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의 서북쪽 끝에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아일랜드가 있다. 아일랜드의 면적은 한반도 면적의 40% 정도이고 그 곳에 거주하는 주민의 수는 약 650만명으로 한반도 인구의 10%에도 미치지 못 한다.

유럽 대륙 내에서 그다지 존재감이 크지 않은 아일랜드이지만 단순히 유럽의 작은 나라로 취급하기에는 세계사에 너무나 큰 발자취를 남겼다.

첫째, 영국이 전세계의 식민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사용했던 통치 기법들은 모두 아일랜드를 정복하고 지배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다.

둘째, 영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영문학의 전통은 아일랜드인들을 제외할 경우 현재의 위상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고 아일랜드인들이 없었더라면 예술 분야에 소질이 없는 잉글랜드인들의 힘만으로는 문화대국 영국의 위상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셋째, 미국 전체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아일랜드 이주민의 후예들 - 아일랜드인 9%,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1% - 이 미국 정계에서 맹활약하면서 전세계인들이 작은 섬나라 아일랜드를 가볍게 취급하기 어려워졌다.

넷째, 일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를 통치할 때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를 영어 사용권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을 참조하였고 - 내선일체(內鮮一體) -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도 아일랜드인들의 영국에 대한 투쟁을 바라보면서 자치운동론(自治運動論)에 몰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아일랜드가 어떤 과정을 거쳐 잉글랜드에게 정복되어 영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다시 독립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아일랜드인들 중 일부는 왜 독립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계속 영국인으로 남기를 선택했는지 알아보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도 1] 중세 아일랜드 지도

 

1. 헨리 2세의 아일랜드 정복

덴마크와 노르웨이로부터 침략해 온 바이킹의 침략을 가까스로 막아낸 아일랜드의 켈트인들은 여러 개의 작은 왕국으로 분열되어 끊임없는 내전 상태에 있었다. 바이킹의 후손들도 해안 지역 도시들에 여러 세대에 걸쳐 거주하면서 이제는 금발, 파란눈을 가진 아일랜드인이 되어 버렸다.

1152년 브레이프네(Breifne)의 왕, 티어난 오루크(Tiernan O'Rourke)는 그의 아내 데버길라(Dervorgilla)가 레인스터의 왕, 더멋 맥머로우(Dermot MacMurrough)에게 납치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사실은 데버길라가 맥머로우에게 제발 자신을 데리고 어디로든지 가 달라고 애원한 끝에 둘이 함께 레인스터로 떠났던 것이었다. 다만, 데버길라가 그녀가 타고 있던 말이 너무 빨리 질주해서 두려웠는지 아니면 남편을 배신하기로 한 자신의 결정이 후회스러웠는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간 남자에게 끌려가는 것처럼 보이고 싶었는지 계속 비명을 질러댔는데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맥머로우가 데버길라를 유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153년 데버길라가 남편의 곁으로 돌아왔지만 맥머로우에 대한 오루크의 원한은 사라지지 않았다. 1166년 오루크의 공격을 받아 근거지를 상실한 맥머로우는 잉글랜드로 탈출하였다가 국왕 헨리 2세가 머무르고 있던 프랑스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다.

프랑스의 서쪽 절반과 잉글랜드를 다스리면서 웨일즈, 스코틀랜드의 국왕이라고 자처하던 헨리 2세는 아일랜드까지 자신의 영토로 만들 기회가 왔음을 즉시 알아차렸다. 당시 교황 하드리아노 4세가 잉글랜드 출신이었기에 - 역대 교황들 중 유일한 잉글랜드인이다 - 헨리 2세가 교회 개혁을 명분으로 한 아일랜드 원정에 대하여 교황청의 허락을 받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잉글랜드 국왕과 귀족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노르만인들이다 보니 아일랜드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서 아무도 맥머로우와 함께 아일랜드로 가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맥머로우는 웨일즈인들과 전쟁 중이던 스트리고일 백작 리처드 피츠길버트 드 클레어(Richard FitzGilbert De Clare)를 만나 자신의 맏딸, 이이파(Aoife)와 결혼한 후 레인스터 왕국을 물려받게 해 주겠다는 약속을 한 끝에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1169년 드 클레어는 노르만 기사들인 피츠헨리(FitzHenry), 카류(Carew), 피츠제럴드(FitzGerald), 배리(Barry) 등을 데리고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우여곡절 끝에 오루크를 격파한다. 이 때 플랑드르 - 현재의 벨기에 - 의 기사들인 프렌더가스트(Prendergast), 플레밍(Fleming), 로체(Roche), 치버스(Cheevers), 시노트(Synott)도 맥머로우를 돕기 위하여 아일랜드 원정에 합류하였다.

