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규 전 조달청장

 철인정치는 허구이며, 유토피아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이라고 한다. 하지만 중세 유럽의 천년은 오랜기간 교육과 훈련을 받은 교황들이 군대도 없이 질서를 유지하고 도덕을 고양했다. 이들이 철인 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훌륭한 통치와 재정개혁을 이루어낸 교황으로 요한22세가 있었다.

  그는 1245년 프랑스 카오르에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나 카톨릭 사제가 된 후 정상까지 올라갔다. 카톨릭 교회의 특이한 민주주의 덕분이었다. 아비뇽 유수를 시작한 클레멘스 5세가 죽자, 이태리 출신 교황을 옹립하려는 움직임과 이에 대한 프랑스 민중들의 반발로 2년3개월 동안 교황을 뽑지 못하고 있었다. 일종의 민족주의가 개입하고 있었다. 프랑스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리옹에서 아비뇽의 2번째 교황인 요한22세가 선출되었다. 당시 72세의 고령으로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았으나 90세까지 살며 확고한 열정과 황제같은 의지로 18년이나 다스렸다. 

  그는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의 지도아래 아비뇽 교황청은 대단히 효율적인 관료조직으로 변했고, 재정확충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아비뇽 유수 이후 교황청이 프랑스 국왕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자 영국, 독일 등 프랑스의 경쟁국에서는 헌금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통치에는 돈이 필요하고, 유럽전역에 걸친 큰 조직이 말만으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우선 교회를 물질적으로 구원할 필요가 있었다. 세율을 올리고 원인자・수익자 부담 등 갖가지 이유를 붙여 세원을 확대했다. 

  전임 교황들처럼 성직록을 팔기도 했는데 소문에 따르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고 한다. 너무 열심히 일하다 보니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다. 아마 자신은 떳떳했을 것이다.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았고, 자신의 사치와 허세를 위해 돈을 쓰지는 않았으니까..... 의대를 세우고 아르메니아에 라틴어 대학을 지원하는 등 학문을 후원했다. 동양언어들의 연구를 촉진하고 연금술과 마법연구에도 돈을 지원했다. 그럼에도 그가 죽었을 때 교황청의 재산은 몇 배로 불어 있었다. 

  또 합리적인 종교관을 가졌던 것 같다. 기독교도들을 관대하게 대우한 무슬림 지도자 우즈베크 칸에게 고맙다는 내용의 친서까지 보냈으니..... 신앙심도 깊었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저를 거룩하게 하소서(Anima Christi)’라는 유명한 기도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교황의 권위가 떨어진 시기라 요한22세에 적대적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해 로마에서 1328년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를 옹립했다. 다행히 그는 황제가 로마를 떠나자말자 힘을 잃었고 요한 22세에게 항복했다. 요한 22세는 니콜라오 5세를 처벌하지 않고 아비뇽 교황궁에서 편안히 여생을 지내게 해주며 조용히 사태를 종식시켰다. 정치적 숙적을 죽이거나 과도하게 처벌해서 문제를 키우는 실수를 범하지 않은 것이다.

  프란치스코 영성파와의 갈등은 시시비비를 분명히 가렸지만 이로 인한 후유증은 컸다. 프란치스코회 내부에는 성 프란치스코의 가난한 삶을 엄격히 준수하려는 영성파와 극단적인 고행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수행을 강조하는 수녀원 사이에 오랜 갈등이 있었다. 큰 조직을 움직여야하는 교황입장에서는 당연히 재물이라는 인센티브가 필요했고, 교회가 세속화되어 교황청관료들도 풍족한데 익숙한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소유를 어느 정도 인정하자는 편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프란체스코회 영성파가 반발했고, 돈을 끌어모으고 있는 교황의 모습에서 약점을 발견했다. “예수와 사도들은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는데, 교황청에 돈이 왜 그리 많이 필요하냐?”며 요한22세에게 대들었다. 

  이에 요한 22세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소유여부를 조사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위촉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대신 싸우도록 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위원회는 위촉한 사람의 뜻을 따르는 듯, 전문가들 대다수는 “그리스도의 복음적 생활은 소유물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청빈한 삶을 산다고 해서 아예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라며 영성파의 주장이 교회의 재산소유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의견이라 비판했다. 영성파의 주장은 이단적이라고 선언되었다.

  회의나 정치나 극단적인 주장이 보통 이긴다. 선명성에서 유리하고 논리적으로 단순해서 사람들을 설득하기 좋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과 정치인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극단적인 의견과 적당히 타협하는 경우가 많다. 요한22세도 극단적인 의견을 일부 수용하며 본인도 깨끗한 척 할 수도 있었다. 밀리는 감은 있지만 좀 더 깨끗하게 살아보자며 성직자들의 청렴을 요구해도 된다. 그런 상황에서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으니 대단한 용기다. 마르크스가 잘못되었고, 사유재산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영성파와의 갈등으로 요한 22세는 죽은 후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요한'이라는 교황명도 1958년 요한 23세가 선출되기까지 거의 7백 년 동안 채택되지 않았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 에서도 영성파를 박해하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요한22세의 평판이 더욱 나빠진 것은 갖가지 명목의 세금징수였을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이지만 후임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예술 후원, 사치와 쾌락 등에 요한22세가 불려놓은 재산을 물 쓰듯 해서 재정확충의 의미도 퇴색되었다. 기부금과 헌금으로 얻어낸 돈을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면 좀 더 평판이 나아졌을 텐데...... 
 또 백성들부담을 덜어줄 수 있게 꼭 필요한 만큼만 거두는 量出制入원칙이 지켜져야 했다. 재물을 쌓아놓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아무리 훌륭한 대의명분이 있어도 세금을 좋아하는 백성은 없다. 누구나 빠듯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수장은 돈을 아껴 써야 하고 세금징수를 신중히 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의 몰락도 세금의 과다 부과와 방만한 정부운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요한22세는 아비뇽 유수라는 절박한 현실 속에서 교황청의 권위와 위신을 보존하기 위해 돈을 모았고 신앙의 집을 이어가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교황은 그 사회를 영적으로 충만하게 해야 할 더 큰 의무가 있다. 교황청에 청빈한 기풍을 불어넣어 도덕적인 본보기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김상규 전 조달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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