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탐구]스코틀랜드 울리는 엘리자베스 2세, 죽어서도 연합왕국 지키는 수호신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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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는 왜 스코틀랜드에서 서거했을까. '연합왕국' 영국의 역사와 엘리자베스 2세의 스코틀랜드와의 인연을 알면 더 재밌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단 평가다. [사진= 페이지 식스]
엘리자베스 2세는 왜 스코틀랜드에서 서거했을까. '연합왕국' 영국의 역사와 엘리자베스 2세의 스코틀랜드와의 인연을 알면 더 재밌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단 평가다. 엘리자베스 2세가 생전 스코틀랜드 밸모럴 성에서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공과 시간을 보내는 모습. [사진= 페이지 식스]

70년이 넘는 재위기간 동안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는 원칙 아래 안으로는 연합왕국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영연방의 존속을 위해 노력했던 엘리자베스 2세가 현지시간 8일 사망한 지역은 영국의 핵심 잉글랜드가 아닌 북부의 스코틀랜드였다. 여왕이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곳은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Balmoral Castle). 엘리자베스 2세는 왜 잉글랜드가 아닌 스코틀랜드에서 최후를 맞았을까.

엘리자베스 2세가 단지 영국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알려진 밸모럴 성에 피서를 갔다가 때마침 찾아온 건강 악화로 서거했다고 보는 것은 '수박 겉 핥기식' 이해일 수 있다. 영국이 연합왕국이라는 사실, 스코틀랜드의 독립 여론이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엘리자베스 2세가 왜 생의 마지막을 스코틀랜드에서 보냈는지에 대한 단서를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켈트족의 땅이었던 브리튼 섬...게르만족 침략에 따른 민족 판도 변화가 왕국 분할 성립으로 이어져

'영국(英國)'의 정식 명칭은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이다. 좀 더 풀어서 쓰자면 '대(大) 브리튼 섬과 북아일랜드의 연합왕국'이다. 여기선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편입된 북아일랜드를 제외하고 '대 브리튼 섬'을 볼 필요가 있다. 

'브리튼'이라는 이름은 고대 로마 시대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유래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몸에 대청(大靑, woad) 물감으로 문신이나 그림을 새기곤 했던 원주민 켈트족을 '몸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란 뜻의 그리스어 'Prettanike'로 불렀는데, 이 단어가 라틴어 '브리타니아'가 됐단 것. 자연스럽게도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브리튼 인(人)'으로 불렸는데, 곧 켈트족을 의미했다. 켈트족은 섬을 침략해온 앵글족, 작센족 등 게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차지함에 따라 북쪽의 스코틀랜드, 서쪽의 웨일스, 아일랜드 섬으로 차츰 몰려났지만, 그 후에도 브리타니아, 브리튼 섬이란 이름은 남게 됐다.

이러한 민족적 차이가 그레이트 브리튼 섬에 3개 국가가 생겨나는 배경이 됐다. 소위 '앵글로색슨'이라 불리는 게르만족이 주를 이루는 잉글랜드, 스콧족·픽트족으로 대표되는 켈트족의 나라인 스코틀랜드와 그 형제 민족들로 이뤄진 웨일스. 이 중 영국은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으로 이뤄진 '연합왕국'이다.

원래 영국 섬의 원주민은 켈트족이었다. 이들은 온몸에 '대청'으로 만든 푸른 물감을 발랐는데, 여기에서 '브리타니아', '브리튼'이란 이름이 생겨났단 분석이다.  켈트족 전사를 묘사한 미니어처 [사진= Dakka Dakka]
원래 영국 섬의 원주민은 켈트족이었다. 이들은 온몸에 '대청'으로 만든 푸른 물감을 발랐는데, 여기에서 '브리타니아', '브리튼'이란 이름이 생겨났단 분석이다. 켈트족 전사를 묘사한 미니어처 [사진= Dakka Dakka]

 

'연합왕국'은 동양권엔 생소한 개념...합스부르크 가문은 왕가간 통혼을 통해 제국으로 성장해

'동군연합(同君聯合)'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연합왕국'은 한 왕이 왕위계승권을 가진 다른 한 나라 또는 복수의 여러 나라의 왕을 겸하는 것으로, 역사상 이런 적이 거의 없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인에겐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개념이다. 이는 각국 왕족간 통혼(通婚)이 이뤄진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국가형태다. 예를 들어 프랑스 왕국의 공주가 잉글랜드 왕국의 왕에게 시집을 가면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 왕의 장인이 된다. 

