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아메리카] 최초의 원자탄을 만든 과학자들, J.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엔리코 페르미. 2018년.5월11일자 VOA 기사. 2023.08.25(사진=VOA 캡처)
[인물 아메리카] 최초의 원자탄을 만든 과학자들, J.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엔리코 페르미. 2018년.5월11일자 VOA 기사. 2023.08.25(사진=VOA 캡처)

‘원자탄의 아버지’로 불렸던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박사의 비운을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는 미국에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지금은 한국에서도 상영되고 있다. 핵문제로 박사 논문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오펜하이머를 알았던 필자의 감회는 남다르다. 그렇지 않아도 8월이 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회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78년 전인 1945년 8월 원자탄 공격을 받은 두 도시는 폐허가 되었고 2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한국인도 7만여 명이 피폭되어 3~4만 명이 사망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의 전승국으로서 한국에게는 해방자로 다가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핵무기에 의해 희생된 것은 일본인과 한국인뿐이다. 이 두 발의 원자탄으로 일본제국은 패망하고 태평양 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났는데,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으면 일본군의 결사 항전으로 미군 백만 명이 죽거나 다칠 것이라고 예상했었고, 미·소 간 냉전도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탄 투하를 결정했고, 원자탄은 일본제국의 명줄을 끊었다.

미국은 원자탄을 만들기 위해 1942년부터 45년까지 ‘맨하탄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를 가동했는데 뉴멕시코주의 로스알라모스국립연구소(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가 연구 본부의 역할을 담당했고 38세의 천재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박사는 연구책임자였다. 미국은 이 프로젝트를 통해 세 개의 원자탄을 만들어냈는데, 하나는 핵실험에 사용했고 나머지 두 개는 일본에 투하했다.

오펜하이머 박사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었다, 하지만 승리의 뒤안길에서 오펜하이머가 경험했던 고뇌와 그가 겪었던 수난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대한민국이 오펜하이머의 딜레마에 갇혀있음을 절감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오펜하이머 영화 공식 티저.2023.08.25(사진=오펜하이머 공식 사이트, 편집=조주형 기자)
오펜하이머 영화 공식 티저.2023.08.25(사진=오펜하이머 공식 사이트, 편집=조주형 기자)

‘미국의 프로메테우스’ 오펜하이머 박사

오펜하이머는 1904년 뉴욕 맨하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네덜란드에서 수학했고 18세에 하버드대에 입학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닐스 보르(Niels Bohr) 교수 밑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학부과정을 마친 후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쳐 독일의 궤팅젠대학으로 가서 23세인 1927년에 박사 학위를 받고 버클리대에서 명교수로 명성을 쌓았다. 오펜하이머가 천재 물리학자로 성장하는 동안, 1938년 12월 독일 베를린의 카이제르빌헤름연구소(Kaiser Wilhelm Institute)에서 세계 최초로 우라늄 원자에 중성자를 쏘아서 터지게 하는 실험에 성공했고, 사람들은 이것을 ‘핵분열’이라고 불렀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 과학자들도 이듬해 1월 같은 실험에 성공했다.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대전의 막이 오르자, 나치 치하를 탈출하여 미국에 정착하고 있었던 유대인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우라늄 분열탄의 등장 가능성’을 알리면서 히틀러가 먼저 이 무기를 개발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루스벨트는 즉시 민군 과학자들로 연구팀을 구성하라고 지시하지만,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미국에 선전포고하면서 미국은 전쟁에 뛰어들게 되고 핵폭탄 제조는 지연되었다.

나치독일이 원자탄을 먼저 만들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시달렸던 미국은 마침내 1942년 1월 ‘맨하탄 프로젝트’를 출범시키면서 오펜하이머 박사를 연구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러는 동안 유럽의 전세는 연합국 쪽으로 기울었고, 1945년 5월 독일이 항복했다. 로스알라모스 연구소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독일이 항복했는데도 원자탄을 계속 만들어야 하는가를 놓고 술렁거림이 있었고, 미국 내 일단의 과학자들은 ‘프랭크보고서(Franck Report)’라는 것을 만들어 원자탄 사용에 반대했고 꼭 사용해야 한다면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지역에 투하하여 위력만 과시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미소 간 냉전이 시작된 상황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미국은 맨하탄 프로젝트를 계속했고, 오펜하이머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력으로 원자탄 제조를 이끌었으며,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사전 경고 없이 일본의 대도시에 원자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윽고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사막에서 실시된 인류사상 최초의 핵실험에서 첫 원자탄이 폭발에 성공하자, 그는 환호했다. 8월 6일 두 번째 원자탄 ’리틀보이(Little Boy)가 히로시마를 그리고 8월 9일 세 번째 ‘팻맨(Fat Man)’이 나가사키를 잿더미로 만들자, 오펜하이머 박사는 일약 영웅이 되어 ‘원자탄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었고 ‘미국의 프로메테우스(American Prometheus)’로 불리기 시작했다.

