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바오로2세 교황은 베네치아의 부유한 상인집안 출신이었다.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외삼촌이어서 성직의 금수저도 물고 태어났다. 그 결과 불과 22세에 부제 추기경, 34세에 주임사제 추기경으로 임명되는 등 젊은 나이에 중요한 성직을 맡을 수 있었다. 
  전임 비오 2세 교황 아래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는데 오히려 이 점이 교황선출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비오 2세의 통치방식에 불만을 느꼈던 추기경들이 지원했는지 초반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앞선 교황들처럼 바오로2세도 선거하는 과정에서 합의각서를 썼다. 투르크와의 전쟁을 지원하고, 세계공의회를 소집하며, 추기경 수를 제한(24명)하고 서른 살 이하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중요사항은 추기경들과 협의한다는 내용이었다. “중요사항의 추기경들과 협의” 는 전임 교황들의 비밀 합의서에도 발견된다. 교황보다 자기가 태어난 국가의 왕을 따르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추기경들을 역대 교황들은 못미더워했던 것 같다. 당연히 교황들은 추기경들의 의견을 무시하며, 요즘의 대통령이 국회를 싫어하듯 추기경단을 대했을 것이다. 바오로 2세는 선출되자마자 합의각서 이행을 거부했다. 대신 추기경들의 수입을 늘려주어 입막음을 했다. 선거공약 이행을 거부한 것은 대단히 용기 있는 행위였지만, 비난은 많이 받았을 것이다.  
  새 교황에게는 두 가지 시대적 과제가 있었다. 전임 비오 2세 교황도 실패한 일인데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는 십자군결성과 교회개혁이었다. 

 대 투르크 전쟁지원과 적전 분열, 관용의 부족
 우선 바오로교황은 전임교황 때 발견된 염색용 백반 광산 수입으로, 오스만 투르크와 싸우고 있던 헝가리와 알바니아를 지원했다. 당시 알바니아 왕 스칸데르베그는 게릴라 전술로 오스만투르크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상황은 나빠지고 있었다.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는 그동안 알바니아 전쟁의 실패가 복잡한 산악 지형과 알바니아 주민들의 게릴라 지원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진격로 주변의 주민을 소거하고, 숲을 뚫고 군사용 도로를 개설하여 보급선을 강화하며, 산악 지형내에 오스만 제국의 확고한 요새를 구축하는 장기 전략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알바니아 게릴라들 간의 연계를 끊고 그들의 서식처를 없애는 데 전 국력을 집중했다<나무위키, 스칸데르베그>. 

  알바니아는 오스만투르크와의 전투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뒀지만 많은 사상자를 수반했고, 오랜 전쟁으로 인적 물적 보충이 힘들어졌다. 승리하면서도 손실이 회복되지 않아 패배하게 되는 ‘피로스의 승리’였다. 146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알바니아는 기진맥진해졌고, 서방 세계의 지원에 목을 매고 있었다. 

  한편 오스만 투르크에 맞서 십자군을 지휘할 적임자는 보헤미아 왕 이르지 스 포데프라드였다. 이르지 왕은 보헤미아, 폴란드, 헝가리 등이 참여하는 동맹을 맺어 투르크와 싸우는 구상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종교적으로 교회개혁을 주장하는 후스파였다. 교황이 개종을 요구하자 이르지 왕은 거부했고 끝내 파문당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교황은 보헤미아 내의 가톨릭파 귀족들과 헝가리를 끌어들여 투르크가 아니라 이르지 왕을 상대로 십자군전쟁을 일으켰다<나무위키>. 

  적전 분열이 일어났으니 전쟁이 제대로 수행될 리 없다. 콘스탄티노플 전쟁 때에도 교리 논쟁을 극복하지 못해 비잔틴 제국의 패망을 지켜봐야 했는데, 교훈을 얻지 못했다.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바오로 2세의 재임기간 중에 알바니아를 잃었고 1470년에는 베네치아의 최후 보루였던 네그로폰테마저 함락되었다. 

  위기를 느낀 교황은 이탈리아의 군주들을 로마로 소집해 십자군 결성회의를 열었으나, 1470년 12월에 방어 동맹만 체결할 수 있었다. 53세란 이른 나이에 뇌졸증으로 죽음을 맞이한 것도 이런 실패에 따른 중압감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당시 로마 교황청이 후스파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보헤미아 사람들을 설득했다면, 교회개혁과 십자군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해 본다. 관용의 부족이 모든 것을 망가뜨린 느낌이다.

  인문주의자들과의 갈등
  한편 바오로 2세는 인문주의자(학자와 언론인)들과 사이가 나빴다.  새 교황은 전임 비오 2세의 고향(시에나)사람들로 구성된 서기국(문서작성)을 구조조정차원에서 해산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로마의 인문주의자들이 직업을 잃었다. 해고된 사람들의 지도자였던 플라티나가 재고용해줄 것을 요청하며 교황에게 위협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이 불경스러웠던지 교황은 그를 체포해서 감금시켰다. 또한 인문주의자들이 만든 아카데미가 고대 로마의 예식과 사상을 퍼뜨리자, 로마의 학교에서 고대 시 등 이교 문학을 배우지 못하게 했으며 인쇄소를 열면서 종교재판소에 출판을 억제할 권리를 주어 사실상 ‘검열제도’를 도입했다. 

  그러니 글로 먹고사는 인문주의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 플라티나는 사후이긴 했지만 ‘교황들의 생애’란 책을 쓰며 바오로 2세를 사치와 허영, 탐욕의 괴물로 묘사했다. 바오로 교황이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보석 등 사치품을 좋아했고 화려한 궁전을 지었으며 손님 접대에 많은 돈을 지불한 것은 사실이었다. 플라티나는 이를 침소봉대해서 복수를 했는데, 바오로 교황에 대한 대부분의 평가가 그의 글에 기반을 둔 것 같다<문명이야기 5-2> 

  인문주의자를 탄압한 이유
  하지만 교황이 인문주의자들을 탄압한데는 나름 이유가 있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경멸하고 스토아 철학을 좋아했으며, 고대 로마의 종교와 문화를 재현하려했다. 일부는 로마공화정의 영광을 그리며 공화정의 복구를 꿈꿨다. 한마디로 인문주의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멀어져 있었던 것이다. 교황은 이들의 아카데미를 이단의 소굴이라고 폐쇄했다.    

플라티나가 그린 교황의 모습도 실제와 너무 다른 것 같다. 바오로 교황은 학자들을 가까이 했으며 고대의 기념물을 복원하고 예술품을 수집했다. 로마에 최초의 인쇄소를 세웠으며 1469년부터 로마의 법규를 개정할 때 시민들의 동의를 얻도록 했다. 교황령 관리들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으려 했고, 성직매매와 면죄부 판매를 하지 않았다<문명이야기 5-2>. 인사도 공정해서 자신의 친족 또는 이탈리아 사람에 편중되지 않았다. 잉글랜드, 프랑스, 헝가리, 나폴리, 키프로스 등 군주들이 추천한 인물들을 골고루 추기경에 서임했고, 후임교황 식스토4세가 되는 프란치스코회의 유능한 총장도 추기경에 임명했다<위키백과>. 인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야만인, 예술의 적대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로마를 정의로 통치했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의 타락과 사실왜곡
  당시의 인문주의자들도 오늘 날의 언론처럼 타락했던 것 같다. 언론과의 사이가 나빠 탄핵된 박근혜 대통령이 연상된다. 일부 언론은 태블렛 PC 등 없는 사실도 만들어냈던 것이다. 바오로 2세도 그와 같은 역사 왜곡을 당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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