동양의 경우 몽골제국의 부마국이었던 고려를 생각해본다면 잉글랜드 왕국의 위상이 프랑스 왕국보다 떨어져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볼 순 없었다. 왜냐하면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 왕국의 사위가 됨과 동시에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기 때문. 특히 프랑스 왕에게 적자(嫡子)가 없을 경우 자칫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 왕국을 전쟁없이 통째로 '꿀꺽'할 수도 있다.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 사이의 백년전쟁(1337-1453)은 바로 이러한 왕위계승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다.

이러한 왕가간 통혼을 가장 잘 이용한 유럽의 가문이 바로 합스부르크 가문이다. 다른 유럽의 왕국들은 한 치의 영토라도 넓히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통혼을 할 때마다 상대 왕가의 후계자가 없어 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 결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결혼을 통한 왕국 '인수합병'으로 대영제국보다도 앞서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최전성기였던 카를 5세(1500-1558) 시기 합스부르크 제국은 스페인, 네덜란드·벨기에, 이탈리아, 독일 각 공국 등 유럽의 알짜배기 영토를 보유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조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Bella gerant alii, tu felix Austria, Nube)'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단 평가다.

베른하르트가 그린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가족'. 합스부르크 가문은 '통혼'을 통해 유럽 각국의 영지를 야금야금 차지했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란 합스부르크의 가문 신조는 유명하다. 다만 나중엔 지나친 근친상간으로 주걱턱이 보편화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베른하르트가 그린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가족'. 합스부르크 가문은 '통혼'을 통해 유럽 각국의 영지를 야금야금 차지했다. '다른 이들은 전쟁을 하게 두어라, 너 행복한 오스트리아여, 결혼하라'란 합스부르크의 가문 신조는 유명하다. 다만 나중엔 지나친 근친상간으로 주걱턱이 보편화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동군연합'이었던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결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하나돼

영국 역시 '동군연합', '연합왕국'의 좋은 예다. 본디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웨일스 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브리튼 섬은 웨일스 공국이 1301년 군사적으로 잉글랜드에 합병되면서 남북국 형세가 됐다. 잉글랜드인이 보기에 '야만인 켈트족'인 스코틀랜드가 북쪽에, 스코틀랜드인이 보기에 고향 땅을 무력으로 점거한 '야만인 게르만족'인 잉글랜드가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던 것. 이는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해 튜더 왕조가 끊기게 되자, 그녀와 6촌 관계였던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스튜어트 왕조'의 개창자로서 잉글랜드 왕국의 왕 제임스 1세가 됐다. 아울러 이것이야말로 '연합왕국' 영국의 탄생이 되는 사건이었다. 그 후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은 찰스 1세 처형,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국 시기를 제외하고는 '동군연합'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다가 앤 여왕 치세였던 1707년 '연합법(Acts of Union)'을 통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완전히 하나가 됐다.

스코틀랜드가 인구·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잉글랜드와 상대가 되진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연합왕국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기여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특히 인물 면에서 그러한데,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다수 배출함으로써 영국의 사상적 발전 및 '산업혁명'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것. 철학자 데이비드 흄, '국부론'으로 유명한 애덤 스미스, 증기기관의 발명자 제임스 와트,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등 수많은 역사적 위인들이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와 하나가 되긴 했지만, 스코틀랜드인들은 '영국인'으로 불릴 순 있지만 '잉글랜드인'으로 불리는 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즉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는 다른 별개의 정체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의식이 스코틀랜드인들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이러한 의식이야말로 스코틀랜드 분리주의·독립운동의 시발점이며 '연합왕국' 영국에겐 불안요소라 할 수 있다. 

 

엘리자베스 2세에게 스코틀랜드는 어떤 의미인가

300년 넘게 내려온 연합왕국이 자기 대에 다시 쪼개지는 것을 반기는 왕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특히 엘리자베스 2세에겐 더 그러했다.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의 급작스러운 선양으로 영국 왕이 된 조지 6세는 제2차 세계대전 및 인도의 독립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과로를 흡연으로 버티다 폐암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 2세는 식민지들이 하나 둘씩 떨어져나가며 대영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을 직접 목격했다. 거대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제국이 해체되는 것을 막을 순 없을지라도 본국의 '연합왕국' 체제마저 붕괴되는 것은 막아야 했던 것.

