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년 바오로 2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프란체스코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 새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선거과정은 음모와 뇌물로 얼룩졌다고 하는데 로베로는 선거에  영향력이 큰 밀라노 공작에게 선물 공세를 했다고 한다<나무위키>. 
  그는 사보나 근처의 가난한 농부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 병치레를 자주해서 어머니는 성 프란체스코에게 바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9살 때 프란체스코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수도회원으로 성장했다. 그 후 그는 파도바 대학 등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고 여러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대치동 강사처럼 인기가 있어 대부분의 이탈리아 지식인들이 그의 제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문명이야기 5-2>. 교황선출이전에는 비세속적인 인물로 명망이 높았다<나무위키>.

  식스토 교황이 마주쳤던 무대상황
  새 교황이 마주쳐야 했던 상황은 녹녹치 않았다. 유럽은 분열되고 교황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있었다. 교황이 투르크에 맞서 유럽의 힘을 결집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이제 이탈리아 군주들도 교황을 무시했고, 교황령의 지배자까지 세금을 잘 내지 않는 등 독립적인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로마 사람들도 교황을 우습게 봤다. 선출과정이나 과거 행적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교황에 대한 신비감이나 존경심이 없다. 취임식 날 도로체증에 화가 난 로마사람들이 교황의 마차에 돌을 던졌다<문명이야기5-2>. 교황은 로마와 교황령의 기강을 잡고 이탈리아라도 순종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문제는 영적인 힘이 아니라 무력으로 그 목적을 달성하려 한 것이다. 교황은 정치가와 전사로 돌변했다. 전쟁을 하려면 믿을 사람이 주변에 있어야 하고, 전위대로 나설 사람이 필요했다. 그는 족벌주의에서 답을 찾았다. 특히 외조카 2명을 중용했는데, 그들은 교황청의 자리를 자신의 향락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 같다. 피에트로는 재벌 2세처럼 돈을 물 쓰듯 했는데 엄청난 빚을 남기고 일찍 죽었고, 둘째인 지롤라모는 교황청의 군대를 이끌며 자신이 진짜 군주가 되기 위해 온갖 음모에 개입했다. 나중에 군주론의 모델이 되는 체사레 보르자의 역할을 미리 보여준 것 같다. 식스토 4세 재위기간 동안 서임된 34명의 추기경 가운데 6명이 그의 조카였는데, 대부분 평가가 좋지 않았다.
  식스토 교황은 현실적이었다. 비오 2세 교황처럼 십자군 원정 같은 ‘이상’을 밀어붙이지 않았다. 가까운 주위부터 내 편으로 만들고 나서, 유럽을 이끌겠다는 생각이었는지 모른다(我生然後殺他). 문제는 이런 생각이 자신의 활동영역을 좁혀버린 것이다. 유럽을 버리고 이탈리아 문제에 집중했고, 특히나 영적으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은 포기한 듯하다. 교황은 친위세력의 구축이 끝나자 이탈리아 내부의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과의 싸움
  대표적인 것이 메디치 가문과의 싸움이었다. 교황은 외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교황의 아들이라는 주장도 있다.)를 군주로 만들기 위해, 로마냐의 이몰라(Imola) 매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메디치 은행에 융자를 요청했으나 로렌초 메디치는 자신도 이몰라(Imola) 구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융자를 거부했다. 대신 파치가문이 융자를 해줬고, 교황청은 주거래은행을 메디치에서 파치은행으로 변경했다. 메디치가문과 파치가문의 싸움이 벌어졌고 파치사람들이 로렌쪼 메디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는데, 교황도 메디치 가문을 몰아내고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를 피렌체의 군주로 세우기 위해 그 음모에 가담했다. 
 음모단은 1478년 4월 26일 피렌체 대성당 미사에서 2명의 메디치 형제를 암습하여 형 로렌초에게 부상을 입히고 동생 줄리아노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러나 음모단이 의회와 행정부 장악에 실패하자, 공모자와 암살단은 즉시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파치(Pazzi) 가문 일족은 재산이 몰수되고 피렌체 밖으로 추방당했다. 
  그러나 교황은 물러서지 않았다. 피렌체를 파문하고 나폴리를 끌어들여 피렌체를 공격하게 했다. 피렌체는 전쟁에서 밀리면서 피난민이 급증하였고 전비증가로 시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전쟁 통에 피렌체의 모직물 산업이 멈춰서는 불행도 발생했다. 잉글랜드가 자국산업 보호를 위해 양모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피렌체 주변(토스카나 지역)의 주교들이 피렌체 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교황 식스토 4세의 파문을 결의하기도 했다<나무위키>. 그리고 로렌초 메디치는 단신으로 나폴리왕국으로 들어가 전쟁종식을 위한 담판을 했고, 성공하여 금의환향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로렌초 메디치의 지위와 메디치가의 단합이 견고해졌다. 교황의 정치개입은 이탈리아를 분열시키고, 위기를 의식한 지역실권자들의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었다. 
  피렌체 전쟁 후에도 교황은 교황령 안에서 분쟁을 야기했다.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가 페라라를 차지할 욕심으로 교황을 꾀었는지, 베네치아와 교황이 페라라의 군주인 에르콜레 공작을 공격했다. 공작의 장인인 나폴리왕은 페라라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피렌체와 밀라노도 페라라를 도왔다. 결국 교황은 페라라를 포기했으나 이탈리아 군주들 간 불신만 키웠고, 이탈리아 백성들은 많은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공공시설 개선에 기여
  그래도 식스토 4세 교황은 공공시설을 개선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로마 제국 멸망 이후 테베레강 위에 처음으로 다리를 세웠는데, 자신의 이름을 붙여 시스토 다리라 불렀다. 로마의 주요도로들을 넓히고 반듯하게 해서 포장했고, 바티칸 도서관을 확장하고 시스티나 예배당을 지었으며, 로마의 나쁜 수질을 정화하기 위한 송수로를 복구했다. 대규모 공공시설 앞에서 일반대중은 권력의 위대함을 느끼고, 그 불만도 작아진다. 히틀러도 아우토반을 건설하며 대중을 위무했다.
  지금 보아도 위풍당당한 세종문화회관, 예술의 전당 등 건물은 권위주의 정부에 의해 건립되었다. 당시 우리 국력에 비추어 보면 대단히 거대한 건축물인데 군사정권은 권력의 정당성 부족을 이러한 볼거리로 보충하려 했는지 모른다. 미국에서는 이러한 건축물을 민간이 건설했다. 강철왕 카네기가 건립한 카네기 홀이 대표적이다. 교황도 부족한 권위를 이러한 거대 공공시설로 채우면서, 이것이 위정자의 의무라고 생각했을까. 르네상스 교황들은 대체로 겉으로 보이는 외관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일반대중의 신앙심 고양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물질로는 신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교회 건물은 단순하고 소박했다. 

