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영국과 아일랜드의 합병

미국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아일랜드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자 신교도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결성했다. 이들이 군대 막사에서 합숙하면서 여러 가지 의견을 나누다 보니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인에게 불리한 법률을 제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이 보기에 1494년 제정된 '아일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왕의 동의 없이 열 수 없고 어떠한 법안도 잉글랜드 왕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포이닝스법 그리고 1720년 제정된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의 입법권을 갖는다'는 내용의 법령은 반드시 폐지되어야 했다.

당대 최고의 웅변가였던 헨리 그래턴(Henry Grattan)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인들이 연대하여 투쟁한 끝에 포이닝스법이 폐지되면서 아일랜드 의회는 드디어 독립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는 같은 국왕 하의 두 개의 다른 나라 - 현재 영국과 캐나다의 관계 - 로 발전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아일랜드 출신 유명 정치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을 저술하는 한편 아일랜드 카톨릭 해방을 주장하는 등 아일랜드인들이 영국인들과 함께 프랑스에 대항하게 만들기 위하여 전력을 다했다.

1791년 테오발드 울프 톤(Theobald Wolfe Tone)이 주도하는 아일랜드 연합(The United Irishmen)이라는 단체가 설립되었다. 아일랜드의 카톨릭 교도들과 신교도들이 연대하여 영국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톤은 자신이 기대했던 만큼 카톨릭 교도들의 권익 향상이 이루어지지 않자 프랑스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1796년 나폴레옹과 함께 동 시대 프랑스 최고의 군인이던 라자르 오슈(Lazare Hoche)가 기습적으로 아일랜드 상륙을 시도했다. 영국군은 아무런 방비 태세를 갖추지 못 하고 있었으나 폭풍우 덕분에 프랑스군이 상륙하지 못 해 위기를 모면했다. 1798년 쟝 움베르(Jean Humbert)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실제로 아일랜드에 상륙했으나 그 수가 적어서 큰 위협이 되지는 못 했고 움베르를 불러 들였던 톤은 자살했다.

영국 총리 윌리엄 피트(Willian Pitt)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앞두고 아일랜드 독립 시도를 원천봉쇄하기 위하여 카톨릭 교도들에게 신교도와 같은 수준의 자유를 부여하는 대신 아일랜드 신교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국 의회와 아일랜드 의회를 통합하기로 결심했다.

언론매체의 선동, 의원 개개인을 상대로 한 매수 등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부의 사전작업 끝에 1800년 합병법(Act of Union)이 영국 의회와 아일랜드 의회 양쪽에서 모두 통과되면서 1801년부터 영국 의회는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모두를 대표하게 되었다.

이론상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으로 독립하기 전 영국령 북아메리카 식민지인들이 요구했던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원칙에 따른 참정권을 얻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카톨릭 교도들에게는 피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영국 의회 내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은 모두 신교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국 의회에 진출하게 된 아일랜드 출신 의원들은 의정 활동이나 지역 현안 해결보다는 자신의 권력에 도취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의 입장에서는 1720년에 제정된 '영국 의회가 아일랜드의 입법권을 갖는다'는 법률 규정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9. 카톨릭 해방 (Catholic Emancipation)

1823년 다니엘 오코넬(Daniel O'Connell)이라는 변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카톨릭 협회(Catholic Association)는 카톨릭 교도들을 결집시켜 총선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1826년에는 카톨릭 해방에 반대하던 하원의원들을 상대로 한 낙선 운동을 벌였고 1828년 총선에서는 오코넬 자신이 직접 아일랜드 클레어주에서 출마하여 현역의원 베시 피츠제럴드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카톨릭차별법의 존재로 인하여 영국 하원의 의석은 오코넬이 아니라 피츠제럴드에게 주어져야 했다.

카톨릭차별법의 법리상 모순에 직면한 영국 보수당 내각은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카톨릭 해방에 찬성하던 야당인 자유당 지도부와 합의하여 1829년 4월 13일 카톨릭해방법(Catholic Emancipation Act)을 상하 양원에서 통과시켰다.

영국 의회가 다수 민중들의 집단적 행동에 약하다는 것을 깨달은 카톨릭 교도들은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합병 철회를 위하여 대중 집회와 여론전을 활용하여 투쟁하였으나 아일랜드 독립은 영국 본토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었으므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힘을 합쳐 이를 저지하였다.

10. 대기근

1845년부터 아일랜드 전역에 걸쳐 감자마름병(potato blight)이 유행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식량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영국 보수당 정부는 미국에서 옥수수를 대량으로 수입하면서 수입 곡물에 부과되던 관세를 폐지했다.

