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적’은 독일 일본 중국과도 다르다
-산업화와 민주화 함께 이룬 나라
-꺼지는 성장엔진, 위협받는 국가정체성
-이러다가 패망 베트남 꼴 안 난다고 자신할 수 있나
-위험한 폭주 못 막으면 후손들 미래 없다

권순활 전무 겸 편집국장
권순활 전무 겸 편집국장

언론사에 오래 몸담았다가 몇 년 전 퇴직한 뒤 평온한 인생 후반부를 보내고 있는 분을 지난 연말 만났다. 필자가 새로 둥지를 튼 PenN(펜앤) 창간 소식을 듣고 격려해주기 위해 고맙게도 연락을 주셨다.

이제 70대에 접어든 그 선배는 요즘 어린 손주 두 명을 보면서 사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다고 했다. ‘꼬맹이들이야기를 할 때면 얼굴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인생을 살면서 희로애락과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지금처럼 큰 기쁨을 느낀 적은 드물었다고 했다.

그런데 말이야. 최근 들어 잠든 손주들의 귀여운 얼굴을 보면서 흐뭇해하다가도 그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면서 걱정하는 날이 부쩍 많아졌어.” 한국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나라에서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을 억지성 탄핵 정변으로 임기 중 쫓아낸 뒤 우리 사회가 미친 듯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한국에 희망을 찾기가 어렵고 암담하다고 했다. 며칠 전에는 아들을 불러 살아있는 동안에는 손주들의 재롱을 안 보고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 내가 세상을 떠나면 이민을 가는 문제를 미리 생각해 두거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오죽하면 이런 말까지 했을까.

20세기에 경제 기적을 이룬 국가로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의 폐허에서 일어선 독일(옛 서독)라인강의 기적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도쿄를 흐르는 스미다가와 강이나 간다가와 강 같은 강의 이름은 붙지 않았지만 독일과 마찬가지로 패전국이었던 일본의 부흥도 경이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두 나라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내로라하는 세계적 강국으로 군림한 찬란한 과거가 있었다.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한번 선진 강국을 경험한 인적 자원과 노하우가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전후(戰後) 부흥은 시간문제였다. 1978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 이후 고도성장을 질주한 중국 역시 이 나라가 광대한 국토와 세계 1위의 인구 대국, 과거 오랫동안 아시아를 호령한 거인(巨人)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요인이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를 놀라게 한 대한민국의 경제 기적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불가능에 가까운 진정한 기적이었다. 일부 국수주의 학자들이 조선을 칭송하지만 냉정히 말해 조선 후기 역사를 읽다보면 한숨만 나온다. 무능한 국왕과 신하들이 외세의 침략에 저항다운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식민지로 전락했다. 해방 후에는 남북이 분단됐고 북한의 남침에 따른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뒤 국토는 잿더미로 변한 나라다. 19604.19 혁명과 이듬해 5.16 군사정변 전야(前夜)의 한국 사회를 묘사한 소설들에는 부모가 등골 빠지게 마련한 학자금으로 번듯한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국에 직장이라고 할 만한 직장 자체가 드물어 낭인 생활을 하는 하얀 손의 실업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굳이 통계와 숫자를 하나하나 소개하지 않더라도 1960년대 이후 한국이 이룬 고도 경제성장은 세계의 어떤 경제학자나 연구기관도 예상하지 못한 경이적 기록이었다. 국토는 좁고 부존자원은 부족한 나라, 원초적 자본축적의 기반도 갖추지 못한 나라, 게다가 수도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쪽에 한반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한 번도 버리지 않은 호전적인 공산 전체주의 정권과 대치하는 나라에서 불과 한 세기만에 선진국을 거의 따라잡는 수준까지 간다는 것을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비록 집권 과정에서 민주적 절차를 밟진 않았지만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한국에 어떻게 저런 지도자가 나왔을까싶은 박정희라는 걸출한 국가 지도자와 이병철 정주영 박태준 구인회 같은 야심과 역량을 갖춘 기업인들이 앞장서고, 빈곤의 사슬을 끊어보겠다는 강한 열망을 지닌 국민이 동참하면서 이뤄낸 쾌거였다.

오랫동안 한국의 경제발전 성과를 부정하거나 폄훼하던 얼치기 좌파세력은 세계가 인정하는 객관적 통계 앞에 더는 할 말이 없게 되자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우리 국민의 수준이 뛰어났기 때문에 한국의 경제성장은 가능했다는 식으로 말을 둘러대기도 한다. 그렇다면 같은 한민족의 핏줄을 지녔고 같은 DNA를 가진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는 저 지옥 같은 참상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대한민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립한 나라 가운데 산업화와 민주화를 모두 이룬 극히 드문 나라이기도 하다. 좌파 진영이 역대 대통령 중 김대중 노무현만 치켜세우고 이승만 박정희를 깎아내리는 반면 최근 강경 보수우파 일각에서는 이승만의 건국과 호국, 박정희의 산업화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민주화에는 거부감을 보인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정치권 인사 중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존재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집권 후 보인 여러 실정(失政)에 대해서는 필자 역시 극히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의 열정이 만들어낸 한국의 민주화가 시간이 흐르면서 변질되고 타락해 전체주의적 극좌세력에 가까운 집단의 과실로 돌아가는 듯한 현실에도 거부감이 크다.

