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동의 대법원 청사 로비에 위치한 '정의의 여신상' 모습. 왼손에는 법전을, 오른속에는 엄정한 판결을 뜻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2024.03.20.(사진=연합뉴스, 일부 편집=조주형 기자)
서울 서초동의 대법원 청사 로비에 위치한 '정의의 여신상' 모습. 왼손에는 법전을, 오른속에는 엄정한 판결을 뜻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2024.03.20.(사진=연합뉴스, 일부 편집=조주형 기자)

우리는 왜 정의(正義)를 추구하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정의를 추구한다. 현대적 사회규범을 대표하는 법의 이념이 정의라는 점은 널리 알려져 있거니와, 신(神)의 이름으로, 윤리나 도덕의 관점에서 정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대한 공감대는 상당히 크다.

물론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해 갈등이 있는 부분들도 있다. 예컨대 사형제의 폐지나 절대적 종신형(=가석방 없는 종신형) 도입, 피의자 신상공개의 확대, 한국형 제시카법 도입 등 최근 논란되었던 것들은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논란과 맞물려 있으며, 찬반이 날카로운 것들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인, 강도, 강간 등 대부분의 범죄행위들에 대해 처벌이 필요하다고 공감하고 있는 것처럼, 무엇이 정의에 부합하고, 또 위배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폭넓은 공감대가 있다. 이러한 공감대에 기초하여 법이 효력을 발하며, 사회질서가 유지된다.

정의에 대한 공감대란 결국 어떤 사회규범이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공감대이며, 어떠한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생명, 신체, 재산 등의 인권에 대한 침해로부터 안전한 사회이어야 하며, 둘째,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사회이어야 하며, 셋째, 사회적 약자에게도 배려할 수 있는 더불어 사는 사회여야 한다.

우리가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삶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풍요롭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조건들을 보장하며, 이를 해치는 행동을 억제하는 것이 곧 정의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는 인권보장과 다르지 않다. 즉, 모든 사람의 인권을 보장하고, 또 인권에 대한 침해를 막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깨지고, 극단적인 대립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최근 이스라엘을 공격했던 하마스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형태의 테러도 정당화할 수 있고, 이에 대해 이스라엘이 하마스 박멸을 앞세워 가자 지구의 민간인들에게 엄청난 인권 유린을 가했던 것도 역시 정당화될 것이다.

정의가 없는 사회,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없는 사회가 된다는 것은 무법천지, 약육강식의 자연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며, 인류의 문명을 수천 년 후퇴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정의, 우리 집단만의 정의를 고집하는 경향이 계속 커지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공직선거법 개정안' 투표가 예정된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의장이 의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2019.12.27(사진=연합뉴스, 일부 편집=조주형 기자)
'공직선거법 개정안' 투표가 예정된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회의장이 의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고 있다. 2019.12.27(사진=연합뉴스, 일부 편집=조주형 기자)

진영 갈등과 정의에 대한 공감대의 약화

민주국가에서 정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의는 사회규범의 지향점이며, 국민적 공감대에 의해 지지받지 못하는 사회규범이 제 기능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공감대가 없는 정의가 진정한 정의인지를 따질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의 정의와 하마스의 정의가 다른 것처럼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극단적으로 분열하고 대립할 경우에는 사실상 정의가 없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대한민국의 극단화된 진영 갈등에 대해서도 유사한 우려가 점점 커지고 있다. 과거의 망국적인 영호남 갈등을 재연하고 있는 보수-진보의 진영 갈등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정의에 대한 공감대가 심각하게 약화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가시적인 위험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 제22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가 서로를 패륜 공천이라고 공격하는 것은 논외로 하더라도 아직 법정 선거운동기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수많은 예비후보들에 의해 쏟아져 나오는 공격적인 언사들은 마치 선거 이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총선에 의해 의원들의 당선이 결정되면, 이들이 국회를 구성하고 4년 임기 동안 대한민국의 입법부를 움직여 나가야 한다. 그런데 국회의 동료이자 의정의 파트너인 여당과 야당의 의원들이 정상적인 경쟁과 갈등, 타협과 조정보다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는 모습을 민주화 초기보다도 최근 10년 사이에 더 많이 보고 있지 않은가?

이제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의, 국회의 정치력과 리더십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가? 여당과 야당, 보수와 진보와 전혀 타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반쪽짜리 정의를 관철하는 다수결 입법이 과연 정의에 대한 공감대를 만들 수 있는가?

서구의 선진국들에서 급진주의 정당에 대해 경계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정당이 생기면, 그 파장이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다. 과거 독일의 나치당처럼 집권하게 될 경우는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국가의 정책형성 및 집행에서 심각한 혼선과 혼란이 초래될 수 있다.

이번 제22대 총선에 대해 유사한 우려가 있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당제의 틀을 깨고 다양한 정당들이 활동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불법적인 주장이나 급진주의 색깔을 가진 개인이나 정당이 국회에 진출하여 활동하게 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복귀 거부하고 거리로 나온 의사들…"탄압하면 국민적 저항" . 2024.03.04.(사진= 연합뉴스TV)
복귀 거부하고 거리로 나온 의사들…"탄압하면 국민적 저항" . 2024.03.04.(사진= 연합뉴스TV)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정의인가?