  성직매매와 곡물 판매수익으로도 재정적자는 누적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는지 교황은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전임 바오로 2세가 가득 채워서 남겨준 재정을 식스토 교황은 사치와 전쟁,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소진해 버렸고, 성직을 팔아서 전쟁비용 등을 댔다. “식스토 4세 교황이 자기가 원하는 돈을 얻기 위해 펜과 잉크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했다는데<문명이야기 5-2>, 성직매매를 요즘의 국채발행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교황령의 곡물 판매권을 독점해서 좋은 곡물은 외국에 비싸게 팔고 나머지를 자기 국민들에게 팔아 폭리를 취했다. 그럼에도 식스토4세는 엄청난 빚을 남겼다. 백성들은 교황 일족들의 사치를 위해 자신들이 굶주린다고 생각했다. 교황은 1478년 11월 스페인에 악명 높은 이단재판소의 설치를 승인했다.

  의학발전에 기여
  한편 식스토 4세는 처형당한 범죄자와 신원 미상의 시체들을 의사 및 예술가들에게 해부용으로 제공했고, 이 조치로 말미암아 해부학 교재가 발간되었고 의학 발전에 획기적 기여를 했다고 한다<나무위키>. 신체를 성령이 깃든 신비한 몸이 아닌 기계적 존재로 본 르네상스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교황의 전횡을 막는 통제장치 약화 
  식스토 4세의 문제점은 신앙심을 잃어버린 데 있는 것 같다. 교황국가를 확장하고 내부기강을 모토로 내세웠지만, 자기 조카들을 교황령의 군주로 만들어 이 지역을 확실히 지배하겠다는 사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군대와 전쟁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려했고 종교적 문제는 뒷전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해진 것일까. 60년 전까지만 해도 교황을 비판하는 공의회도 개최되고 대립교황이 옹립되어 기존 교황을 견제하기도 했다. 족벌주의와 전쟁, 음모개입 등 식스토 교황의 실정으로 볼때 탄핵과 대립교황이 세워질 만 했는데,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어쩌면 50년의 교회분할 역사가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강한 공감대를 형성시켰는지 모른다. 그 결과 교황의 전횡을 막는 통제장치가 무뎌지고 교황권이 더 강해졌던 게 아닐까. 

  신앙심 잃은 지식인과 끝없는 타락
  한편 르네상스시대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타락상이 엿보인다. 그들은 신앙심이 전혀 없었다. 그리스도교의 이상을 잃어버렸고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았다. 신화가 죽으면 폭력이 풀려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것 같다<문명이야기 5-2, P276>. 비판정신은 식어버렸고 눈치만 보고 자신의 이익만 꾀하는 속물이 되어갔다. 식스토 교황은 전임교황에게 박해를 받았던 플라티나를 바티칸 도서관장 직에 임명해서 전임 바오로교황에 대한 원한을 갚을 수 있게 했다. 사실상 전임교황을 비하해서 후임교황이 높아지게(不以人之卑自高) 되었는데, 이 방식 외에는 자기를 내세울 게 없었는지 모른다. 군주들도 이 세속적인 교황을 이용해서 어떻게 이익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였다. 끝없는 타락의 시대였다.

 탄핵백신과 자신감 있는 국정 
 최근 ‘탄핵’이란 단어가 여당 대표 경선 과정에서 튀어나왔는데, 한심한 생각이 든다.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명백히 위반한 것도 아니고 임기가 1년도 지나지 않은 시기다. 교회분열 시대를 거치면서 다시는 두 명의 교황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게 되었듯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사건으로 이런 혼란이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백신을 국민들이 맞게 되었다. 대통령 탄핵은 과거에 비해 훨씬 어려워졌다. 대통령과 측근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국정에 임해주시길 간절히 기원한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작권자 © 펜앤드마이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