전통적 보수당 지지층인 지주들의 반발에 직면한 보수당은 1846년 총선에서 패배하여 자유당에게 정권을 넘겨 주었다. 지식인들 중심의 자유당 정부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 원칙 하에 식량의 수요와 공급을 시장에 맡기기로 했는데 그 결과 수없이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낡은 배에 몸을 싣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했다.

11. 아일랜드 자치운동과 문예부흥운동

1879년에서 1882년에 걸쳐 소작농들의 복지 증진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자 글래드스턴의 자유당 내각은 농민들의 소요를 진압하기 위하여 그 지도자 찰스 파넬(Charles Parnell) 의원 등을 체포하는 한편 농지 임대료를 낮추기 위한 각종 입법 및 정책을 시행했다. 곡물법 폐지 이후 농지 임대업에 흥미를 잃어가던 잉글랜드인 부재지주들은 아일랜드 내 토지들을 소작인들에게 처분하기 시작한다.

글래드스턴은 보수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1886년과 1893년 두 차례에 걸쳐 의회에 상정했으나 첫 번째는 하원에서 과반수 득표를 얻지 못 했고 두 번째는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폐기되었다.

한편 새로운 잉글랜드인의 후손들도 아일랜드인의 정서를 공유하게 된 상황에서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난다. 수많은 아일랜드인들이 탈영국화(De-Anglicisation)을 외치며 잉글랜드 문화를 아일랜드 문화로 대체하려 했지만 잉글랜드인의 언어인 영어를 아일랜드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윌리엄 예이츠(William Yates),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으로 이어지는 아일랜드 출신 대문호들 덕분에 영문학은 19세기말부터 전세계 문학계를 선도해 나가기 시작한다.

12. 아일랜드 독립 및 분할

대기근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던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은 대영 무장투쟁의 배후 지원 세력이 되었다. 1865년 미국 남북전쟁이 끝나자 상당수의 아일랜드 출신 북군 장교들이 무장 봉기를 돕기 위해 아일랜드로 입국했으나 미국에서 무기가 도착하지 않아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아일랜드 자치법안이 영국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패드레그 피어스(Padraig Pearse)가 이끄는 아일랜드 의용군(The Irish Volunteer Force)과 제임스 코넬리(James Connolly)의 아일랜드 시민군(The Irish Citizen Army)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6년 부활절에 더블린에서 폭동을 일으킨다.

독일에서 밀반입했던 무기들은 영국군에게 압수당했고 아일랜드 의용군과 아일랜드 시민군 모두 참여율이 낮았으며 아일랜드인 대다수는 적국인 독일의 지원을 받아 영국을 공격하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했기에 부활절 봉기는 일주일도 안 되어 진압당했다.

문제는 영국군이 부활절 폭동 주동자들의 처벌 과정에서 무장 봉기에 반대했던 아일랜드 의용군 및 시민군 간부들까지 모두 처형했다는 점이었다. 아일랜드의 민심이 피어스와 코넬리의 주장이 옳았던 것 아닌가 하는 방향으로 옮겨가면서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이 하나가 되어 무장투쟁을 시작한다.

격렬한 전투 끝에 영국과 아일랜드 대표단은 1921년 12월 6일 영국-아일랜드 조약(The Anglo-Irish Treaty)을 체결하여 신교도가 다수인 얼스터 6개 주를 제외한 나머지 아일랜드 26개 주의 독립에 합의했다.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은 아일랜드 전체가 아닌 26개 주만 독립하게 된다는 사실에 크게 동요했다.

1923년까지 아일랜드 26개 주에서 조약 찬성파와 반대파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는데 찬성파가 승리하여 26개 주만의 독립이 확정되었다. 아일랜드는 1937년부터 영연방 회의에 불참하기 시작했고 1948년에는 공화국임을 선포했으며 1949년 영국 연방을 공식적으로 탈퇴했다.

 

[지도4] 아일랜드의 분할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민족과 일본의 관계는 1800년 이후 아일랜드인과 영국의 관계와 많은 부분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독립 당시 경제적으로 뒤쳐졌던 아일랜드 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영국령 얼스터 6개 주와 북한을 압도하고 있다는 점, 반드시 찾아와야 할 영토인 얼스터 6개 주와 북한 지역을 외면한 채 현재의 경제적 번영에 도취되어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아일랜드인과 한국인은 너무도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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