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에 결투가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서양에서는 결투가 다툼을 해결하는 중요한 방법이었다. 모욕당한 사람이 장갑을 벗어 던지면, 상대방이 그 도전을 받아들여 결투가 성립한다. 심판관을 두고 결투를 벌인다. 초기에는 칼로 하였으나 후에는 총으로 많이 하였다.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 사나이들의 결투는 수많은 영화의 주제였다. ‘OK목장의 결투’, ‘하이 눈’과 같은 명화에 관객들이 감동하였다. 악당이 야비한 수단을 쓰기도 하지만, 정의의 편인 주인공이 목숨 걸고 당당하게 결투에 나선다. 정면으로 대결한다. 뒤에서 쏘는 건 사나
대한민국은 세계적 기준에서도 앞서가는 민주사회가 되었다. 조선왕조나 일제통치 시기와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조선왕조 시기에는 반상(班常)의 구분이 뚜렷했다. 일제 통치 시기에 신분제도가 붕괴하였지만, 천인계급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계속되었다. 1950년 6.25 동란의 영향은 매우 컸다. 민족 대이동이 벌어졌고, 그와 함께 반상제도나 천인계급도 사라졌다. 백정(白丁)이라는 계급은 이제 흔적도 없고, 오히려 식품업자로서 부를 쌓을 수 있는 좋은 직업이 되었다. 재인(才人)의 후예들이 현대예술의 총아가 되었고, K-Pop 문화를 전 세
친구들에게 때때로 질문해본다. 대한민국 오늘의 번영을 1960년대 대학생 시절 예상했었느냐고. 그랬다고 답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10년 후 마이카 시대가 온다고 말했을 때 뜬금없는 헛소리라고 비웃었었다. 그 당시 이어령의 수필집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대학생들에게 베스트셀러였다. 책의 요지는 ‘한국인은 무능해서 아무것도 해낼 수 없다’였다. 소위 엽전(葉錢)이라고 자조하는 한국인들은 색깔 감각마저도 없어서 흰옷만 입기 때문에 백의(白衣)민족이라 불렸고, 그래서 일본 순사가 일부러 먹물을 뿌려댔다고
70년간의 바빌론 유수를 마치고 일부 유대인들은 본토로 귀환했지만, 상당수는 자의든 타의든 현지에 남거나 다른 이방 지역으로 흩어졌다. 디아스포라(diaspora)의 원류다. 유럽 도시의 게토(빈민가)에서 억눌려 지내던 유대인은 나치에 의해 더욱 심한 핍박을 받았고, 6백만 명이나 독가스로 집단살해 당하기도 하였다. 지구상의 인류는 기후, 환경, 전쟁과 같은 원인으로 집단적 이동을 해왔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든 땅을 버리고 유랑의 길에 오른 경우도 많았다. 재외동포가 많은 민족으로는 유대인을 꼽지만, 중국의 화교는 5천만
위대한 문자 한글이 577년 전 1446년에 반포되었다. 인류역사상 만들어낸 문자 중 가장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다. 누구나 서너 시간이면 터득할 수 있다. 한국은 해방 후 문맹률이 8할 정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민교육과 한글 보급으로 몇 년 안에 전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국가가 되었다. 총·균·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Gered Diamond)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문자라고 높게 평가하였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 족이 한글을 그들의 문자로 차용하였고, 솔로몬 제도의 과달카날주도 표기문자로 도입했었다. 디지털 시대에는
8월 18일 한미일 3국 정상은 캠프 데이비드 정신·원칙·공약에 합의하였다. NATO가 어느 한 회원국에 대한 침략을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보고 공동 대응하는 체제와 유사한 단합을 다짐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미일 3국 정상은 G-20, APEC, ASEAN, NATO와 같은 다자간 회의에 참석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별도로 회동해왔다. 한국 GDP의 2배 정도 크기의 ASEAN의 정상회담에 참석한 기회를 빌려서 옹색하게 만난다면, 3국 회동의 비중이 무겁다고 할 수 없다. 한미일 3국의 GDP 생산은 전 세계의 32퍼센트를 차지한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된 지 70주년이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정 교섭 경과를 보면서 크게 우려하였다. 공산주의자들과 휴전협정을 체결하자마자 미군이 그냥 철수해버릴까 봐서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전 세계 GDP의 거의 절반을 생산할 정도의 초강대국이 되었다. 영국의 패권을 평화적으로 이어받았다. 그런데도 소련의 공산 세력을 막아낼 능력을 자신하지는 않았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국무장관이 외교정책 연설에서 극동 방위선에 일본과 필리핀까지 포함시켰다. 전략적 가치가 덜하다고 본 한