하지만 그런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19876월 항쟁으로 성취한 민주화 그 자체의 의미를 폄훼하고 싶진 않다. 아무리 국가가 경제적으로 커진다고 해도 과거 권위주의적 군사정부와 같은 정치 시스템이 계속 이어졌다면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은 결정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다만 요즘 돌아가는 현실은 산업화냐, 민주화냐 하는 논란에 머물기에는 상황이 너무 엄중하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박정희 전두환에 저항했으면 모두 존중하고 존경할 만한 진짜 민주주의자인가. 결코 그렇진 않다고 본다.

대한민국 헌법이 지향하는 자유민주주의적 가치관과 신념의 소유자들, 백보 양보해서 비()전체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신념에 따라 항거한 사람들, 또는 설령 젊은 시절에는 권위주의적 정권을 일단 무너뜨리기 위해 다소 과격한 혁명 노선을 택했더라도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미망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라면 모두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 김일성-김정일 체제를 맹목적으로 추종한 데 이어 나이가 들만큼 들었어도 여전히 그런 잘못된 노선에서 명백히 벗어났다는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민주주의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

지금 상당수 국민이 우려하는 대로 민주화라는 미명 아래 젊은 시절 지녔던 북한 추종의 환상에서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발호하고 득세하는 권력이라면 대한민국과 한국인에 있어서는 군인 출신이 집권하던 시절보다 훨씬 위험한 것은 아닐까.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은 과연 그런 우려에서 얼마나 자유로울까. 더구나 한국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세계 최악의 폭압적 전체주의 정권과 맞서고 있는 나라다. 최근 들어 이러다가 자칫 베트남 꼴이 나는 것 아닌가라고 걱정하는 국내외의 한국인이 부쩍 늘어나는 현실을 지나친 걱정이라고 치부만 할 수 있을까.

경제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의 경제 통계만 보면 우리 경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일 수 있다. 글로벌 경기가 완연한 회복세로 돌아서면서 수출 주도 경제구조인 한국에는 지난해 상당한 도움이 됐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로 대표되는 반도체 경기도 호황이다. 그러나 반도체 분야를 제외하면 이미 경제 각 분야에 심상찮은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파장은 커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문가들 중에는 몇 년 안에 심각한 재정위기나 외환위기 같은 파국이 닥쳐올 수도 있다고 보는 분들도 적지 않다.

문재인 정권 출범 후 내놓았거나 추진하는 정책 하나하나를 여기에서 거론하며 각각의 후유증을 설명하는 것은 제쳐두자.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현 정권 식의 경제정책과 노동정책을 밀어붙이고도 한국 경제가 쭉쭉 성장하고 경쟁국들보다 더 잘 나간다면 '맨큐의 경제학 원론'을 비롯해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국내외 경제학 원론은 모두 폐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책을 다시 써야 할 것이다.

필자는 저널리스트의 길을 택한 뒤 나이가 들수록 우리 앞세대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커졌다. 역사나 경제 등에 관한 이런저런 책이나 취재관련 보고서를 읽고 해외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종적, 횡적으로 세상을 보는 눈을 기른 뒤 우리 선대(先代)들이 이룩한 대한민국 체제의 성과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절감한다.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성취의 단물을 빨아먹는 데는 누구보다 재빠르면서 건국과 호국, 경제기적의 역사에 침 뱉고 휴전선 이북의 참담한 현실은 애써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얼치기 좌파와 패션 좌파들은 도대체 어떻게 봐야 하나. 그런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겠지만 만의 하나 한국이 배부르고 비겁한 돼지로 전락해 배고프고 이빨을 드러내는 늑대인 북한에 잡아먹힌다면 대한민국 체제를 지키려는 우파 성향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얼치기 좌파들 역시 살아남기 힘들 텐데 그런 미래는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최근 소셜 미디어인 페이스북에는 어느 미국인의 말이라며 개인이 자살하는 것은 봤어도 국가가 자살로 가는 것은 한국에서 처음 보는 것 같다는 내용이 올라와 페북 이용자들의 공감을 얻었다. 실제로 그런 말을 한 외국인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즘 하루하루 쏟아지는 뉴스들을 보면 정말 한국은 어렵게 만들어낸 소중한 성취를 물거품으로 돌리고 국가적 자살로 가려고 작정이나 한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정치권 법조계 언론계 교육계 시민사회단체 등 사회 각계에서 진정으로 깨어있는 한국인들이 힘과 뜻을 모아 저 거대한 폭주를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우리 자신은 물론 후손들의 미래를 결정적으로 좌우할 것이다.

권순활 전무 겸 편집국장 ksh@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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