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객원 칼럼니스트
김상규 객원 칼럼니스트

콘스탄츠공의회(1414.11~1418.4)에서 그레고리오 12세가 사임을 하고 그가 죽기 직전에 통합교황으로 오도네 콜론나 추기경을 선출함으로써 교회분열이 종식되었다. 그러나 교회개혁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2>. 

마르티노 5세 교황은 그를 교황으로 선출한 공의회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교회개혁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콘스탄츠 공의회는 교황보다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고 선언했고 교황을 폐위하고 선출하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교황이 교회의 머리이지만, 교회는 머리와 지체들이 하나를 이루는 유기체이므로 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세계 공의회가 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분열로 교황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사라진 현상을 반영한 것 같다.  

그 결과 교회에 대한 모든 불만이 공의회로 모였고, 이 기회를 틈타서 자기 권력과 이익을 확대하려는 세력들도 나서게 되었다. 시시콜콜한 것부터 도저히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급진적인 안까지 교회개혁 욕구가 다양하게 분출했다.

세 가지 대안이 마르티노 교황 앞에 놓여 있었다. 첫째는 공의회가 쏟아내는 교회개혁안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안은 자칫 잘못하면 공의회에 계속 휘둘리게 되어 천년의 로마 교황청 전통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둘째는 개혁을 거부하는 것인데, 당장 공의회 세력에 의해 폐위될 게 뻔했다. 셋째는 시간을 끌며 공의회의 욕구를 최대한 가라앉히고 교황청이 수용할 수 있는 것 위주로 개혁하는 것이다. 교황은 자연스레 세 번째 방안을 택했다. 

새 교황 마르티노 5세는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집안인 콜론나 가문출신이었다. 가문의 지원도 있었지만 정치적 수완도 대단히 뛰어났던 것 같다. 그는 안정을 중시하고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개혁욕구를 최소화하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내부 반란을 걱정했는지 기존 교황청의 특권과 권력을 그대로 인정하는 방향에서 개혁을 받아들였다. 
  우선 지기스문트 황제를 공의회의 의장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회의를 주재했다. 그리고 개혁추진세력들을 각개 격파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예의바르고 섬세한 말로 공의회에 참석한 모든 국가와 그룹을 따로따로 협상했고, 이 그룹들이 서로 대립하게 했다. 그리고 모두가 자신의 이익과 체면을 유지한다고 해석되는 불확실한 언어로 설득했다<문명이야기 5-2>. 

신성 로마 제국과 잉글랜드, 프랑스, 스페인 등 공의회에 참석한 나라들이 자신들의 개혁안을 밀어붙이자 마르티노 5세는 그들 개혁안의 개별 협약부분이 애매모호하고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의 개혁안으로 맞불을 놓으며 협상에 들어갔다<위키백과>.

그리고 중요한 사안은 당장 결론을 내기보다는 가급적 다음기회로 미뤘고, 구체적인 개혁사항은 다음 공의회에서 다룰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 모두가 최소한의 개혁을 받아들이게끔 분위기를 끌고 갈 수 있었다. 공의회 참석자들은 오랜 회의에 지쳐있었고 고향이 그리웠다. 콘스탄츠를 떠나기 전에 영리한 마르티노 교황은 마무리하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틈타서 ‘교황을 거치지 않고 공의회에 제소’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공의회 우위설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교황사전 카톨릭대학교 출판부>. 

마르티노 5세는 1418년 4월 다음 공의회를 약속함으로써 3년 6개월의 콘스탄츠 공의회를 끝냈다. 특이한 점은 교회개혁을 지속하기 위하여 공의회를 자주 열 것을 천명하고 미래에 열릴 공의회들을 미리 정했다는 것이다. 즉 다음 공의회는 5년 후, 그다음은 7년 뒤에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10년간의 간격을 두고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공의회가 끝났음에도 교황은 곧 바로 로마로 금의환향할 수 없었다. 제네바와 피렌체에 머물며 용병들이 점령한 길이 안전하게 정리될 때까지 기다려야했다. 마르티노 5세는 콘스탄츠를 떠난 지 2년이 지난 1420년 9월이 되어서야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황량하고 안전하지도 않은 로마였다. 그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산적과 강도소굴을 몰아냈고, 황폐해진 성당들과 궁전들, 다리들, 기타 공공 건축물들을 재빨리 복구토록 했다. 

