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김석우 객원 칼럼니스트

 한·베트남 수교 30년

<한 베트남 수교 30년> 1960년대 베트남전쟁에서 서로 싸웠던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12월 22일 국교를 정상화하였다. 한국 북방외교의 종착점이었다. 양국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베트남 지도층은 ‘과거에 연연해서 미래를 포기할 수 없다’는 방향을 정했고, 한국도 성의를 다했다. 양국은 21세기에 들어서 동아시아 질서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견 강국이 되었다.

한·베트남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대표적 인물 중 한 사람이 1997년부터 3년간 베트남에서 한국을 대표했던 조원일 대사였다. 일을 너무 많이 벌인다고 알려졌지만, 조 대사는 큰 그림을 가지고 베트남의 친구로서 각계각층 인사들과 바쁘게 만나서 베트남의 발전전략을 숙의하였다. 도무오이 최고지도자와도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86년 도이모이(Doi Moi) 실용주의 개혁·개방 정책을 표방한 베트남은 2년 만에 농업생산을 끌어올려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쌀 수출국이 되었다. 1995년 미국과 관계를 정상화하였다. 하지만, 무역협정을 체결하는 문제가 주요 현안이었다. 무역협정이 없으니 베트남에서 미국에 수출하려면 50% 이상의 고율 관세를 내야 했다. 수출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미국의 막강한 힘 때문에 베트남 경제가 낭패를 볼까 봐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베트남 사회 안에서 압도적 지위에 있던 베트남 공산당과 군부가 과도한 시장개방이 해로울 것이라고 겁을 내서 미국과의 무역협정 체결에 반대하였다. 키신저와의 1973년 파리협상으로 유명한 여성 정치인 웬티빈 부통령과 웬만컴 외무장관이 조원일 대사에게 도무오이 공산당 서기장을 설득해 주기를 바랐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최고지도자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가 의견을 밝히기 전에는 밑으로부터의 정책 건의는 금기사항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가 좋지 않으면 ‘책임’져야 한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중관계 정상화 과정에서도 최고지도자 덩 샤오핑의 지침이 결정적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1985년 3월 한국 해안으로 표류해온 중국 어뢰정 문제를 해결한 다음 달 4월 덩 샤오핑 최고지도자가 외교일꾼들에게 긍정적 지침을 주었다. 곧이어 86년 아세안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에 중국 대표단이 대거 참가하였고, 한중수교로 이어졌다. 최고지도자의 지침이 나오기 전에는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조원일 대사는 도무오이 서기장에게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무역 입국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으며, 40년간 한국의 사정을 이해하는 미국의 협력이 가장 중요한 성공 요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미국이 무역협정을 체결하더라도 난처한 요구로 베트남 경제를 흔들기보다는 기다려가면서 상호 통상을 발전시킬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 대담 후 베트남의 당과 군이 반대하던 뜻을 꺾어서 2000년 미·베트남 무역협정 교섭이 재개되었다. 2001년 말에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 결과 선도적으로 베트남에 투자한 후 미국 진출을 준비하던 한국 기업에 큰 기회가 왔다. 베트남 상품의 대미 수출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그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부품이 한국에서 베트남으로 물밀듯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는 베트남도 급속한 수출증대와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양국 간 공동번영이 꽃을 피웠다. 2000년에 100억 달러에 못 미치던 베트남의 수출 규모는 미·베트남 무역협정 체결 후 급격히 늘어나 2021년에는 3,300억 달러로 폭증하여 베트남의 산업사회진입(take-off)이 실현되었다.

<한 베트남 유대의 특이한 전개> 베트남은 중국과 미국에 이어 한국의 세번 째 수출대상국가로 급부상했다. 인구 1억 명의 베트남이 14억과 3억 명의 나라들을 따라가는 큰 수출시장이 된 것이다. 일본 시장보다도 2배나 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닌가? 양국 간 2021년도 무역액은 800억 달러로서 총인구 6억 7천만 명의 아세안 10개국과 한국의 무역총액 1,765억 달러 중 46%를 차지한다.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와 보다도 많다.

베트남에 대한 투자 총액도 2021년 말 현재 747억 달러로 일본보다 앞선 1위 국이다. 삼성, 현대, 롯데, LG, 포스코, 두산 등 주요 기업이 적극적으로 진출하였고, 그 계열사와 봉제, 신발 등 중소기업들도 대거 베트남에 진출하였다. 8천 개의 한국 기업이 160만 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삼성전자의 베트남 공장은 16만 명 인력을 고용하고 있고, 수출액은 베트남 전체의 24%를 차지한다.

베트남의 높은 교육 수준과 손재주, 그리고 근면성이 한국의 자본·기술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내고 있다. 베트남에 투자한 한국 기업의 성공률이 94%에 달하여 세계적 기록을 세웠다. 중국에 투자한 한국 기업의 성공률은 절반을 넘지 못한다. 또한 한국 기업이 한국 내에서 투자하여도 대베트남 투자 성공률에는 훨씬 미치지 못한다.

