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의 『돼지들에게』, 약자 유린하는 권력자 암시하는 내용의 연작시
좌파성향 운동권 출신 대선후보 캠프서 성추행 겪어...선배는 “운동 계속하려면 참아야”
“문학 가르치는 대학교수에게 성추행 당하기도”...좌파성향 문학계의 민낯 연이어 폭로

최영미 시인이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돼지들에게'개정증보판 발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최영미 시인이 11일 오후 서울 마포구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돼지들에게'개정증보판 발간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연합뉴스

시인 최영미(59)가 2005년 발간한 세 번째 시집 『돼지들에게』에 나오는 수많은 ‘돼지’ 중 시상(詩想)을 제공한 ‘돼지’가 누구인지를 12일 밝혔다.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해당 인물과 관련된 구체적인 증언을 제시해 추정 가능하다는 게 문화계의 중론이다.

최씨는 이날 마포구 한 카페에서 시집 『돼지들에게』의 개정보증판 출간을 기념하는 기자간담회에서 “2005년, 그 전쯤에 어떤 문화예술계 사람을 만났다”며 “노무현 정부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인사로 ‘돼지’의 모델”이라고 밝혔다. 15년 만의 대답이었다. 시집이 발간되고 ‘돼지’가 누구인지를 놓고 논란이 계속돼 심리적으로 시달렸다는 말도 덧붙였다. 또 최씨는 해당 인사를 “문화예술계에서 권력이 있고 승용차와 기사가 딸린 차를 타고 온 사람”이라고도 묘사했다.

최씨는 당시 이 인사를 만나 “나한테 진주를 기대하는 듯한, 여성으로서 굉장히 불쾌한 얘기를 들었다”며 “그를 만난 뒤 개운치 않은 기분이어서 며칠 동안 기분이 안 좋았다”고 했다. 그리고 “성경을 읽던 중 ‘돼지에게 진주를 주지 마라’는 구절을 보고 시상이 떠올라 시의 첫구절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시집 『돼지들에게』는 권력자가 지위와 영향력을 이용해 약자를 유린하는 내용의 연작시가 수록돼 있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늙고 병들어/ 자리에서 일어날 힘도 없는데/ 그들은 내게 진주를 달라고/ 마지막으로 제발 한번만 달라고...’.

최씨는 이날 1987년 대통령선거 때 좌파성향의 운동권 출신 민중후보 캠프에서 활동하며 겪은 성추행 사건도 폭로했다. 최씨는 “그때 당한 성추행 말도 못한다”면서 “선거철에 합숙하면서 24시간 일한다. 한 방에 스무 명씩 겹쳐서 자는데, 굉장히 불쾌하게 옷 속에 손이 들어왔었다”고 밝혔다. 아울러 “나에게뿐만 아니라 그 단체 안에서 심각한 성폭력이 있었다”며 “학생 출신 외에 노동자 출신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때 다 봤고, 회의를 느꼈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선배 언니’에게 상담했지만 “네가 운동을 계속하려면 이것보다 더 심한 일도 참아야 한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전했다. 또한 “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어느 교수와 술자리를 갖고 택시를 함께 탔을 때 나를 계속 만지고 더듬고 했던 일도 있었다”고도 했다.

최씨는 끝으로 최근 이상문학상 수상자들이 저작권과 관련 “출판사가 과도한 이익을 챙긴다” “수상작을 작가의 개인 단편선의 표제작으로 쓸 수 없는 것은 부당하다” 등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 사태도 언급했다. 최씨는 “문단이 정말 깨기 힘든 곳인데, 여성 작가들이 용기를 내서 문제를 제기했다는 건 굉장히 고무적이었고, ‘세상이 조금은 변화하는구나, 약간은 발언하기 편하도록 균열을 냈구나, 내 인생이 허망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최씨는 2017년 9월 한 인문교양 계간지에 ‘괴물’이라는 시를 발표하고, 좌파성향 문학계 원로 고은(87) 시인을 ‘En 선생’으로 암시, 원로문인의 상습적 성추행 전력을 폭로했다. 문학계 미투(Me too·나도 당했다)의 시작이었다. 이에 고 시인이 최씨와 이를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10억여 원의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성추행 사실이 인정된다”며 기각했다.

안덕관 기자 adk2@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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