로마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나폴리의 여왕으로 조반나 2세를 인정했다. 그 대가로 베네벤토를 반환받아 자신의 가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위키백과>. 마르티노 5세는 콜론나가의 친척들을 수입과 권력이 있는 자리에 많이 임명했는데 자신의 신변과 로마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친인척 외에는 믿지 못하는 세상이었다. 그래도 다른 교황들 보다 족벌주의 비난을 덜 받았는데 콜론나 가문이 오랜 귀족집안으로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교황국가들은 거의 독립 세력이 되어 있었지만 이들의 기강을 잡고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등 강국들과 평화를 유지했다. 로마의 재건 사업을 위해 토스카나 지역의 몇몇 유명한 예술가들을 고용했는데, 로마 르네상스의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한다.

그가 이렇게 노련하게 공의회를 잠재우고 로마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파란만장한 삶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1409년 자신이 모시던 그레고리오 12세에 반대하여 피사 공의회에서 그의 폐위선언에 관여했다. 과도기적으로 연로한 교황을 뽑았는데 그가 자기 욕심을 부리고 족벌주의에 의존하자 반발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 후 대립교황 알렉산데르 5세를 지지했고 그가 서거하자 후계자인 대립교황 요한 23세에게도 충성맹세를 했다. 요한 23세의 여러 개인적인 약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오도네는 그를 지지하고 그의 가문은 특혜를 받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1411년 오도네는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에 의해 파문되었다<위키백과>. 그럼에도 오도네는 대립교황 요한23세의 수행원들과 함께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415년 3월 21일 샤프하우젠으로 요한 23세가 탈출할 때 함께 갔다. 그 후 요한23세를 버리고 콘스탄츠로 돌아와서 대립교황 요한23세의 폐위 선언 과정에 참여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삼국지의 여포처럼 상황에 따라 배신했다. 이렇게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인간의 지혜나 계산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이런 경험이 그를 겸손하고 신중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마르티노 교황에게는 운도 따랐다. 교회개혁 등 많은 숙제를 공의회로 넘겼지만 약속한 공의회가 제대로 열리지 않아 개혁과제를 쉽게 연기할 수 있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5년 후인 1423년 4월 23일 파비아에서 공의회를 개최키로 하였지만, 참석자가 적었고 페스트까지 덮쳤다. 공의회 장소를 이탈리아 중부 시에나로 옮겼으나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우는 다수파와 교황권을 옹호하는 소수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면서 회의가 흐지부지되었다. 결국 파비아-시에나 공의회는 다음 공의회를 7년 후인 1431년 스위스 바젤에서 열기로 하고 11개월 만에 해산했다. 교황은 줄리아노 체사리니 추기경을 공의회 의장으로 임명하는 등 바젤 공의회 개최를 위한 준비를 했지만, 공의회 직전에 서거해서 개최를 보지 못했다.  

마르티노 5세는 로마교황 중심으로 교회를 통합하고 교황청을 안정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묘비명에는 마르티노 교황을 그 시대가 누린 행운으로 칭송하고 있다<교황사전>. 그러나 교회개혁은 이루지 못하고 교황청의 구질서만 회복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교황의 절대 권력이 너무나 빨리 복원되었기 때문이다. 마르티노 교황이 너무 유능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른다. 

공의회를 통한 개혁도 힘을 잃어갔다. 세속군주들은 공의회의 민주적인 개념을 싫어했고, 교황제를 개혁하기 보다는 현상유지를 바랐던 것 같다<한스 큉, 카톨릭의 역사>. 그래서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를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화형에 처했는지 모른다.

1430년 로마의 독일 사절중 한사람은 “로마 교황청이 독일로부터 돈을 갈취하기 위한 장치를 개발하고 있어 울부짖음과 불만이 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본국에 보냈다<문명이야기 5-2>. 종교개혁의 경보로 들린다.

대한민국의 정치상황이 혼란스럽다. 정치인들이 다소 서툴고 유능하지 않은 것은 미래개혁을 위한 신의 선택인지 모른다. 마르티노 5세 교황처럼 너무 유능해서 과거로 쉽게 회귀해도 안 되기 때문이다. 신의 판단은 참으로 오묘하다.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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