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올해 5-7월 연속 두번 한국을 방문했다. 필자에게 있어서 10년만의 모국 방문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듯이 많이 변하고 성숙되고 고차원으로 승화된 모국 동포들의 모습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소박한 기대는 하나의 '실망'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우선 눈에 들어온 현상부터 이야기하기로 하자. 이른바 지식인들도 한결같이 추했으며 상큼하지 못한 그런 모양들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리사욕에 찬 얼굴이다. 귀티가 없고 지성이 결여한 무교양의 육체였다. 똥배가 나온 육체, 하비(下卑)한 표정.

길가에서 만났거나 레스토랑에서, 열차 안에서, 호텔 로비에서, 서점에서 그리고 TV에서 만난 동포들의 얼굴에는 어글리, 미숙한 그러한 것들이 섞인 혼합체였다.

숙박했던 호텔도 일본의 투자가 있는 곳이라는데 일본 수준은 고사하고 직원들의 서비스는 중국 숙박집 수준이었으며, 손님의 일반적인 요구에도 거의 다 No였다. 한국의 신칸센이라는 KTX 열차 안의 화장실은 중국 고속철도 화장실과 비슷했고 청결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승객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큰 소리로 떠들었으며 옆자리에 앉은 승객은 큰 소리로 가족인 듯한 상대와 통화를 쉴새 없이 하여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피곤하여 좀 낮잠을 자려 했는데 그런 방약무인의 승객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에서 한국에 오니 그야말로 타임머신을 타고 8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직언하자면 한국과 일본의 시차는 80년, 적어도 한국인의 근대성은 일본인보다 반세기는 떨어졌다는 점을 도처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비교문화론적으로 관찰하면 일본인과 중국인보다도 한국인은 감정에 너무 충실하고 표현하는 정의 문화가 특징적이다. 일본인이 감정을 억제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다면 한국인은 감정을 발산하는 것을 미덕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감정에 살고 죽는 한국인이다. 정이 화끈하고 뜨거운 것까지는 좋지만, 매사 감정이 갚서고 자기 컨트롤을 못하는 게 결함인가 싶다.

한국인의 몸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감정이라 해도 좋겠다. 감정이 앞선다는 것은 이성이 그만큼 설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차분하게 이지적으로 사고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줄 줄 아는 이성을 즐기는 일본인보다 한국인은 법이나 질서에 대한 준수도 많이 떨어진다.

지금도 한국인은 흔히 일본인 품평을 잘 하며 대개 '일본인은 유치하고 원숭이처럼 타자의 모방을 잘 하는 민족'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일본문화, 대중문화에서 고차문화까지 세상에서 가장 일본을 모방 잘 하는 민족이 한국인이 아닌가.

감정적이고 감성적인 한국인의 특질은 이성적이고 무거운 성찰이나 사고를 멀리하게끔 했으며, 스스로 독창적인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창조성 또한 결핍하다.

한국 사회는 6000만 총 유치화로 달리고 있으며 대중문화, 교육, 학문, 매스컴, 정치 그리고 행동·사고양식에 이르기까지 감정적인 '유치원화'가 점입가경이다.

가볍고 들뜨고 떠들고 빨리빨리를 부르짖는 한편 사회는 좌·우로 분열돼 누가 누구를 설복시킬 힘도, 서로 귀담아 들어줄 줄 아는 능력도 결핍됐다. '어린이의 광기'가 하나의 굿판처럼 전개되고 있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현장이다.

'자이언트 베이비'라는 말이 있다. '거대한 어린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한자로 직역하면 '巨嬰(거영)'이다. 감정 컨트롤이 안되고 자제력이 없으며 성숙되지 못한 어른을 풍자해 이른 단어다.

나에겐 한국사회가 하나의 '자이언트 베이비 공화국'으로 보인다. 고도로 근대화된 이웃 일본과 비교하면 이 점은 일목요연해진다. 1947년에 일본 점령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이 일본인의 정신 연령은 열두살이라고 직언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본인은 성큼성큼 진화하여 성숙기의 신사숙녀로 거듭났지만(고도의 민도와 교양을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인은 열살 소년에도 못 미치는 아홉살 미숙아라고 해야 할까.

한국식 '자이언트 베이비'의 특징은 심술굳고 고약한 악동처럼 추악함과 파렴치함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보고 있다. 이에 걸맞으면서도 요즘 한국 사회에 유명한 두 인물이 있다. 이들은 한국식 '빨갱이 자이언트베이비'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하나는 가짜 위안부 이용수 씨다. 운이 좋게도 지난 5월 10일 서울 한복판에서 그의 위용을 볼 수 있었다. 한국교과서연구소 소장 김병헌 씨의 말에 따르면 이씨는 위안부도 아니면서 위안부로 사칭하며 국가의 동정과 지원금을 받아먹고 반일을 선동하는 아주 사악한 노파라고 한다. 80이 넘어선 노파는 민족의 긍지나 자존심, 일말의 책임감도 없이 자이언트 베이비의 스타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이씨의 얼굴을 보니 그야말로 10년전에 먹었던 김치를 토해낼 뻔 했다. 메스꺼워서.

