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6일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한국 주도의 배상 방안을 발표하면서, 한국과 일본이 과거사의 앙금을 털고 각 분야에서 적극 협력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한·일 안보협력의 최대 걸림돌을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문화교류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나가는 데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분석을 낳고 있다.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사진=로커스 제공. 재배포 및 DB금지]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 [사진=로커스 제공. 재배포 및 DB금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한·일관계에 새로운 미래로 가는 모멘텀 만들어”

반기문 전 유엔(UN) 사무총장은 정부의 배상안 발표에 대해 "장기간 경색돼 온 한·일관계에 새로운 미래로 가는 모멘텀을 만들었다"며 호평했다. 그는 이번 해법이 대법원 판결과 국제법, 한·일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라며, “날로 엄중해지는 국제정세와 복합위기 속에서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본과의 협력은 우리의 국익과 국제평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제3자 변제'를 골자로 하는 정부의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해법에 대해서 일반 국민여론은 현재 반대쪽이 우세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하지만 반 전 총장과 같은 외교전문가들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 등과 같은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문화관광 교류는 이미 양국의 정치적 갈등을 초월하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특히 젊은 세대는 정치적인 문제를 자신의 현실과 분리해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 정치적 갈등과는 무관하게 서로의 문화를 즐기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1월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역대 일본 영화 흥행 1위 올라

이런 경향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한국의 일본 애니메이션 열풍이다. 새해 국내 박스오피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지난 1월 4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지난 5일 기준 누적 관객 384만 관객을 돌파하며, 역대 일본 영화 흥행 순위 1위에 올랐다.

1990년대 인기 만화였던 ‘슬램덩크’를 스크린에 옮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자인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직접 각본과 연출을 맡으며, 일찌감치 화제가 됐다. 만화 속 농구 경기의 박진감을 입체적으로 세련되게 연출하면서, 청소년기 원작 만화 ‘슬램덩크’ 팬이었던 30·40세대의 큰 호응을 받았다.

30·40세대의 추억에서 시작된 슬램덩크 열풍이 젊은 팬심까지 사로잡으며, 흥행 돌풍을 일으킨 것으로 분석된다. 게다가 ‘현지화 전략’도 적중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캐릭터들의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뀌었고, 성우가 직접 배우의 목소리를 연기하는 더빙판을 찾은 관객이 더 많은 것도 인기요인으로 분석됐다. 더빙판과 자막판을 여러 차례 소비하는 n차 관람이 흥행의 또 다른 요인으로도 꼽히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 더 퍼스트’ 포스터. [사진=연합뉴스]
일본 애니메이션 ‘슬램덩크 더 퍼스트’ 포스터. [사진=연합뉴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 이어 최근 개봉한 영화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소토자키 하루오 감독)'가 연이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했다. 한국 영화 중에서는 '대외비(이원태 감독)'가 개봉 이후 4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사수하며 간신히 자존심을 지켰지만, 8일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신카이 마코토 감독)'에 밀려났다.

8일 개봉한 ‘스즈메의 문단속’ 흥행몰이...신카이 감독, “K 드라마에서 영감받아”

'스즈메의 문단속'은 개봉 첫날 14만 관객을 모으며, 개봉 첫날 1위를 차지했다. 50%를 훌쩍 뛰어넘은 압도적 예매율로 이미 흥행이 예상되는 분위기이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너의 이름은’, ‘날씨의 아이’ 등으로 국내에서도 인정받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일 뿐 아니라, 제73회 베를린영화제에서 21년만에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이미 작품성에 대한 신뢰감이 형성됐다.

여고생 스즈메가 의자로 변해버린 청년 소타와 함께 재난을 부르는 문을 닫으러 모험에 나서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어린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만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함의를 담은 작품들을 선보여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지난 8일 개봉과 함께 서울 성동구 메가박스 성수점에서 내한 기자간담회를 가진 신카이 감독은 '스즈메의 문단속'을 시작하게 된 이유로 "K드라마인 '도깨비'를 보고 문을 사용하는 방식이 신선해서 영감을 받았다"고 전하며 K콘텐츠에 대한 유대감을 밝혔다.