최근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한편으로는 의사들이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볼모로 잡고 집단행동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높은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전공의가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지를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온정주의를 배제하고 정의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될까?

의사들의 집단행동이 정의로운 것으로 평가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 집단행동의 이유가 정의로운 것이어야 하고, 둘째, 집단행동의 절차와 방식이 정의로운 것이어야 하며, 셋째. 집단행동의 결과 발생하는 환자들의 피해에 대해 충분한 고려를 통해 최악의 사태를 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의사들의 집단행동의 이유는 의대 정원의 확대인데, 대다수 국민들은 이를 정당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고령화 및 지역 의료의 심각한 문제에 따라 의료서비스의 양적⋅질적 확대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끼는 상황에서 의사 수의 증가가 불필요하다는 주장의 설득력도 문제이거나와, 설령 의사들의 주장이 타당하더라도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볼모로 집단행동을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둘째, 공공성을 갖는 직역에서는 집단행동이 제한된다. 공무원이나 교사 등은 물론이고 방위사업체 근로자도 헌법과 법률에 의해 집단행동이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다. 또한, 일반 근로자들의 경우도 파업 등의 단체행동을 위해 엄격한 요건과 절차를 지켜야 한다. 그런데 의사들의 단체행동은 국민 내지 환자와의 소통을 완전히 배제한 가운데 일방적으로 행해짐으로써 의료 직역의 공공성을 무시하고 환자들의 생명과 건강을 팽개친 행동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셋째, 근로자들의 파업에서도 그 업무가 정지되거나 폐지되는 경우 공중의 생명․ 건강 또는 신체의 안전이나 공중의 일상생활을 현저히 위태롭게 하는 업무인 ‘필수유지업무’ 종사자에 대해서는 파업 참여가 제한된다. 그런데 의사들이 응급실, 중환자실 구분 없이 집단행동으로 병원을 떠난다는 것은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한 무책임을 보여줄 뿐이다. 이미 의사들의 집단행동으로 인해 죽어가는 환자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를 외면하는 의사들이 정의롭다고 볼 수 있는가?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직역 이기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계속될 경우에는 의사들 모두가 국민의 존중과 신뢰를 계속 잃게 될 것이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대법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 모습. 2024.03.20(사진=연합뉴스, 일부 편집=조주형 기자)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대법정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 모습. 2024.03.20(사진=연합뉴스, 일부 편집=조주형 기자)

재판 지연과 지연된 정의, 누구를 위한 것인가?

대한민국에서 최근 정의와 관련하여 문제되는 것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항이 재판 지연으로 인한 정의의 훼손이다. 오래전부터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재판 지연이 매우 심각해지고, 그로 인한 국민의 사법 불신이 매우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재판 지연의 가장 큰 원인은 판사 수의 부족에 있다. 그러나 최근에 재판 지연이 눈에 띄게 심각해졌다는 점은 판사 수의 부족만으로 셜명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다시금 세 가지 요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일정 기간 경력을 쌓은 변호사 중에서 판사를 임용하는 이른바 법조일원화의 문제점을 보완하여야 한다. 서구에서와 달리 온정주의 문화가 광범위하게 작용하는 우리 사회에서 장기간의 변호사 경력은 오히려 판사로서 부적절한 행위에 물들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유능한 변호사의 수입과 판사 보수의 현격한 차이는 유능한 변호사들이 판사가 되기를 기피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둘째, 법관근무평정의 개선이 필요하다. 무조건 판사들을 격무로 몰아가는 것도 불합리하고 부당한 일이지만, 김명수 대법원에서 법관근무평정 기준이 변경된 이후로 재판 지연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외면할 수 없다. 판사들의 워라밸을 위해 국민들이 재판 지연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도 정의로운 것은 아니며, 적절한 개선을 통해 타협점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재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판사들의 전문성이 강화되어야 한다. 민사재판과 형사재판, 행정재판, 특허재판 등을 오가면서 모든 판사들이 법률문제에 대한 제너럴리스트가 되도록 하는 것보다는 특정 분야의 재판을 계속 맡도록 함으로써 전문성을 키우는 것이 재판의 효율성 및 재판 지연의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민주화 투쟁을 하던 당시와는 달리, 그리고 민주화 직후의 김영삼, 김대중 정권과는 달리, 오늘날에는 무엇이 정의인지에 대한 기준이 흐려지고, 정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중요시 하지 않는 경향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정의와 불의에 대한 구분이 이전처럼 뚜렷하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에 대한 공감대 약화는 갈등과 분열의 심각성, 나아가 극단화를 초래할 수 있다. 이미 정치권에서의 극단적인 진영 갈등, 의사들의 집단행동에서 나타나는 정의에 대한 무감각, 재판 지연의 심각성에 대한 사법부의 미온적인 태도는 해당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대한민국 전체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정의를 추구한다는 것은 올바른 사회, 인권이 제대로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함이며, 정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무엇이 우리 사회의 원칙과 기준인지를 밝힘으로써 갈등과 대립의 극단화를 원천적으로 배제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대한민국의 정의는 국민적 공감대의 약화를 시작으로 계속 후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우려스럽다.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사진편집=조주형 기자)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장영수 교수.(사진편집=조주형 기자)

장영수 객원 칼럼니스트(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헌법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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