1945년 8월 6일 미군 전투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린 후 버섯 모양의 거대한 원자운(原子雲)이 발생했다. (사진=연합뉴스, 일부편집=조주형 기자)
1945년 8월 6일 미군 전투기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린 후 버섯 모양의 거대한 원자운(原子雲)이 발생했다. (사진=연합뉴스, 일부편집=조주형 기자)

오펜하이머의 영광과 고뇌 그리고 비운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죽음보다 더 깊은 고뇌 속으로 빠져들어야 했다. 사실, 오펜하이머는 1945년 7월 16일 첫 핵실험에 성공했을 때부터 자신의 손으로 ‘악마의 무기’를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끼고 고심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조국의 승리와 미국인들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일어난 참상을 보고 들으면서 “우리가 지구 종말 무기를 만들었다”며 자탄했다.

전쟁 후 오펜하이머는 30개 이상의 원자력 관련 기구 및 정부 기관의 책임을 맡거나 자문을 하면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사람이 되었고, 방송국과 신문사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1948년에는 타임스지의 표지 인물이 되어 세계적인 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1949년 소련이 첫 핵실험에 성공하여 두 번째 핵보유국이 되자 그는 핵무기는 미국 스스로를 포함한 모두를 죽일 수 있는 무기라고 외쳤고, 핵군비통제를 위해 소련과 협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갈수록 커지는 죄책감을 안고 오펜하이머는 미국이 생산한 핵무기들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심지어는 1951년 트루먼 행정부가 원자탄보다 파괴력이 수십 배 또는 수백 배 더 큰 수소폭탄 제조에 착수하려 할 때도 강한 반대를 표명했다.

미국 공직자들 사이에서 오펜하이머가 국가안보를 훼방한다는 수군거림이 일어났고, 공산주의 동조자니 소련의 첩자니 하는 말도 나돌았다. 당시는 1949년 중국의 공산화, 1950년 북한의 6·25 전쟁 도발 등으로 미국에서 ‘레드 컴프렉스,’ 즉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우려가 대대적으로 확산하고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미국 원자력위원회(AEC)의 조사를 받고 안보업무에 종사할 수 있는 인가증을 정지당했고 의회 청문회에도 불려 나갔다. 원자력위원회가 1954년 4월 12일부로 안보업무 인가증 재발급을 거부하면서 오펜하이머는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고 야인으로 전락했다. 이후 오펜하이머는 모든 영광을 상실하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생을 살다가 1967년 2월 18일 6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듯 그의 내면에는 두 사람의 오펜하이머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을 신속하게 패망시키기 위해 원자탄 사용을 지지했던 ‘애국자’ 오펜하이머였고 다른 하나는 핵무기의 비인간성을 혐오하면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꿈꾸었던 ‘인본주의자’ 오펜하이머였다. 첫 번째 오펜하이머로 인해 그는 세기의 영웅이 되었지만, 두 번째 오펜하이머로 인하여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하는 수난을 당해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5년이 되던 2022년 12월 16일 미국 에너지성은 오펜하이머를 탄핵했던 1954년 원자력위원회의 결정을 취소한다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뒤늦게나마 핵무기의 비인간성을 경고하려 했던 그의 순수한 열정을 인정하여 명예를 회복시켜 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9일 저녁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환호하는 평양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018.9.19(사진=연합뉴스, 편집=펜앤드마이크)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9일 저녁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환호하는 평양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2018.9.19(사진=연합뉴스, 편집=펜앤드마이크)

한국이 처한 ‘오펜하이머의 딜레마’

한국도 오펜하이머가 겪어야 했던 딜레마에 처해 있으며, 필자도 이 딜레마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인본주의 측면에서는 한미 핵공조니 확장억제니 하는 것들을 포기하고 맹목적 평화론자들 또는 평화론자로 위장한 좌파들이 시키는대로 북한과의 평화협정을 맺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주의적 안보 논리는 핵무력과 주체통일 목표를 고수하는 북한과의 성급한 평화협정을 경계하라고 강변하고 있다. 필자 역시 두 부류의 당위성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다. 핵확산 방지라는 글로벌 차원의 도덕적 당위성을 위해서는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준수하는 비핵국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북한 만이 핵을 보유한 현재의 핵 비대칭성이 가져올 수 있는 끔찍한 미래를 생각하면 독자 핵보유 가능성을 열어두자고 주장할 수밖에 없다.

자고로 전쟁은 막아 놓고 봐야 하고 국가는 지켜놓고 봐야 하는 존재다. 반핵주의자로 변신한 오펜하이머는 미·소 핵대결을 보면서 ‘병 속에 갇힌 두 마리의 전갈(two scorpions in a bottle)’과 같다고 탄식했지만, 현재 대한민국은 ‘병 속에서 전갈과 마주하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곤충’이 되지 않으려 몸부림을 치고 있다.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태우 / 한국군사문제연구원 핵안보연구실장, 전 통일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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