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이 민족영웅일 수 있는 까닭은 한마디로 일본제국의 거물 정치가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탄으로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이 아닌 보통 흔한 졸병을 쐈다면 최고의 '독립영웅'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본질적 의미에서 안중근의 '영웅적 위상'이 높아진 것은 적장인 이토가 안중근보다 월등히 지위가 높은 근대 일본의 원훈, 정치의 거두라는 위상이 뒷받침해주었기 때문이다. 영웅이란 위상은 그만큼 상대적인 경상(鏡像)이 존재하는 법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 민족의 영웅 안중근만큼, 일본인에게 있어서 이토 히로부미는 그 이상으로 최고 지위의 근대 정치 거물이며 지도자이며 영웅인 것이다.

우리의 영웅이 위대한 만큼 상대의 영웅도 위대하다. 세상을 다 상대적 입장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갖춰야 한다. 상대적 시각은 견해와 인식을 또 다른 차원, 다중,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해 준다.

안중근과 이토가 이 세상을 떠난지 100여년이 지난 오늘, 이제 우리 후세들은 이런 상대적 시각으로 우리의 영웅 안중근을 바라보듯이 상대방의 영웅 이토 히로부미도 평상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한번도 이토를 인간으로서 바라본 적이 없었다. 인간성을 무시한 모국의 원수, 모종의 관념의 틀에서만 봐 왔다. 일제의 조선 침략 원흉, 흉악무도한 제국주의의 우두머리 이런 식으로만 그를 비하, 폄하했다.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 관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도 역시 이런 감성적이고 민족적인 정서에서 한 치도 이탈하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 그는 누구인가. 모든 정치적, 감정적 외피를 벗기고 난 인간적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필자가 수많은 이토 히로부미의 전기, 회고록, 문헌자료를 섭렵해본 결과 그는 위대한 인격주의자이며, 교양과 지견을 갖춘 인물이다.

초대 총리대신, 초대 추밀원 의장,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 한국통감, 초대 일본헌법 제정자 등 일본 근대를 만든 영웅적 정치가라는 허울을 다 벗기고 난 그 인간상, 인물상은 역시 팔방미인적인 느긋한 성격을 갖춘 좋은 남자였다.

사생활에 있어서 그는 "천진난만하고 광명누락했으며, 담박하고 과욕하며 허식없는 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그의 성격은 좋게 표현하면 아이들처럼 천진했고 나쁘게 말하면 치기가 있었으며 가식없이 자부심으로 충만했다. 같은 죠슈 출신의 정치가 미우라 고로는 이토에 대해 '이토는 자신의 훌륭함을 세인에게 많이 알리려고 무척 애쓰는 타입이었으며, 지극히 강력한 자부심의 소유자'라 지적했다.

이토가 총애했던 여성 츠타치에의 회고에 따르면, 이토는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때에도 늘 정서해서 보내곤 했다. "내 편지를 받는 사람이 편지를 끝까지 남겨둘 가능성이 있으니 글씨를 흐트러지게 쓸 수 없다"고 이토가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편지를 남겨둘 만큼 자신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명예욕, 자아과시욕이 강한 이토는 상황에 대해 탁월한 판단력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주위에는 늘 학문, 견식이 뛰어난 젊은 인재들이 모였다고 한다.

상황에 대한 유연한 판단, 대응력이 있었기에 그의 자부심은 이것으로 제어될 수 있었다. 유연성 있는 그의 대응방식은 성격적으로 투쟁성이 비교적 적고 타협성, 조화심이 풍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교성, 적응성이 좋은 그는 가마쿠라 오이소의 자택인 창랑각에서 살 때 늘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회식도 하며 즐길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지방의 어부들을 자택의 정원으로 초대해 만취하여 방음난무의 오락판을 벌이기도 했다. 

그가 사는 창랑각의 현관 간판은 이홍장이 휘호한 것이다. 그는 1908년 도쿄 내의 오오이 마치에 은사관을 지을 때까지 자기 집이 없었으며 관사, 제국호텔, 차가를 전전하며 살았는데 창랑각에서의 생활을 특히 좋아했다. 창랑각은 1896년 건축한 것으로 시골 우편국 같이 외관이 별로였다고 한다. 집안의 가구, 시설도 간소해 방문객이 늘 놀랐다고 한다.

의식주에 무심한 이토의 생활양식은 아주 검소했다. 기거도 불규칙적이고 언제나 조식(粗食)이었다. "식사에 초대됐는데 너무 검소, 조잡해 난처했다"고 그의 뒤를 이어 총리대신을 지낸 사이온지도 훗날 회고했다. 권력을 무척 좋아하고 또 상당한 애주가인 이토는 저녁 반주는 늘 심야까지 끌었다. 그러나 애주하되 술맛은 잘 몰랐다고 한다.

이토는 또한 축재의 의식이 약했으며 금전에 담박했다. 돈도 늘 탁상의 서랍에 넣어두고 외출시에는 그것을 꺼내서 하카마(일본 옷) 속에 막 넣었다. 여관에서 한잔 걸치고는 계산할 때 아무렇게나 돈을 꺼내서 여주인에게 팁이라고 주었다. 이런 이토를 두고 이누카이 츠요시는 "거물 사이고 다카모리 이후 유일한 금전에 담박 청렴한 정치가"라 높이 평가했다.

활달한 성격의 이토는 청렴한 인물이었으며 취미도 한다는 인물이면 손대는 골동, 가요 등에도 무관심했다. 검에 대해 만년에 좋아했을 뿐이다. 그는 대단한 독서가로서 유명했다. 한서, 일어서적 및 영어서적을 섭렵했으며 한시 또한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그의 서예는 근대 서예가의 반열에 오를만큼 뛰어났다. "나는 천생 과욕이어서 저축 따위는 추호도 안중에 없다"고 늘 말했던 그다.

그런데 영웅호색이라고 여색을 즐긴 것은 이토의 큰 취미였다. 이토의 호색은 생전에도 늘 말밥에 올랐다. "취해서는 미인의 무릎, 깨어서는 천하의 정권" 이것이 그의 생활방식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름과 같이 문인형 정치가, 사상가였으며 '극악무도'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일본의 교양 있는 근대 신사적 풍모가 물씬 풍기는 그런 인물이었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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