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79년 8월 24일 – 베수비오 화산 폭발

 

 이탈리아 나폴리 부근에 있는 폼페이는 사르누스강 하구에 있는 항구 도시였다. 기후는 온화하고 토지가 비옥한 데다 외부와 교역을 용이하게 하는 바닷길이 열려 있어 일찍이 많은 사람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자 했다. 베수비오산이 폭발하여 그 노른자위 땅을 삼켜버린 서기 79년 무렵 폼페이는 로마제국의 영토였다. 이때 로마제국 상류층은 폼페이에 화려한 별장을 짓고 그곳에서 휴양을 즐겼다. 폼페이는 그만큼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었다. 
 베수비오산은 해발 1,300m로 그다지 험준한 산이 아니었다. 게다가 화산 폭발의 기억도 없어 폼페이 사람들은 베수비오산을 위험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화산 폭발 16년 전인 63년에 지진이 일어나 산기슭이 조금 흔들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위협적인 사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16년 전의 지진이 무시무시한 화산 폭발과 관련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은 쉽게 할 수 있다. 
 79년 8월 24일, 천 년 넘게 침묵하던 베수비오산이 엄청난 굉음을 내며 연기와 붉은 용암 덩어리를 내뿜었다. 베수비오 화산에서 불어오는 그 뜨거운 바람을 고스란히 맞아야 했던 폼페이는 곧 불길에 휩싸였다. 심지어 화산재가 날아와 온 도시를 뒤덮었다. 100억t에 가까운 화산재가 하루 종일 쏟아졌고 화산 폭발이 멈췄을 때 폼페이는 5~7m 두께의 화산재에 파묻혔다. 폼페이 주민 2,000명은 그 화산재에 대책 없이 매몰되었고 산 채로 화석화가 되었다. 
 베수비오 화산은 폼페이뿐만 아니라 스타비아이, 헤르쿨라네움 등 인근 도시도 파괴하였다. 베수비오산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스타비아이의 피해는 치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딴 도시 헤르쿨라네움은 20m 두께의 진흙 용암을 뒤집어썼고 도시는 그 진흙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화산 폭발의 기록은 있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던 폼페이 유적은 16세기 말, 한 건축가가 터널을 파는 과정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본격적인 발굴은 1709년 헤르쿨라네움에서 시작되었다. 1748년 폼페이에서도 발굴 작업이 펼쳐졌고 1763년 그곳이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이 발견되었다. 폼페이는 보물을 찾는 사람들에 의해 마구잡이로 파헤쳐지다가 1850년대 말 이탈리아가 통일된 후에야 고고학자들에 의한 제대로 된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로마 시대에 번성하던 도시의 모습은 1,500년 넘도록 화산재에 파묻혀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도심에서 40km 떨어진 수원에서 물을 끌어오던 수로, 쓰레기를 버리는 거리의 도랑, 거대한 정원이 딸린 호화로운 저택, 서민들이 살던 2‧3층 아파트, 대장간이 딸린 집, 빵집, 채소 가게 등이 발굴되었고 이를 통해 로마 시대의 일상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유적들은 화려했던 로마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훌륭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폼페이 사람들이 집 안의 벽면과 바닥에 그린, 주로 그리스 신화를 담은 프레스코화들도 다수 보존되었는데 그런 연유로 폼페이는 ‘프레스코 벽화의 보고’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화산재 속에서 발굴된 인간의 시신들이었다. 순식간에 화석처럼 굳어버린 폼페이 사람들의 시신에는 당시 그들이 마주한 공포와 고통의 몸부림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있는, 폼페이 희생자들이 사망할 당시의 모습으로 굳어진 화산재.

 

 참사에 대한 가장 생생한 기록은 당시 17세이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에 의해 전해졌다. 그는 나폴리만에서 지켜본 참사와 삼촌 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삼촌 플리니우스는 로마제국의 박물학자이며 해군 제독이었다. 당시 미세눔에 주둔하던 그는 화산 폭발 소식을 듣고 헤르쿨라네움 근처 해안으로 갤리선을 몰고 가 피난민들을 구조했다. 화산재가 배까지 날아오자 선원들은 피할 것을 권했지만 그는 “행운은 대담한 자를 좋아한다”라며 스타비아이로 가서 친구를 구출했다. 
 그러나 바람 방향 때문에 나폴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발이 묶여 있던 중 유독가스가 배를 덮쳤다. 삼촌 플리니우스는 질식사했고 조카 플리니우스는 사흘 뒤 삼촌의 시신을 발견했다. 그는 삼촌의 시신에는 외상이 없었고 깊이 자는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조카 플리니우스는 훗날 역사가 타키투스에게 이 사건을 묘사한 편지를 보냈고 그 내용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피난민과 친구를 구하려 했던 삼촌 플리니우스의 이름을 기려 화산 분화 양식 중 하나에 ‘플리니식 분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플리니식 분출은 높은 압력에서 막강한 폭발로 이어지며 다량의 화산가스, 화산재, 화산탄 등이 뒤섞여 분출되는 가장 격렬하고 폭발적인 분화를 가리킨다. 화산 폭발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의 이름을 가장 격렬한 화산 분화에 붙였다는 것이 조금은 아이러니해 보인다. 
 폼페이 유적의 발굴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베수비오 화산은 여전히 살아서 그 주변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이후에도 몇 번 더 분화했고 가장 최근 분화는 1979년에 일어났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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