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우선 우리에겐 아직 생소한 '학지'란 단어부터 해석하기로 하자. 학지는 근년 일본지식사회와 논단에서 사용빈도가 높은 어휘인데, '학문과 지식'이라는 사전적 해석으로 통한다. 메이지 이후 개국시기 서양 학문·지식을 수용, 이입하여 전근대까지 중국 학문에 얽매였던 학문적 해방을 구가하는(또는 비판적 성찰의 심경적 뉘앙스가 다분히 스며 있는) 이 단어는 근대 일본인의 조어이다.

물론 아마 그 어원을 따지면 필자의 속단으로는 '중용(中庸)' 제 20장의 한 귀절 '학지이행(學知利行, 인간이 밟아야 할 인륜의 길을 후천적으로 배워서 행한다)'에서 따온 것으로 추찰된다. 그러나 '학지'에는 중국 학문을 차단시키고 또는 그것을 추월하여 독자적 근대 서양학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학문, 언설체계를 이루어 새로운 '일본의 학지 중심'을 아시아에서 수립·전파했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메이지 시대 전후 일본 국학자들은 확실히 '해 뜨는 나라' 일본이 드디어 중국을 이탈해 아시아 문명의 중심으로 탈바꿈했으며 세계의 학술 문화도 일본으로 집결된다는 의식이 짙었다. 이에 반해 중국의 근대는 자신의 전통에 고집해 천하의 신학문을 포용할 수 없었기에 문화의 변경으로 추락했다는 인식도 역시 자타에 다 존재했다.

당시 중국의 장지동, 이홍장 등 양무파 정치인, 지식인이나 강유위, 양계초 등 유신파 지식인, 황준헌, 엄복, 왕국유 등 거물급 지식인들도 일본이 중국을 추월한 동아시아의 문화의 집결지이며 '일본 학습'이 서양식 근대의 첩경이라고 역설, 주장했다.

현대 중국의 신예 학자들도 근대 중국이 일본에게 추월당하고 근대국민국가에 성공하지 못한 채 반식민지로 전락한 배경에는 일본과 같은 메이지 유신에 따른 일련의 근대적 개혁이 따라가지 못한 사실과 함께, 학문과 지식체계에서 중국의 구습을 답습하고 세계적 인식이 늦어짐과 함께 그런 고루한 지식, 사상들이 개혁 자체의 육중한 걸림돌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바꿔 말하면 일본적인 근대 학지의 도가니가 결핍했던 것이다. 일본이 중국을 누르고 아시아 학지의 집결지, 도가니를 형성해 새로운 문화중심으로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같은 집결지, 도가니는 어떻게 형성됐으며 중국과 조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런 문제에 준비된 답안은 한권 내지는 몇권 분량의 방대한 기술이 소요된다. 지폭의 관계상 그 궤적 흐름을 간단하게 짚어보는 것으로 대체하련다.

아편전쟁 이후 청국이 의연히 야랑자대의 태도로 서양의 선진문물을 '기기음교'라 취급하면서 서양학습을 멸시했을 때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거쳐 참신한 메이지정부가 탄생하며 '문명개화'의 슬로건을 걸고 서양문물을 적극 배운다. 그리하여 1870년대에 영국, 프랑스, 독일형의 메이지 사상이 후쿠자와 유키치 등 일류 사상가들에 의해 탄생되며 1880년대, 90년대에는 근대 민족주의, 평민주의, 국민주의 사상이, 1900년대에는 기독교적 사회주의, 독일, 프랑스류의 사회주의가 생성된다. 그것은 '일본인' '태양' 등 유명 잡지들에 의해 사회에 신속히 전파된다. 문학에서도 서양문학의 번역이 유행하고 정치소설, 사실주의, 낭만주의, 자연주의 및 반자연주의의 '백화제방'의 시기에 들어선다.

학문, 학술에서도 독자적인 동양사, 일본사, 지리학, 법학, 철학, 의학, 약학, 물리학, 지질학, 천문학, 식물학과 인류학, 민속학이 정립되면서 그 자체가 아시아 특히 중국, 조선 유학생을 통해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청일,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인문학, 사회과학 체계는 철학, 논리학, 역사학, 민속학, 정치학, 법학, 경제학 분야에서 와츠지 데츠로, 니시다 기타로 등 세계적 석학을 배출하며 아시아의 웅(雄)이 된다. 또한 의학, 금속학, 공학, 수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방대한 업적을 쌓으며 아시아를 리드한다.

근대 교육제도의 확립, 교욱의 발달에 따라 국민의 식자율이 전례없이 높은 수를 보이며 대중문화 수준도 신문, 사진, 방송, 활자, 활동사진(영화)을 통해 아시아 최고수준에 이르며 음악, 미술, 연극, 조각, 건축 등 분야에서 아시아가 배울 모델을 제공하게 된다.

이렇게 근대 일본은 중국을 추월하여 서양 문명을 상대화시키고 동등화시키는 입장에서 구 아시아적 중화 질서에서 자립해 새로운 학지적 문명의 도가니로 탈바꿈을 하게 됐다.

북경대학의 중일관계사 연구자 왕효추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지적한다. "근대에 이르러 중일 교류의 방향은 역전을 이룬다. 중국 청 정부의 부패와 보수로 제국주의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데 반해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서방을 배워 유신개혁을 통해 독립국으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열강의 반열이 올랐다. 중일갑일전쟁 후 진보적인 중국인은 일본침략을 지탄하는 동시에 일본을 학습하자며 유신을 주장한다."

제술할 것 없이 근대 중국인의 일본유학사는 그대로 일본을 통해 서양 학문과 사상 등 학지를 습득하게 된 근대 정신사의 단면이기도 하며 역시 조선이 근대 유학을 통해 근대 지성사를 정립하는 데 누락할 수 없는 영향을 받게 된다. 1910년대 5백여 명이던 일본 유학생이 1940년에는 3만명으로 증폭되면서 조선 근대 정신사에 특기할 공헌을 하게 된다.

당시 유학 중이던 중국 근대의 거물 채악은 중국이 '문명 모국'이었는데 반해 일본은 도양사상 유일무이의 '진취를 멈추지 않은 모국'이라고 일본을 예찬한다. 노신은 "모든 유학생들이 일본에 가서 우선 추구하는 것은 대저로 신지식이었다"고 일본 학습의 실질을 이야기한다.

망명초기 양계초는 많은 사상을 배우고 '뇌 속의 심(芯)'까지 변화시킨 사상, 언론, 전과 판이한 인간이 되었다"고 자신의 일본 영향을 고백한다.

저명한 청년 지식인 혁명가 추용은 동경 동문서원에서 유학 중이었는데, 그의 '혁명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문명국에 있는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출판의 자유 등을 최대한으로 향수하여 과목 공부는 저리가라는 격으로 신사상 섭렵과 흡수에 여념 없었다."

일본에서 형성된 '아시아의 학지적 도가니'. 이 곳에서 근대 중국과 조선의 젊은이들은 서양 문물과 사상, 지식을 흡수하여 자국의 근대 건설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일본의 학지적 도가니는 사실 100년 후인 오늘날도 아시아의 리드적 지위를 상실하지 않고 또 다시 아시아의 젊은이들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있다. 일본은 오늘도 한국이 배워야 할 모델임을 망각해선 안 된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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