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영국의 명문고교 이튼(Eton)스쿨의 안내서를 읽은 적이 있다. : ‘1440년 창립된 이 학교가 19명의 총리를 비롯한 정치가, 철학가, 문호, 과학자, 노벨상 수상자 등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고 설명한 후, '지난 백 년 동안 보어(Boa)전쟁과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졸업생 숫자가 129명, 1,157명, 748명으로서 무려 ‘2세대 분에 해당하는 졸업생’을 조국에 바쳤다.’ 영국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표본이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용감하게 달려가서 희생했다는 자긍심이 담겨 있다. 그러기에 그들의 발언이나 행동이 높은 사회적 영향력을 갖는다. 

  미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영화는 감동적이다. 미국영화와 소설들은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과 소방대원 같은 인물들을 영웅으로 높게 대우한다. 국가 보훈에 정성을 다한다. 아메리카 신대륙에 모인 다양한 인종의 국민이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국기와 국가를 가슴에 새기면서 애국심을 키운다.

  우리는 1948년 자유민주주의의 자랑스러운 국가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식민 통치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열등의식에 사로잡혔었다. 6·25동란을 극복하고, 경제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달성하였으나, 청년들이 취업전선에서 좌절할 때는 ‘헬(hell)조선’이라고 자기 비하에 빠지기도 하였다. 이제 BTS, 블랙핑크가 K-문화를 전 세계에 펼치고, 과학자들은 세계 7번째로 우주위성을 발사하고, 종합국력이 세계 6번째로 부상하였다. 원조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가 되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할 수 있다. 고구려가 만주벌에서 당(唐) 제국과 자웅을 겨루던 때를 제외하면, 5천 년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융성한 시기다. 

  그런데도 우리 내면에는 그림자가 남아있다. 상호신뢰가 약하다. 그렇게 비난하는 대상인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 사회는 사기·횡령 같은 신용 범죄가 수십 배나 많다. 정직하지 않은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이 신용사회로 불리는 데 한국은 그러하지 못하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기에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각양각색의 신용 범죄가 범람하는 것은 수치심이 실종했기 때문이 아닌가? 염치(廉恥)를 모르는 사회가 된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원인은 ‘국가’라는 의식이 약한 데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민족을 기초로 하는 국가 체제는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전후하여 형성되었다. 1차대전 전후에 많은 민족이 독립을 추구하여 민족자결주의가 확산하였다. 유럽의 근대화를 먼저 도입한 일본이 '야마토(大和) 민족 최고'라는 신화를 만들어 제국주의적 침략을 추구했다. 일본의 식민 통치에 대해 저항하는 우리도 민족적 자각이 일어났다.

  그 이전에는 한반도에 동일 민족이라고 하기에는 끈끈한 유대감이 약했던 게 아닌가? 성군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도 여자 노비(奴婢)의 자식은 노비로 삼는 소위 종모법(從母法)을 시행하여 전 주민의 4할 이상이 노비였다고 한다. 패전국 포로를 노예로 삼던 외국의 사례와 비교하면 동족을 노예로 삼았으니, 조선은 내부적 갈등 요인이 그만큼 큰 셈이다. 외부의 적이 침공해와도, 함께 대항할 응집력에 틈이 생기기 쉽다. 임진왜란 당시 국왕과 양반들이 일찍이 한양을 버리고 피난 가 버렸고, 일반 백성들은 왜군에게 성문을 활짝 열어주었다고 한다. 국권이 일본에 넘어갈 때도 왕실은 자신들의 영화를 위해 내탕금을 많이 확보하려는데 정신을 팔려서 나라의 운명이나 민생은 안중에 없었다. 왕실과 대신 중에 목숨 걸고 저항하는 인물이 나왔어야 하지 않은가? 

  조선 말기에는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극에 달했다. 죄가 없어도 원님 앞에 끌려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으름장에 재산을 갖다 바쳐야 하는 부조리가 횡행하였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관념에 사로잡혀서 산업생산에 힘쓰지 않았다. 국력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침략에 대응할 힘이 달렸다.

