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육군특별지원병제 시행...국민학교 나온 중농층 차남들의 치열한 경쟁 거친 입대
1943년 학도지원병제도 시행...대학교육 받은 조선인 최고엘리트들의 입대와 그 이후 엇갈린 증언들
"‘학도지원’을 ‘독립운동’으로 격상하겠다는 건 문제다"

『반일 종족주의』 공동저자인 정안기 고려대학교 전 연구교수가 펜 앤드 마이크 라이브 초대석을 찾았다. 이 자리는 펜 앤드 마이크가 기획해 매주 진행하고 있는 '『반일 종족주의』 저자와 만나다' 시리즈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정 전 교수는 일제시대 지원병 제도가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만들어졌는지에 관해 군더더기 없이 설명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날의 징병제와 달리 지원제였고 조선인들이 재수 지원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호응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늘 제 위치에서 최선을 찾는다...치열한 경쟁으로 선발돼

지금 우리는 상대방을 향해 ‘친일(親日)’, ‘매국노(賣國奴)’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을 정도로 거리낌없이 자유롭게 살지만 일제시대 조선인들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2등 국민’이었고 ‘망국노(亡國奴)’에 지나지 않았다.

1938년 4월 일본 정부는 육군특별지원병제를 시행했다. 이에 대해 정 전 교수는 “어떤 정치적 목표가 통치부와 피통치부 간에 맞아떨어졌던 것”이라며 대담을 시작했다. 1910년 한일병합으로 조선은 제국일본의 일개 지방으로 편입돼 조선인은 일본인과 다른 차별적 제도를 받아들여야 했다. 조선인은 식민지에서 참정권 없는 ‘2등 국민’으로 살며 일본에 순응해야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인들은 병역의무를 통해 참정권을 얻고자 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 병역법 적용에서 배제됐던 조선인에게 병역을 부여함으로써 식민통치를 완성하고자 했다. 요컨대 일본 통치부와 조선인들의 정치적 목표가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했던 제도가 1938년의 육군특별지원병제였다.

정 전 교수는 “일본 정부가 신체검사, 학과시험, 면접시험이라는 까다로운 절차 모두를 통과한 사람들을 입소시켰다”며 “합격자는 일본인과 차별없이 교육을 거친 뒤 일본군에 배치됐다”고 말했다. 정 전 교수는 “인도는 인도인만의 군대를 만들었는데 일본은 분리하지 않았다”며 세계 식민지 역사상 유례가 없다고 설명했다.

일제 특유의 동화주의 식민통치 이데올로기의 제도적 완성은 조선인의 열렬한 호응, 또는 협력으로 완성됐다. 정 전 교수는 조선인이 먹고살기 위한 호구지책의 일환으로 자원입대했다고 설명한 기존 연구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중산층에 해당할 중농층 차남 이하의 남성들이 60:1 경쟁률을 뚫고 입대했다. 재수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이들은 출세 지향성 강한 중농층 집안 출신들로 의무교육이 아니던 당시에 국민학교까지 졸업한 고급인력이었다.

정 전 교수는 “경쟁률이 60:1로 군 단위에서 2~3명만 간신히 들어갈 정도였으니 합격자는 지역사회에서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 전 교수가 구체적 통계들을 짚어가며 설명하자 시청자들은 “대충 봐도 저 당시 청년 80만 명이 지원했네”,“삼성전자 입사하는 것 보다 어렵다”,“저렇게 구체적 자료를 들이미니 좌파들이 꼬리 내리고 오로지 친일프레임이네”라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조선 최고엘리트들의 출세욕망...학도지원병제도의 탄생과 해방 이후 왜곡

정 전 교수는 1943년 공포된 학도지원병제도가 최고엘리트들인 전문학교와 대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을 우선 밝혔다. 그리고 학도지원이 무조건 강제된 것이 아니었으며 선발절차에 따라 합격, 불합격, 그리고 지원자가 도중에 검사를 회피하는 등의 여러 과정들이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학도지원병들에게 일본군 장교가 될 수 있는 그 당시로선 특혜를 줬다. 이로써 경제적 안정과 입신출세의 지름길을 노린 지원자들이 늘었다. 정 전 교수는 학도지원병제도가 다수의 지원자들이 합격과 불합격 절차에 따라 채용되고자 했던 제도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데 1945년 해방 이후 최고엘리트 출신의 학도병들이 한국사회 중추에서 활약하며 자신들의 학도병 전력에 대해 서로 엇갈린 증언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정 전 교수는 “나는 ‘기억과 망각의 정치사’라고 본다. 가령 신의주에 살던 사람이 왜 하필 학도지원병제도를 통해서 광복군에 가려고 했다는 것이냐”라고 반문했다. 그는 “장준하의 '돌베개'는 사실관계에 있어 모순이 거의 없는데 김준엽의 회고록은 특히 모순 덩어리”라면서도 “흥미로운 점은 학도병 출신들이 자서전 20권 정도를 냈는데 이들 모두를 놓고 봤을 때 장준하와 김준엽의 자서전은 특별하다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강제로 끌려갔다고 회고했으나 장준하와 김준엽은 자발적 입대라 증언했기 때문이다.

정 전 교수는 장준하와 김준엽 때문에 학도병들이 독립운동한 사람으로 둔갑했다는 사실도 언급했다. 행정안전부가 낸 관련 보고서들이 장준하와 김준엽, 이 두 사람의 기억으로 전체 역사를 짜맞췄다는 비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제의 학도지원병에 지원한 목적이 바로 광복군에 가기 위함이라 증언했다고 한다.

정 전 교수는 탈영한 학도병들이 왜 탈영을 했는지에 관한 자료 축적이 된 바 없다며 ‘학도지원’을 ‘독립운동’으로 격상하려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쓴소리를 했다.

공통적으로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은 일제를 미화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이 조선에 선진 제도와 인프라를 구축한 의도가 선량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35년에 이르는 일제시대는 일본인과 조선인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통해 전근대 조선 이후의 어느 시대로 나아간 때다. 이날 정 전 교수는 선악구분이 허무하리만치 당시 조선인들이 보다 더 나은 살 길을 찾아 노력했음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김진기 기자 mybeatle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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