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

 

오늘날 한국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위대한 대한민국을 세운 장본인은 이른바 ‘친일파’이고, 대한민국 파괴를 획책하는 장본인은 ‘친일파’를 증오하고 저주하는 좌파 세력이란 사실이다.

공산주의의 주구 좌파 세력은 반일을 부르짖고 죽창가를 외치는 등 추태를 부리고 있다. 이는 친일 엘리트들이 일본과 손잡고 오늘의 위대한 한국을 탄생시켰다는 역사적 진실을 감추고 뒤엎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좌파는 온갖 거짓말과 선동으로 ‘일제 시대’의 불편한 진실을 덮기까지 한다.

좌파가 주도해 만든 교과서는 “일제는 세계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하고 악랄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유린하고 수탈했다”고 왜곡한다. 또한, 일제에 협력한 친일 엘리트들을 ‘매국노’라 매도하는 것 역시 주저하지 않는다.

과연 그럴까. 한마디로 한국 근대의 원형은 조선인 유학생과 엘리트 지식인에 의해 일본 동경에서 탄생했다. 왜냐하면, 1881년부터 1945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 문화의 중심은 동경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엘리트들은 중화 문명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이탈한 후 일본으로부터 근대 문명을 이식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근대에 이르는 지름길이기도 했다. 중화 문명은 후쿠자와 유키치나 김옥균, 윤치호, 이광수 등이 지적했다시피 고루한 전근대 문명이었다. 이에 반해 서양 문명을 수용한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 사실상 유일한 근대 문명의 기준이자 본보기였다.

후쿠자와 유키치. [그림=김문학]

 

조선의 엘리트들은 여태껏 의존해 왔던 중화 문명에서 벗어나 선진적인 근대 문명을 배우기 위해선 일본을 향해 비상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었다. 이는 수천년 동안이나 중화 문명에 함몰됐던 조선의 풍토를 고려했을 때 전례가 없는 대혁명이었다.

1910년대 조선의 지식층은 이 혁명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젊은 천재 이광수는 “우리는 선조도 없는 사람, 어떤 의미에서 부모도 없는 사람이며, 오늘 느닷없이 하늘에서 지면으로 강림한 신(新)종족을 자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고백했다. 갑작스레 강림한 신종족들은 일본에서 신문명을 만끽했고, 탐욕스럽게 흡취(吸取)했다. 

한국 근대사를 개괄하면, 한 가지 특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모든 한국의 ‘최초’가 동경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우선, 근대 한국어는 동경에서 태어났다. 후쿠자와 유기치의 발안으로 당시 조선에서 ‘언문(諺文)’이나 여자들의 글로 멸시당하던 한글을 한문과 섞은 문체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근대 한국어다. 이는 중국에서 문언 불일치 서술체계가 발음 그대로 적는 ‘백화문(白話文)’ 문체로 변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듯 한국어는 물론이고 중국어도 일본어를 본떠서 생겨난 것이다. 

반일종족을 내세우고 있는, 무당의 모습을 한 한국인. [그림=김문학]

 

또한 일본식 한자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일본 지식인들이 동경에서 대량으로 만들어낸 일본식 한자는 새로운 단어에 무수히 사용됨으로써 일본인의 근대적 사고와 근대 문명의 개화에 심대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후 이 단어들은 조선의 엘리트들에 의해 조선에 그대로 이식되었다.

개념 혹은 사고를 직관적으로 표현한 일본식 언어는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과 중국인의 사고 및 문화 양식을 근대화시키는데 기여했다. 최초의 근대 소설 『무정』은 청년 이광수에 의해 동경에서 탄생했다. 최초의 근대시 『바다에서 소년으로』는 17세 천재 소년 최남선에 의해 동경에서 탄생했다. 그뿐이 아니다. 최초의 문학잡지 《창조》를 시작으로 유학생 잡지 《대한학회월보》, 《대한유학생회학보》, 《대한흥학보》, 《학지광》도 전부 동경에 유학했던 조선인 인텔리들에 의해 동경에서 창간되었다.

조선 최초의 근대 동양화와 서양화도 동경의 여러 미술학교에 유학했던 조선인 유학생들에 의해 탄생했다. 이는 당시 중국식 수묵화와는 달리 색채감과 약동감이 가득해 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일본식 미술작품을 모방한 것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최초의 《조선서화협회》는 동경에서 결성되었다. 최초의 근대 극단 《동경학우회극단》도 역시 동경에서 결성되었다.  

근대 한국군의 군사 체계도 역시 일본군을 모방한 것이다. 이 밖에도 ‘민족’ ‘국가’ ‘애국’ 등의 단어와 개념은 물론이고 근대적인 모든 문물과 사상은 하나도 빠짐없이 동경에서 탄생했고, 이른바 ‘친일파’에 의해 홍수같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개화파 주역 유길준의 『서유견문』도 사실은 동경 체류 와중에  일본인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발상한 것이다. 또한, 두말할 나위 없이 김옥균을 위시한 근대 쿠테타 세력 역시 동경에서 일본 배우기에서 생겨난 것은 아닐까. 좌파들이 명성황후로 예찬하는 민비시해사건도 조선인 지사와 일본인 유지의 합작이었다.

더 이상 숨기거나 왜곡할 필요가 없다. 근대 중국의 발원지가 동경인 것처럼 근대 한국의 혁명과 문명의 발상지도 역시 동경이었다. 오늘날 좌파 세력과 많은 한국인은 근대 한국의 정체성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잘 모르고 있다. 어쩌면 알면서도 그 진실을 ‘부끄럽게’ 생각해서 한국 근대화에 이바지한 친일 엘리트를 ‘매국노’로 왜곡하고 중상(中傷)하는지도 모른다. 

친일 엘리트가 문명의 격동기에 일본으로부터 근대 문명을 이식하는 과정은 조국 근대화를 위한 몸부림의 과정이었다. 이를 매도하는 것은 선대와 선각자들에 대한 파렴치함이자 불손함의 극치라 할 수밖에 없다.

수구파에 의해 거세당하는 개화파. [그림=김문학]

 

김문학 일중한국제문화연구원장(현 일본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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