  6.25 전쟁 기간에도 많은 유력한 집안의 자제가 병역을 면하기 위해 해외로 도피하였다. 영국이나 미국의 젊은 청년들의 호국 열정, 그리고 이스라엘 청년들이 해외에서 공부하다가도 전선으로 뛰어가는 애국심과는 비교된다. 영·미 젊은이의 가슴에는 국가 관념이 확고한 데 비해서 우리는 약했다.

  국가라는 관념, 국가의 품격에 대한 의식이 아직도 빈약하기에 한국 사회에는 개인 이익을 우선 추구하려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다. 떼쓰기, 앵벌이 같은 후진적 행태가 지속된다. 국민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기에 말단 행정관료나 교통경찰에게 건네던 급행료와 같은 단순 부정은 사라졌다. 그러나 복합민원이나 대규모 사업에는 부조리나 부정이 많이 남아있다. 악덕 정치인들이 가세하면 천문학적인 규모로 나라가 뒤흔들린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후진적이라는 정치영역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충원 과정부터 권력자가 지명하는 하향식 공천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인지 일반 국민 수준보다 못한 저질의 인물들이 수두룩하다. 평소 지역 사회에 봉사하는 성실한 인물을 의회에 진출시키는 선진국과 같이 되려면 갈 길이 멀다. 그러니 이성과 논리를 일탈한 억지 논쟁이나 개인적 이익을 위한 특권남용을 일삼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김남국의 가난 코스프레 뒤에 숨긴 코인 왕국, 조국 부부의 거짓말 산, 이재명의 심각한 언행 불일치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공정하고 투명해야 할 선거관리위원회 간부들의 ‘아빠 찬스’를 악용하는 몰염치한 짓도 빼놓을 수 없다. 위안부 할머니를 돌본다는 구실로 앵벌이 식 반일 집회를 끝없이 이어가면서 보상금을 횡령하던 윤미향의 몰염치도 이 부류에 속한다. 국가 의식이 허약한 데서 빚어지는 창피한 일이다. 국민을 실망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사기(士氣)를 크게 떨어뜨린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제사회에서 단시간 안에 국가 위상을 높였다. 일제하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대한 대위변제의 결단을 내림으로써 한일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고, 한미일 협력을 정상궤도에 올렸다. 문재인 시기 북한 정권에 대한 제재를 풀어달라고 서유럽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비웃음을 샀고, 중국방문 시 혼밥 홀대받던 장면과 크게 대비된다.

 윤 대통령은 국내적으로도 바른길을 택하고 있다. 다양한 소리를 포용하고 다양성을 보장하는 통합의 길이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의 국가를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세력과 정면 대결을 피하지 않는다.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들을 적극 검거하고, 떼쓰기와 불법 폭력을 일삼는 민노총 등의 횡포를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민노총의 불법을 방관하던 경찰이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다. 대다수 선량한 국민이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있다. 

  국가이익을 중심에 두는 적극 정책이 국민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운다. 이제 국민 차원에서도 자신감과 자긍심을 적극 키워나갈 때다. 모두가 자랑스러운 나라를 마음에 새기고, 국가가 위기에 빠질 때 앞장서서 뛰쳐 나서야 한다. 

  내일 6월 6일 제68회 현충일 추념식을 국립현충원에서 거행한다. 오늘 국가보훈처는 정부조직법 시행에 따라 ‘국가보훈부’로 승격된다. 박민식 처장이 장관으로 임명된다. 보훈부는 국군 전사자들을 기억하고 가족의 품으로 보내기 위한 대국민 캠페인 ‘끝까지 찾아야 할 121879 태극기’ 등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나라다운 나라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국민의 국가 의식을 고양하고 국론분열을 치유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군인과 애국인사를 높이 선양할 때, 분열된 사회가 통합의 길로 가게 된다. 자유, 평화, 번영에 기여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국제사회의 주역이 되는 길이기도 하다. 

김석우 객원칼럼니스트(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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