 간호사한테 물어보니, 간호사가 '일주일 남았다'라고 했다. 이게 북한이다.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서 남한의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핵개발하면 남한도 좋지 않겠느냐'라는 얼빠진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은 이런식으로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다. 부디 도와달라.

한편, 이번 '북한의 핵시험 피해사례 증언회'는 길주군 출신 탈북민들의 증언을 밝히기 위해 국제PEN·북한망명펜센터 등이 주최가 되어 진행됐다./

조주형 기자 chamsae9988@pennmike.com

북한 핵시설 사찰단(PG).(사진=연합뉴스)
북한 핵시설 사찰단(PG).(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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