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안중근이 집필한 자서전 '안응칠 역사'나 그에 관한 전기 그리고 일본인의 증언을 종합하면 안중근 성장의 배경에는 불가피적으로 '일본'이란 요소가 다분히 들어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00여년 전 조선의 근대화 및 식민지배에 깊숙이 연결된 일본의 영향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안중근은 처음부터 무조건 일본을 배척하고 증오한 것은 아니었다. 안중근의 가족도 일본을 기피한 반일가가 아닌것은 안중근 연구의 제1인자인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 원장의 말에서도 입증된다. "돌이켜 생각하면 안중근은 일본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버지가 일본유학을 가려다 갑신정변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던 만큼 일본의 신문화에 흥미가 컸다."('안중근' 예술의전당 2009년) 최원장의 말을 입증하는 기록이 안중그느이 자필 자서전 '안응칠 역사'다.

"1884년경 경성에 가서 머물 적에 박영효씨가 깊이 나라의 형세가 위험하고 어지러운 것을 걱정하여 정부를 혁신하고 국민들을 개명시키고자, 준수한 청년 70명을 선정하여 외국(즉 일본)으로 유학시키기로 했는데 아버지도 거기에 선발됐다. 그런데 슬프게도 정부의 간신배들이 박영효씨를 모함하여 반역죄로 몰아붙여 체포하려 하자, 그때 박씨는 일본으로 도망하고, 그 동지들과 학생들은 살육당하고 혹은 체포되어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나의 아버지는 피신하여 고향으로 귀향해 살며 조부와 서로 의논하되. '국사가 날로 틀리려 하니 부귀공명은 바랄 것이 못됩니다'하고 말씀했다. '하루라도 빨리 고향에 돌아가 산에서 살면서 구름아래 밭이나 갈고 달밤에 고기나 낚으며 유유자적 세상을 보내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라고 말씀했다. 그러고는 집안의 살림을 모두 팔고 재산을 정리하여 마차를 준비해 가족들을 거느리고 무릇 7-80명이 신천군 청계동 산중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은 지형이 준험하나 논밭이 있고 산수경치가 아름다워 그야말로 별유천지라 할만한 곳이었다."

이는 안중근이 예닐곱 살 때의 가족사에 대한 추억이었다. 아버지 안태훈은 반일파가 아니었다. 오히려 친일적인 정치가의 거두인 박영효 영향하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좋아서 일본 유학까지 갈 대목에 이르렀으나, 직전에 (안중근의 말에 의하면) 간신배들에 의해 박영효가 모함당하는 까닭에 산중에 칩거하게 된다. 안태훈은 반일운동을 한 행적은 보이지 않는다.

부친의 영향으로 보이는데, 안중근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승리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쾌재를 부른다. 흔히 현재 한국교과서에서 러일전쟁을 "일본의 대륙진출과 조선반도의 지배권 확보를 목적으로 한 침략전쟁"이란 식으로 비난하고 있지만 안중근은 이에 정반대로 만세를 불렀다.

성인이 된 안중근은 일본이 솔선수범으로 동양의 근대 강국으로 된 것에 진심으로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사실 안중근만 아니라 당시 조선의 부패한 조정의 근대 국민국가 건설에 실패한 무능함에 실망한 엘리트들은 일본의 근대화에 기대감이 컸다. 따라서 일본식 근대화의 길을 선택한 자들이 많았다.

현재 한국에서 친일파 규탄이 성황을 이루는 것도 100여년 전부터 1945년 광복까지 일본 근대화에 기울어진 친일적 인물이 많았다는 반증이 된다.

러일전쟁 후 일본의 영향하에 조선에서는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이 양립하지만, 애국계몽운동은 무력적인 반일저항이 아닌 유연한 계몽교육을 통해 실력양성을 중점으로 전개됐다. 이를 주도한 이들은 바위에 계란 던지기식의 무모한 무력저항투쟁은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이토 히로부미의 유연한 보호정책 아래서 한국에서는 일본식 문명으로 인민들의 교육을 통해 애국주의, 민족주의 계몽을 하여 실력을 양성해 독립을 이루자는 주장이 주축을 이룬다. 이리하여 유명한 서양의 관찰자 핸더슨은 '조선의 정치사회'에서 개항이래 조선조-한국의 개혁을 지향한 자들의 주류는 기본적으로 일본과의 제휴를 주축으로 이뤄졌다고 지적한다.

'동양평화론'에서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러일전쟁은 황백 양인종의 경쟁이라 할 것으로서 전날까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곧 사라지고 오히려 일종의 애종당(황색인종을 사랑하는 세력)으로 되었으며 이또한 인지상정이니 이치에 맞는 것이다. 장쾌하도다. 수백년래 악행을 일삼던 백인종의 선봉이 북 한번 치자 대패하고 말았다. 러일전쟁의 승리는 천고에 드문 사업으로서 만국이 기념해야할 업적이다. 그러므로 한청 양국의 유지는 기탄없이 자신이 승리한 것 같은 기쁜 기분이었다."

이로부터 안중근은 애국계몽운동의 실력양성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26세의 안중근은 자서전에서 당시 일본과의 "역학관계에서 현재 의병을 거하여 이토의 정책을 반대하면 개죽음만 당한다"고 주장했으며 그뒤 안창호와 의기투합했으며 학교를 운영하며 인재를 양성했다. 서양에 대해서보다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게 됐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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