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사실 근대 일본과 엉킨 관계사에서 항일저항의병투쟁운동이 주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그보다도 온건한 실력양성운동으로서 애국계몽운동이 더욱 활성화되었던 것이다.

1905년 일본에 의한 보호조약 체결에 대해서도 한국의 태도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신문언론에서는 일본의 강압적 체결에 반발하는 한편, 조약체결의 원인이 한국 측에 있었다는 자기반성론이 많았다. 의병무장투쟁의 한계는 그것이 왕실수호와 '위정척사'를 내건 유교·선비들의 전통적인 보수사상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보는 지식인이 오히려 더 많았다.

사실 대한제국(1897년) 선포 이래로 고종 개인 황제권이 극도로 강화되고 그 밑의 정치사적 지배층을 소외시키기에 이른다. 결과 황제 권력이 고도로 집중되고 정부의 기능 부전을 초래하여 정부 고관은 새로운 권력을 희구해 외부세력과 결탁해 친일파, 친러파, 친미파 등으로 분열되기도 했다. 이중 특히 지방의 전통적 지배층은 농민의 압력을 통제하기 위해 새로운 '보호자'를 찾았다. 그래서 일본의 통감 지배 체제를 부화뇌동하는 자도 있었다.

즉 무장투장과 같은 충돌적인 저항운동보다는 일본의 통감부 체제에 적응, 묵인하는 식으로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을 노린 유연한 운동이 탄생되었다.

한국 계명대학교 이성환 교수의 논고 '이토 히로부미의 한국 통치와 한국 내셔널리즘'에 따르면, 고종의 전제군주제 하의 정치사회의 폐색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헌정연구회가 계몽활동을 다시 전개했으며, 언론의 사회적 영향이 강화되고 계몽지식의 보급에 지식인이 크게 공헌한다.

애국계몽단체로서 대한 자강화, 서북학회, 동아개진회, 공진회 등이 활약하며 교육활동을 통하여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이 시기는 한국 민족운동의 획기적인 전개를 보인다.

한편 한국 교과서에는 언제나 한국인이 자체로 계몽운동을 벌였다고 기술하지만, 이 시기 한국 통감부의 설치로 일본의 영향력이 전반적으로 강화된 것이 중요한 배경 조건이었다. "결과 한국사회에서는 일본의 영향력 강화와 한국 내셔널리즘의 성장이라는 상반되는 움직임이 착종한 형식으로 기묘한 공존 관계가 노종되었다(이성환)."

이성환 교수는 한국사회와 일본 통치의 연관성을 강조하고 있다. 근대 국민국가를 지향한 한국 계몽운동은 결과적으로 전제군주를 고집하는 황제중심적 구체제를 약체화시킬 가능성이 강했기 때문에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통감부의 일본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시키는 효과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통감부에서는 계몽운동이 정면에서부터 반일을 제창하지 않는 한 그것을 억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탄압한 것을 항일 의병운동과 같이 격렬히 일본과 맞서 싸우는 무장투쟁이었다. 이런 무장투쟁에는 사실 유교를 신봉한 구체제 수구적인 지식인일 뿐 신세대 지식인은 아니었다. 통감부에서는 종래 금지시켰던 대중운동을 신고제도로 정하여 실질적 언론통제를 상당히 완화시켜 많은 언론자유를 보장해주었다.

이래서 이토 히로부미의 유연한 정책은 한국인의 정치 사회 공간을 넓혀주게 된다. 여기서 잠깐 배경적 요소로 이토의 한국 통치이념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이토는 그 이름(박문)과 같이 학지와 문명을 숭상하는 문명론자적인 지식인형 정치가로서 그는 넓은 국제적 감각이 있는 세계적인 정치가였다. 그는 무력과 합병을 반대했으며 러일전쟁도 반대한 평화주의자로서 한국에 문명개화, 일본식으로 근대화를 성공시켜 그뒤 한국인 자력으로 독립하는 것을 지향했다.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는 "나는 이 땅에 온 것은 한국을 세계의 문명국으로 만들기 위해서외다('일한 외교자료집성' 제6권 상)"라고 언명한다. 그가 내세운 플랜은 보통교육의 진흥, 산업기반의 정비, 식산흥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론이었다.

실제로 이토의 정책에 한국인들도 기대를 품었다고 '대한매일신보' 1906년 3월 22일자 신문에도 보도했다. 1909년 7월 이토가 재임하던 시기 실제로 교육, 산업, 도로 등 면에서 한국의 근대화가 추진되었다. 한국 교과서에서는 이런 근대화 건설에 대해 묵살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런 것은 제3자의 서양인들도 인정하고 높이 평가했다.

이토의 정책 아래서 한국의 순수한 계몽단체, 언론이 전례없이 활발히 전개된다. 대한자강회는 가장 중심적 위치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인다. 그것은 1906년 4월 아시아 연대론자인 일본의 오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를 고문으로 윤치호, 윤효정, 장지연, 나수연, 김상범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며 그 뒤 전국 33개 지부가 서며 독립협회의 뜻을 계승하여 교육, 식산을 고취하는 신문, 잡지, 연설로 계몽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이는 일본의 '내정개혁'에 의한 부국강병의 노선이고 통감부의 '시정개선'과 궤를 같이 한다고 이성환 교수는 평가한다.

대한자강회는 1906년 10월 정부에 의무교육제 도입을 촉진하는 의견서를 내는데, 당시에는 교육진흥열이 높아지고 실력양성의 길이 머지 않았다고 신문 언론에서도 그 실적을 평가했다.

한국에는 예상 이상으로 급속히 교육이 보급되며 실력 양성 운동도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이토와 한국의 계몽운동은 사상적으로 사회진화론을 토대로 한 문명론이었다. 이리하여 양자는 서로 합치했으며 '기묘한 공존관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토는 이런 계몽운동을 통한 한국인의 민족주의 각성에 대해 미처 상정하지 못했다. 결국 이토 시책 아래 전개된 애국 계몽 운동이 아이러니하게도 이토의 무덤을 파괴 된다. 고양된 민족운동 와중에 이토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한 것이 그것을 잘 입증해주고 있다.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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