스코틀랜드 독립 관련해 국민투표가 실시될 때였던 2011년 5월 엘리자베스 2세는 자신이 연합왕국의 마지막 왕이 될까 우려했다. 이와 관련해 영국 왕실은 스코틀랜드 국민투표의 실시 및 분리 독립 가능성을 파악하고자 헌법 전문가들을 보내달라고 총리측에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자칫 영국 왕의 정치중립성에 위배될 수 있는 정치적 행위로도 보일 수 있지만 그만큼 엘리자베스 2세의 우려가 컸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영국의 선데이타임스는 "여왕이 이 문제에 개인 의견을 표명하진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이 이슈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여왕은 자신이 1707년 이후 연합왕국의 마지막 왕이 될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올해 더 타임스 여론조사에 의하면 스코틀랜드의 독립 찬성 여론은 반대 46%보다 낮긴 하지만 38%에 달한다. 영국 왕실로서는 마음을 완전히 놓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스코틀랜드가 '연합왕국'으로서의 영국에 필수적이란 정치적 이유도 있겠지만, 엘리자베스 2세에겐 개인적인 이유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퀸 마더(Queen Mother)'라 불렸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가 스코틀랜드의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엘리자베스 왕비는 생전 조용한 스코틀랜드 '하이랜드(highland)'를 좋아해 자주 찾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가 1952년 남편 조지 6세의 서거 이후 구입한 스코틀랜드의 '메이 성(Castle of Mey)'. 스코틀랜드 출신이기도 했던 엘리자베스 왕비는 살아 생전 '하이랜드'를 매우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메이 성 홍보 사이트
엘리자베스 2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가 1952년 남편 조지 6세의 서거 이후 구입한 스코틀랜드의 '메이 성(Castle of Mey)'. 스코틀랜드 출신이기도 했던 엘리자베스 왕비는 살아 생전 '하이랜드'를 매우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메이 성 홍보 사이트

엘리자베스 2세가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밸모럴 성'도 빼놓을 수 없다. 여왕이 가장 좋아한 곳 중 하나가 밸모럴 성이었단 분석이 영국에서도 나오고 있다. 밸모럴 성은 고조부 앨버트 공이 1852년 개인적으로 구입했기 때문에 정식 국왕령이 아닌 개인의 소유였다. 그래서 그 곳에선 공무를 봐야 한단 의무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 보다 편히 쉴 수 있었던 것. 고조모 빅토리아 여왕이 오전 9시부터 15분간 성 발코니에서 백파이프 연주를 했던 것처럼, 엘리자베스 2세도 백파이프 연주를 했단 목격담도 나오곤 했다.

또한 밸모럴 성은 엘리자베스 2세에게 있어 부군 필립 마운트배튼 공을 비롯한 가족과의 추억이 쌓인 곳이기도 했다. 필립 공은 이 곳에서 가족들과 바비큐 파티를 자주 즐겼으며, 찰스 3세 역시 웨일스 공 시절 5만 에이커에 달하는 밸모럴 성 주변에서 연어 낚시와 사냥을 하곤 했다. 엘리자베스 2세도 이 곳에서 강아지들을 산책시키거나 승마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밸모럴 성은 엘리자베스 2세에겐 가족과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그녀에게 정치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사진=페이지 식스]
스코틀랜드에 위치한 밸모럴 성은 엘리자베스 2세에겐 가족과의 추억이 깃든 소중한 곳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스코틀랜드는 그녀에게 정치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라 할 수 있는 셈이다. [사진=페이지 식스]

이렇듯 엘리자베스 2세에게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매우 중요하고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있어 스코틀랜드는 생전에는 물론이요 사후에도 영국에서 떨어져나가게 내버려둬선 안되는 곳이란 평가다. 밸모럴 성에서 엘리자베스 2세가 세상을 떠난 데엔 거동이 불편해 잉글랜드로 내려가기 힘들어서도 있었겠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사후 추모 분위기가 열렬히 일어나고 동시에 '스코틀랜드를 아꼈던 여왕'이란 이미지를 마지막까지 남길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스코틀랜드인들은 여왕을 기억하는 동안만큼은 감히 독립의 '독'자도 꺼내지 못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에든버러는 완연한 추모 분위기다. 여왕의 운구 행렬을 보기 위해 추모객들이 1만 명 이상 모이고, "하느님, 여왕께 축복을(God bless the Queen)"이란 외침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여왕이 일부러 뜻하진 않았겠지만, 뜻했을 장면일지 모른다. 결국 스코틀랜드가 여왕 추모의 '제1번지'가 된 셈이다. 살아서 연합왕국과 영연방을 성공적으로 지켜낸 엘리자베스 2세가 죽어서도 '연합왕국' 영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는 형국이다.

에든버러의 성 자일스 성당으로 향하는 운구 행렬. 그리고 여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에든버러 시민들. 이는 엘리자베스 2세가 뜻하지 않았지만 뜻했을 장면일지도 모른다. [사진=연합뉴스]
에든버러의 성 자일스 성당으로 향하는 운구 행렬. 그리고 여왕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는 에든버러 시민들. 이는 엘리자베스 2세가 뜻하지 않았지만 뜻했을 장면일지도 모른다. [사진=연합뉴스]

박준규 기자 pjk7000@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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