영국의 명문고교 이튼(Eton)스쿨의 안내서를 읽은 적이 있다. : ‘1440년 창립된 이 학교가 19명의 총리를 비롯한 정치가, 철학가, 문호, 과학자, 노벨상 수상자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고 설명한 후, '지난 백 년 동안 보어(Boa)전쟁과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졸업생 숫자가 129명, 1,157명, 748명으로서 무려 ‘2세대 분에 해당하는 졸업생’을 조국에 바쳤다.’ 영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본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용감하게 달려가서 희생했다는 자긍
196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동창들에게 질문하곤 한다. “우리가 반정부 데모하던 그 시절에 대한민국이 오늘과 같이 번영할 것으로 예상했었냐?” 그랬다는 답변은 하나도 없다. 최근 동해안 작은 어촌 거진항을 들렸을 때 공중화장실에 화장지가 잘 비치된 걸 보고 새삼 놀랐다. 중국 같은 나라는 물론이고, 유럽의 많은 선진국에서도 공중화장실은 사용료를 받을뿐더러, 한국만큼 깨끗하지도 않다. 한국의 소득수준이 선진국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국민의 의식 수준도 선진화되었다는 좋은 예다. 지지난 일요일 광화문에서 출발해서 한강변을 달리는 하프 마라
윤석열 대통령은 3월 6일 일제징용 배상문제를 제3자 변제방식으로 해결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5년여 교착상태에 빠져있던 한일관계에 숨통을 트는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칼로 자른 것에 비견할 만하다.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걸음이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물론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과 유럽연합 국가 수뇌들, 그리고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까지도 윤 대통령의 대승적 조치에 대해 입을 모아 환영의 뜻을 표했다. 한국의 국력과 국격이 높아졌고, 그만큼 국제사회의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2018년 애국자라고 자칭하는
대한민국의 오늘의 번영은 기적이었다. 대부분 젊은이는 태어나서부터 가난을 겪지 않았기에, 원래부터 한국이 잘 살았다고 착각하기 쉽다. 586 운동권 출신들은 특히 1980년대 폭발적으로 팽창하던 시기라서 취업 문제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오해하기 쉽다. 그들은 반정부운동하느라 공부를 안 했어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었다. 한데 민주화 투사라고 자랑하면서도 북한 정권의 독재에는 외면해왔다. 북한의 인권문제도 모르는 체한다. 그래서 종북주사파라고 한다. 핵심 그룹은 아직도 전향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대한민국은 공산
한국 사회가 발전한 것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빠르게 여성의 지위도 상승하였다.되돌아보면 5백 년 조선시대는 주자학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남성 사대부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열악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와 남녀7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 상징적 키워드였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흔적은 아직 남아 있다.한국의 근대화 이전 농촌 인구는 7할 전후였다. 변변한 산업이 없으니 농업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일자리가 없는 청년 실업자(失業者)들이 고향 농촌에 내려가서 지냈다. 고등 룸 펜이라 불렀다. 꿈도 없이 빈
계묘(癸卯)년 새해가 밝았다.78년 전 우리 어버이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렸지만, 이밥에 고깃국의 꿈이 절실하였다. 해방 후 5년 만에 6.25남침으로 또다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수백만의 인명피해를 당했고, 천만 이산가족이 생겼다. 전 국토는 폐허가 되었다. 민족 대이동과 함께 달동네 판잣집들이 일상의 모습이었다.3년 이상을 끌던 대치 전선은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체결로 멈췄다. 침략군을 척결하지 못한 전쟁이었기에 참전했던 미국 군인들은 귀국 후 시가행진도 벌이지 못하고 조용히 귀향하였다. 20세기 세번째 세계대전이라고 할
프란시스 후쿠야마 교수는 그의 저서 ‘신뢰(Trust)’에서 지구상의 최대강국 미국은 신뢰가 시스템으로서 작동하는 사회라고 하였다. 일본도 비슷한 선진사회로 보았다. 그러나 한국이나 중국은 아직 신뢰 사회라기보다는 혈연, 지연이 더 중시되는 사회라고 평가하였다.15세기에 시작한 대항해 시대에 서유럽 문명권의 눈에는 조선의 존재가 들어오지 않았다. 마젤란 함대가 1521년 동아시아에 도달한 이후 유럽의 범선들이 필리핀, 중국, 일본에 도착했어도 반 폐쇄해 안에 있던 조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은 은자의 나라(Hermit Kin