연이어 신카이 감독은 한국인이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한국과 일본의 문화나 풍경이 닮아서가 아닐까 싶다”고도 밝혔다. 그러면서 “서울에 올 때 가끔 거리를 보면서 그립다는 생각도 들고, 동시에 이 부분은 도쿄의 미래가 아닐까 생각도 한다"며 "그래서 일본인은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고, 한국인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게 아닐까. 물론 정치적으로는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고 마치 파도 같은 관계이지만, 문화에 있어서는 강하게 서로 연결돼 갔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지난 9일 기준, 박스오피스 상위권에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비롯해, '더 퍼스트 슬램덩크'(2위), '귀멸의 칼날: 상현집결, 그리고 도공 마을로'(4위)가 함께 이름을 올리면서 일본 애니 작품들이 극장가를 휩쓸었다. 반면 한국 영화는 세 남자의 권력 암투를 그린 '대외비'가 박스오피스 3위, 가수 임영웅의 콘서트와 인터뷰 등을 담은 다큐멘터리 '아임 히어로 더 파이널'이 5위에 올라 상대적으로 부진한 성적을 거뒀다.

일본에서 한류의 인기가 이미 오래되었다는 점과 함께 한국 내 일본 애니메이션의 열풍은 ‘양국 국민이 서로의 문화를 즐길 정도로 성숙’하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정치적인 대립에 좌우되지 않을 정도로 여유를 가지고 상대방의 문화를 즐긴다는 것이다.

양국 관광교류의 활성화, 한국인의 일본 방문 급증...‘반일 감정’은 진보 진영 구호?

특히 최근 한국인의 일본 방문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반일 감정’은 진보 진영의 구호속에서나 찾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한국관광공사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올해 1월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총 149만7300명 중 37.7%인 56만5200명이 한국인이었다. 같은달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총 43만4429명으로, 지난해 1월보다 430.8% 증가했는데, 이 중 1위가 일본(6만6900명)으로 1년 전보다 5657.3%나 늘었다.

지난 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에서 승객들이 일본행 비행기 탑승수속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일본 무비자 입국이 재개된 지난 10월 이후 우리나라 국민들의 일본 방문은 꾸준히 늘어 지난달에는 56만5천명을 넘기며 일본 전체 외국인 방문객의 37.7%에 달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 출국장에서 승객들이 일본행 비행기 탑승수속을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일본 무비자 입국이 재개된 지난 10월 이후 우리나라 국민들의 일본 방문은 꾸준히 늘어 지난달에는 56만5천명을 넘기며 일본 전체 외국인 방문객의 37.7%에 달하는 수치를 기록했다. [사진=연합뉴스]

양경수 한국관광공사 일본팀장은 “일본 정부가 코로나19를 감염병 2등급에서 5등급으로 하향조정해 여행 장애물이 모두 사라지는 5월부터 일본인들의 본격적인 한국여행이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특히 한·일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양국 관광교류가 크게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올해는 한류 붐이 시작된 드라마 ‘겨울연가’ 일본 방영 20년이 되는 해라는 점에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K관광 로드쇼’를 통해 일본인 관광객 유치에 발벗고 나섰다.

한국여행업협회(KATA), 한국관광협회중앙회(KTA) 등 여행업단체 역시 정부가 지난 6일 발표한 강제징용 피해배상 해법을 일제히 환영하며, 관광 교류 활성화에 한목소리를 냈다.

한국여행업협회는 9일 "관광교류 협력이 장기간 침체돼 많은 어려움을 겪어 온 여행업계에 새로운 미래로 가는 모멘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강제징용 문제, 노재팬 운동에 이어 최근 3년간 지속된 코로나로 한일 간 관광교류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며 "정부의 한일관계 개선조치로 인한 해빙무드는 우리 국제 관광경쟁력을 한단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과거 700만명 이상의 관광객 상호 교류가 복원될 것으로 확신한다"며 "민간교류 협력 확대로 한일 관계 개선에 일조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관광협회중앙회도 "코로나로 3년 동안 고사 위기에 처했던 관광업계에 희망을 주는 소식"이라고 평가했다. 관광협회중앙회는 "2011년을 끝으로 한일 정상이 양국을 오고 간 게 중단된 지 올해로 12년째"라며 "2012년까지 방한 외국인 관광객 1위를 유지하던 일본인 관광객 방문이 2013년부터 줄어든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번 한일관계 개선방안 발표를 계기로 업종별·지역별 관광협회를 중심으로 전국 관광사업체와 함께 일본인 관광객유치에 집중하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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