현재 상당히 많은 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위에서 언급된 노르만 및 플랑드르 기사들에서 유래한 성을 가지고 있다.

1170년 이이파와 결혼하고 1171년 맥머로우의 사망 후 레인스터 왕국을 물려받은 드 클레어가 독자 노선을 걷게 될 가능성을 우려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는 아일랜드에 상륙하여 교황의 뜻을 앞세워 모든 왕과 주교들의 충성 맹세를 받는다.

1250년에는 아일랜드 전체 면적의 75% 이상이 노르만 기사들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서 분열되어 있던 아일랜드가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 하에 들어가는 듯 싶었지만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르만인의 후손들 역시 바이킹의 후손들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인이 되어 버렸고 켈트인 영주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잉글랜드로부터 간섭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논의하기 시작했다.

바이킹과 노르만인 모두 그 뿌리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에 있는 같은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었기에 일단 바이킹의 후손들이 아일랜드인이 되어버린 이상 동일한 외모를 가진 노르만인의 후손들도 아일랜드인이 되어 버리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2. 헨리 8세의 아일랜드 정복

프랑스 국왕 자리를 놓고 프랑스와의 100년에 걸친 전쟁 끝에 대륙의 영토를 거의 다 잃어버린 잉글랜드는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사이의 왕권을 둘러싼 내전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를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1455년 - 1487년)이라고 한다.

잉글랜드 국왕이 프랑스 내의 영지를 모두 잃어버린 상태에서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 후보자가 아일랜드를 방문하여 자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에 응하여 아일랜드인들이 랭커스터 가문보다 요크 가문에 더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 문제였다.

랭커스터 가문에 속하는 헨리 튜더가 1485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7세로 즉위하자 에드워드 포이닝스를 아일랜드 총독으로 파견하였다. 

1494년 포이닝스는 아일랜드 의회를 소집하여 '아일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왕의 동의 없이 열 수 없고 어떠한 법안도 잉글랜드 왕의 허락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내용의 포이닝스법(Poynings' Law)을 통과시켰다.

그 아들 헨리가 1509년 왕위를 물려 받아 헨리 8세로 즉위하면서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노르만 귀족들을 배제하고 더블린에 자신의 대리인을 파견하여 직접 아일랜드를 통치하려 하면서 이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사이에는 긴장감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레인스터의 킬데어 백작(The Earl of Kildare)이 잉글랜드 국왕을 대신하여 아일랜드를 대리 통치해 왔었는데 헨리 8세가 그 권한을 박탈하자 1534년 킬데어 백작의 아들 토마스 피츠제럴드(Thomas FitzGerald)가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 해 헨리 8세가 수장령(Acts of Supremacy)을 발표하여 잉글랜드 내의 카톨릭 교회 재산을 몰수하여 이를 기반으로 영국 국교회 - 성공회 - 를 세우자 아일랜드의 모든 주민들은 카톨릭 교회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잉글랜드 국왕에 대항하였다.

헨리 8세는 군대를 보내 1537년 토마스 피츠제럴드를 처형하고 아일랜드의 카톨릭 수도원을 해체한 후 1541년 아일랜드 의회를 소집하여 자신을 아일랜드의 왕으로 선포하도록 강요했다.

 

[지도 2]  아일랜드 행정 지도

 

3. 엘리자베스 1세의 아일랜드 반란 진압

1553년부터 1558년까지 이어진 메리 1세의 치하에서 잉글랜드는 카톨릭 국가로 복귀하는 듯 했으나 그의 사후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영국 국교회가 카톨릭 교회를 대신하는 주류 종파가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 하에서 아일랜드의 레인스터(Leinster), 먼스터(Munster), 코노트(Connaught) 지방은 모두 잉글랜드 국왕의 통치에 복종하였지만 얼스터(Ulster) 지방은 티론(Tyrone) 백작, 휴 오닐(Hugh O'Neil)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1594년부터 1603년까지 9년간 전쟁을 벌였다.

유럽 대륙의 카톨릭 국가들은 신교 국가 잉글랜드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아일랜드 카톨릭 교도들을 지원하기로 하고 먼스터 지방 코크(Cork)주의 킨세일(Kinsale)에 스페인군 4,500명을 상륙시켰다. 오닐을 중심으로 한 아일랜드군은 이 곳에서 스페인군과 합류하려다가 잉글랜드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1607년 오닐을 포함한 90명의 얼스터 귀족들은 아일랜드를 영원히 떠나 유럽 대륙으로 도주하는데 이를 백작들의 도주(The Flight of the Earls)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아일랜드 전역에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다.

유태선 시민기자 (개인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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