러시아의 바이칼호는 한국인의 조상이 몽골 4촌들과 갈라졌다는 곳이다.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앙가라 강으로 떨어진다. 호수의 출구엔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츠크츠 시가 조성되어 있다.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에게 입헌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을 주도했던 청년 장교(데카브리스트)들이 시베리아로 유배형을 받고 와서 건설한 도시다. 그 부인들이 허허벌판의 유형지로 남편을 따라왔던 순애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대서사였다.현대에 들어와 유명한 것은 호수 출구를 가로막아 건설한 4㎞ 길이의 사력(砂礫)댐이다. 스탈
지난 18일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장례식이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던 여왕이었기에 전 영국인의 애도 속에서 2천여 명의 세계 지도자들이 참석하였다. 당연히 윤석열 대통령 내외도 참석하여 한국민을 대표하여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세계평화에 대한 공헌을 기리는 예의였고, 한국과 영국 간의 우호 관계를 다짐하는 노력이었으며, 또한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과 어울려 국익을 선양하는 외교활동이었다. 장례식 전날 저녁에는 여왕의 장남 찰스 3세가 주최한 리셉션에 김건희 여사와 함께 참석하여 유족들과
한·베트남 수교 30년 1960년대 베트남전쟁에서 서로 싸웠던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12월 22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한국 북방외교의 종착점이었다. 양국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베트남 지도층은 ‘과거에 연연해서 미래를 포기할 수 없다’는 방향을 정했고, 한국도 성의를 다했다. 양국은 21세기에 들어서 동아시아 질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견 강국이 되었다.한·베트남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 1997년부터 3년간 베트남에서 한국을 대표했던 조원일 대사였다. 일을 너무 많이 벌
2019년 11월 7일 판문점에서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저항하는 귀순 어부 2명을 강제로 북한 땅으로 돌려보낸 것은 용서 못 할 범죄다. 관여했던 안보실장이나 통일부 장관이 그들의 귀순 의사에 진정성이 없었다고 거짓 해명했다. 귀순 어부들을 “희대의 엽기적 살인마들”이라고 했다. 죽음의 구덩이로 처넣은 문재인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야말로 “희대의 엽기적 살인마들”이다. 북한과 살인을 공모한 흉악범이다. 7월 25일 오후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탈북민 대표들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문재인 정권이 벼랑 끝
1860년 전후 피폐한 조선 땅에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국경을 넘은 소박한 백성들이 연해주에 정착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하였다. 그들을 ‘카레이스키- 고려인’이라 불렀다. 구한말 영국의 여성 여행가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가 조선을 여행하고 연해주에 건너가서 부지런한 고려인들을 보고 나서, 같은 조선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느냐고 기술하였다.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만주 본격 진출로 러시아와 각축이 심해졌다. 이미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연해주는 조선의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상설,
나는 감사한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게 깊이 감사한다. 기본적 자유와 인권을 우리 헌법에 명확하게 새겨넣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와 일본 식민 통치 기간 일반 백성이 경험하지 못했던 인류의 보편적 가치, ‘자유와 인권’을 헌법의 기본으로 삼았다. 유진오 기초위원의 작업으로 가장 선진적이라는 바이마르 헌법 체계를 들여왔다.이승만은 국제정치의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신봉하는 지도자였다. 고령으로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여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려는 선거 부정을 막지 못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다. 4.19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