또 하나는 김규돈 신부다. 김씨는 2022년 11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동남아 순방 중인 윤석열 대통령을 겨냥해 "어휴 암담하기만 하다. 전용기가 추락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과연 이게 성공회 성직자란 자의 말인가. 심술사나운 어린 아이도 이런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방사능 물은 천년만년 계속 흐를 것"이라 저주하기도, "악마들을 저주한다. 잠 자다 심장마비로 영원히 사라지길 간절히 바란다"라고 누군가에 대해 표독스러운 저주를 서슴지 않았다. 물론 이는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야기했고 빗발치는 비난과 비판을 받았다. 그 자신도 응당한 징계를 받았다고 알고 있다.

이런 한국인은 인간이라 하기엔 부적절하며 차라리 인간의 탈을 쓴 '빨갱이 악마' 또는 '유인원성 동물'이라 칭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20여년 전에도 한국 작가들이 쓴 일본 비난서에서 일본은 지진으로 인해 통째로 바다 밑으로 사라지길 운운하는 못된 저주를 봤었다. 한국 사회가 거대한 악동, 악마들이 백귀야행인 듯 창궐하는 '자이언트 베이비 낙원'이란 점을 실감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현재에도 한국은 더 SF영화 같이 공포스러운 '자이언트 베이비 악마국'으로 변한 느낌이 들었다.

일본도 중국도 인구수치가 한국의 수 배 혹은 수십 배나 되지만 이용수나 김규돈 유형의 비겁하고 무지하고 수치심을 모르는 자이언트 베이비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대한민국의 명물이다.

이 자들이 그렇게 증오하고 저주하는 일본에는 한국을 악독하게 저주하거나 모욕하는 일본인은 없다. 왜냐하면 진화된 일본인은 한국인보다 멀리 앞선 선진국의 근대 국민이며 신사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이런 '자이언트 베이비'에 대해 아예 무시하기 일쑤다. 필자의 외우였던 일본 외교평론가 카세 히데아키 씨는 반일에 저주를 외치는 한국에 대해 '미주하는 한국을 어떻게 구제할까'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은 유아에 비슷하기 때문에 귀엽기만 하다. 한국은 유아처럼 실없이 간질이 폭발한 나머지 자신에 손해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2년 7월 동경에서 카세씨를 만나 식사중일 때 그는 필자에게 위와 똑같은 말을 해줬다. 순간 필자는 수치심으로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춘원 이광수는 100년전인 1922년 5월 유명한 '민족개조론'에서 조선인의 결함을 분석, 비판함으로써 한민족의 심대한 열근성을 지적했다.

조선민족의 주요한 성격을 '인' '의' '예' '용'이라 하면서 그 부속적 결함을 "허위, 공론, 나타, 무신(無信), 이기적, 단결력 부족, 경제적 쇠약, 과학의 부진, 비사회성, 사기성, 허세 부리기"라고 해부했다. 그러면서 "조선인이 독립을 부르짖기보다는 우선 정신적 독립을 이룩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100년 전 이광수가 지적한 우리 민족의 결함이나 유치성은 100년이 지난 21세기 20대의 한국인에게 그대로 많이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춘원이 부르짖은 '정신적 독립'은 성숙되고 이성적인 어른을 가리킨다. 그러나 정신적 독립과는 매우 괴뢰된 자이언트 베이비가 양산되는 것이 오늘날의 한국 사회다. 슬프지만 이것이 현실이 아닌가.

나는 1927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극비자료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을 2010년에 번역 출판해 한국에서 출간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일본인이 지적한 조선인의 성격이 지금과 판이한 것들이 있어 놀랐다.

우리가 지금껏 알고 있는 조선민족의 성격 특성의 하나가 매사에 서두르는 '빨리빨리' 식의 급한 성격이지만 그때 당시의 조사를 보면 정반대로 느긋하고 매사에 서두르지 않는 유장한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조선인은 얼굴이 길고 담뱃대가 길고 기(氣)가 길다"는 삼장 설까지 있을 만큼 100년 전 우리는 느긋하고 유장한 어른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 민족이 "정서적이고 감정기복이 심하다"는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100년 전 조선인은 감정 노출을 삼갔다는 지금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과 조우하게 된다. 그래서 일본인은 "매사에 서두르는 우리 일본인은 유장하고 느긋한 조선인을 따라 배워야 한다"고 책에서 주장할 정도였다.

이렇게 보면 100년 후의 우리 민족이 오히려 어른적인 유장함에서 아이같은 유치성으로 후퇴했음을 알 수 있다. 한 인간과 민족은 꼭 진화하고 진보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한국사회의 오늘이 '자이언트 베이비'적 양상을 노정한 것은 다같이 한국인의 책임임이 틀림없다.

역사관 하나만 보더라도 한국사회는 이설을 허용하지 않는 저차원의 미숙아적 사고에 고정돼 있으며, 한국은 '절대선' 일본은 '절대악'이라는 구도로밖에 보지 못한다. 마치 5살 어린애처럼 자기의 장난감은 다 좋고 남의 것은 다 나쁘다는 사고수준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에 의해 근대화를 성취했다' '일본이 조선 근대화에 공헌했다'는 견해는 터부시되고 '한국이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룩했다' '일본이 근대화에 지장을 줬다'고 우긴다. 완전히 심술궂은 악동의 모습 자체다.

한일문제는 사실 악동수준인 한국인이 유발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의 문제는 바로 그로테스크한 저수준의 '자이언트 베이비'가 너무 발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이언트 베이비의 퇴치야말로 한국사회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급선무 과제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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