베트남은 인구 구조상 청년 비중이 매우 높은 젊은 국가로서 발전 가능성이 큰 데다가 미래 지향적인 사고로 한국과의 협력에 특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한국 기업에 취업하면 영어를 쓰는 다른 기업에 비해 두 배 정도의 보수를 받는다. 따라서 52개 베트남 대학에 개설된 한국어 강좌에 1.7만 명이 등록하여 명실공히 제2외국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으로 시집온 6.5만 명의 여성과 양국 간 유학생도 양국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힘이 되었다. 한국에서 공부하는 아세안 전체 유학생 7.3만 명 중 91%에 해당하는 6.6만 명이 베트남 출신이다.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일고 있는 한류 확산의 교두보가 되었다. 한국인의 아세안 여행자가 2019년 1천만 명인데 베트남에만 430만 명이 방문하였다. 한·베트남 양국은 그렇게 유별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발전시켰다. 가히 찰떡궁합이라 할 수 있다.

<한때의 긴장 조성과 극복> 그러나 한때 심각한 위기 국면도 있었다. 초기 베트남에 진출한 일부 중소기업의 한국 직원들이 베트남인의 자긍심과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밀어붙이는 바람에 노사관계에 긴장이 조성되었다. 많은 베트남 근로자들이 전근대적 농촌에서 나와서 한국 공장에 취업하는 과정에서 심한 언어폭력에 인내심의 한계를 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긴장 관계는 정부와 노동계의 간부들까지 공유할 정도로 폭발 직전이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조원일 대사가 방관하지 않고 즉각 한국 기업들에 경종을 울렸다. 베트남인들이 천 년 이상 중국의 수십만 침략군을 여러 번 패퇴시켰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여 혹시라도 능멸당하면 무자비하게 반격해서 재발을 막으려는 성향이 있다는 점을 이해시켰다. 베트남의 고유문화 풍습을 배우면서 그들과 인간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도록 독려하였다. 터질 뻔했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 것이다. 베트남 근로자들도 무시당한다는 감정을 지우게 되었다. 베트남 노동 당국도 인내심을 가지고 사태 악화를 막아주었다. 이는 한국 투자기업에서 노사관계가 폭발할 경우, 제3국의 기업들이 투자를 망설일 것을 고려한 것이었다.

한국 대사관은 공공외교에 더욱 특별한 신경을 썼다. 베트남 참전 당시 한국군이 주둔했던 중부지역에는 ODA 사업으로 학교와 고아원, 의료시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였다. 1997년부터는 한국 성형외과 의사회의 도움으로 언청이 수술을 해마다 벌이는 등 민심을 얻는 노력도 기울였다. 다시 양국관계는 공고하게 되었다.

<한 베트남 관계 이간질> 그런데 최근 한·베트남 관계를 이간시키려는 매우 기이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인적·물적 교류가 늘어나면 사소한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우한발 코로나 발생 초기 베트남 당국이 긴장하여 한국 항공기의 입국을 거부한 직후 몇 개의 유튜브 채널이 ‘베트남이 한국을 배신했다’라든가 박항서 축구 감독이 푸대접받고 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메시지를 철자도 틀린 채로 마구 올렸다. 반복적으로 유포시킬 때는 그 배경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정치 경제나 문화 연예 분야에서도 조회 수를 조작하거나 불법적으로 댓글을 싣는 사례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특히,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문재인 후보의 인기를 올리고 안철수 후보를 낙마시키기 위해 불법적으로 여론조작을 했던 드루킹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유튜브 작성이 실명제가 아니므로 누가 악의적인 활동을 하는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시진핑의 중국은 대내적으로는 당서기장 3선 영구집권을 추구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조공체제의 현대판 복원을 꿈꾸고 있다. 중국몽을 실현하기 위해 강온 양면의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손자병법에 통달한 책략가들이 어떤 수단을 쓰는지 주변국의 경계심도 덩달아 고조되고 있다. 크게 보면, 중국은 경제적 차원에서 외국자본의 이탈, 특히 베트남으로의 이전을 막을 필요가 있다. 또한, 전략적 관점에서 주변국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을 잠재울 필요도 있다. 필요하면 해외에 나간 중국인들을 동원하기도 한다. 소위 인민외교라는 방식으로.

한국에 체류하는 200만 명 외국인 중 80만 명이 중국 교포다. 한국 사회에 적응해서 영주권을 가지게 되면 자유 시민으로서 권리 의무를 당연히 누려야 한다. 그러나 당의 통제하에 움직인다면 문제는 다르다. 중국 국적 보유 조선족이나 북한의 영향을 받는 댓글부대의 동향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1% 미만의 근소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한국선거에서 외국의 통제를 받는 동포들이 특정 세력을 지지하게 된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동이와 남만의 현대판 유대와 결속> 5천 년 역사에서 중국을 견제하는 주요변방국은 조선과 베트남이었다. 그러나 지리적 거리 때문에 상호 연대는 미미하였다. 전 세계가 하나가 되는 현대사회에서는 연대 결속에 힘이 실린다. 동이(東夷)와 남만(南蠻)의 현대판 연대는 그 위력이 크다. 동아시아의 두 중견 강국이 힘을 합하면 중국몽의 방향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것은 힘이 아니라 도덕과 규범이 통용되는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고 공동번영을 이루어나가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김석우 객원칼럼니스트(북한인권시민연합 이사장, 전 통일원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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