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9년 7월 15일 – 제1차 십자군, 예루살렘 정복

 4세기 이후 로마 제국이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뉘고 동방정교회가 천주교에서 갈라져 나가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교황의 막강했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회가 복잡해지고 유럽은 여러 나라로 쪼개졌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은 늘 예전의 강력한 로마 제국을 그리워하고 다시 로마 제국이 부활하기를 꿈꾸곤 했다. 
 그런데 1095년,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제국에서 도움을 청해왔다.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 셀주크 튀르크가 비잔틴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소아시아에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은 서유럽 국가들과 비잔틴 제국이 힘을 합해 싸우면 동서로 나뉘었던 크리스트교가 하나로 합쳐질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다. 그 기대를 등에 업고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크리스트교 연합군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슬람 세력이 지배하고 있던 크리스트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주장한 것이다. 유럽의 왕들은 교황의 제의에 호응하여 군대를 보내왔다. 그때 교황의 깃발 아래 모인 기사들은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를 새겼고 이에 십자군이라 불렸다. 1096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으로 떠남으로써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1270년까지 200년 가까이 계속되었다. 60만 명에 달하는 크리스트교 군단 제1차 십자군은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을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했다. 예루살렘은 88년 후 다시 이슬람의 살라딘에 의해 정복되었고 이후 760여 년간 이슬람 영토로 남게 되었다.

 십자군이 일어날 당시 예루살렘은, 우르바누스 2세 교황의 주장과 달리 이슬람 세력에 ‘짓밟히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크리스트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종교를 바꾸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슬람교를 믿으면 세금을 깎아주니 많은 사람이 이슬람교 신자가 되었을 뿐이다. 또 크리스트교 신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 다니는 것도 막지 않았다. 더구나 예루살렘은 크리스트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와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했다. 
 성지를 되찾겠다며 십자군을 모았지만 그 깃발 아래 모여든 사람들의 속마음이 하나였던 것은 아니다. 먼저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나뉘어 있던 동서 크리스트교를 하나로 묶어 교황의 힘을 좀더 강하게 만들고 싶었다. 또 영주들은 더 넓은 땅을 새로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다. 영주 아래서 직업 군인으로 일하던 기사들은 지위가 높아지고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또 상인들은 동방 세계와의 무역을 통해 사업을 번창하게 만들려고 했다. 농민들을 노예나 다름없던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성지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

 

 십자군 원정이 몇 차례 계속되었지만 여러 사람이 처음 기대했던 것들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다. 성지를 되찾겠다는 목표는 시들해졌고 왕들은 교황의 말에 처음만큼 크게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욕심을 버릴 수 없었다. 그들이 저지른 가장 어처구니없는 만행은 소년‧소녀를 선동하여 전쟁터로 내몬 것이다. 소년 십자군은 제4차 십자군 원정 이후에 조직되었다. 하느님께서는 피를 좋아하는 군인들보다 소년‧소녀들의 사랑으로 성지를 되찾게 하실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첫 번째 소년 십자군은 프랑스 작은 마을의 양치기 소년 에티엔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환상 속에서 예수로부터 프랑스 왕에게 전할 편지를 받았다”라며 함께 편지를 전달하러 갈 소년‧소녀들을 모았고 그중 일부가 십자군으로 나섰다. 이들은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일곱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이탈리아로 갔다. 그런데 가다가 배 두 척이 부서져 그 배에 타고 있던 소년 십자군들이 목숨을 잃었다. 또 마르세유의 노예 상인에게 붙잡혀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노예 시장으로 팔려갔다. 오히려 알렉산드리아의 이슬람 지도자가 살아남은 아이들을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기도 했다.
 두 번째 소년 십자군으로, 독일 쾰른에서 니콜라스라는 열 살짜리 소년이 앞장서서 성지로 향해 떠났다. 그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갔지만 지중해를 건너지 못했다. 소년과 소녀들은 배고픔과 피로에 지쳐 죽고 역시 노예로 팔리기도 했다. 결국 소년 십자군 운동은 비극으로 끝났다. 하지만 이 사건들로 종교적 열정의 불씨가 살아났고 당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다시 십자군을 모을 수 있었다. 제5차 십자군 원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양한 욕심을 가진 사람들은 계속 십자군이 되어 이슬람교를 믿는 나라를 공격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제1차 원정 단 한 번만 승리했을 뿐이다. 원정이 거듭되면서 십자군의 종교적 의미는 퇴색하고 변질되었다. 급기야 십자군은 흉포한 침략자와 약탈자가 되어갔다. 결국 십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났고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기사 계급과 영주들도 몰락했고 영주들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던 왕들의 권력은 강해졌다. 지방 영주들의 힘이 셌던 시대가 지나고 왕에게로 힘이 모이는 새로운 시대가 된 것이다. 
 또 십자군 전쟁으로 동방과의 무역이 활발해져 지중해 주변의 도시들이 발달했다. 의학·화학·수학·천문학 등 앞선 이슬람 문화는 서유럽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고 유럽에서는 중세 시대가 막을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전쟁은, 전쟁이 비참하고 파괴적이지만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이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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