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0년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주장해 온 이용수 씨는 초기 증언에서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를 받고서 '좋다' 하고 따라갔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밤중에 일본군 병사들이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 내 등에 뾰족한 것을 대고 입을 막고서 강제로 데려갔다"는 식으로 말을 바꿨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관계 법률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아 온 이 씨에게 "증언 내용이 극적으로 바뀐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게 순리이고 납세자로서의 우리 권리다.

박순종 펜앤드마이크 기자
박순종 펜앤드마이크 기자

지난 6일 나는 지난 1991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주장해 온 이용수 씨가 ‘위증’ 혐의로 고발당했다는 이야기를 취재해 기사화했다. 그랬더니 좌파 성향 매체인 오마이뉴스의 시민기자 김종성 씨가 〈어이없는 이유로 고발당한 이용수 할머니〉라는 제목의 기사로 이 씨를 형사 고발하고 나선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 겸 시민단체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대표의 주장을 반박하고 나섰다.

김 소장은 지난 몇 년 동안 거리에서 ‘일제(日帝)가 조선의 여성들을 강제로 연행해 일본군 위안부로 만들었다’는 주장이 ‘허위’라는 주장을 해 왔고, 그간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30년간의 위안부 사기: 빨간 수요일》이라는 책도 냈다.

김 소장의 주장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위안부피해자법)이 정의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안부피해자법’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되어 위안부로서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진상 규명을 위한 기념사업을 수행함으로써 이들의 생활 안정과 복지 증진을 꾀하고 국민의 올바른 역사관 정립과 인권 증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제1조 참조) 제정됐으며, 이 법에 따르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되어 성적(性的) 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말한다.

김 소장은, 즉, 일제(일본 제국의 공권력)는 조선의 여성들을 ‘위안부’로 강제 동원, 종군(從軍)하면서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하도록 강요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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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2022년 4월8일자 기사 〈어이없는 이유로 고발당한 이용수 할머니〉의 내용.(캡처=오마이뉴스)

김 소장이 이번에 ‘위증’ 혐의로 형사 고발한 대상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주장해 온 인물들 가운데에서도 널리 알려진 이용수 씨다. 지난 2020년 4월부터 같은 해 5월 사이 총 세 차례의 기자회견을 열고 정의기억연대 이사장 출신의 국회의원 당선인 윤미향 씨를 비판, 소위 ‘정의기억연대 위안부 피해자 이용 논란’의 계기를 마련했다.

김 소장은 이 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서울중앙지방법원 2016가합580239 참조)의 여섯 번째 변론 기일(2020년 11월11일)에 진행된 당사자 신문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서 증언한 내용 중 역사적 사실과 다른 사실이 있음을 확인했기에 이 씨를 고발하게 됐다고 밝혔다. 당시 이 씨는 1945년 6월 대만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귀국선)에 탔을 때 가요 〈귀국선〉을 들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귀국선〉의 초판 음반이 나온 것은 1947년이고, 그마저도 제대로 흥행한 시기는 이인권이 다시 녹음한 판이 발매된 1949년 이후의 일이므로 이 씨 주장의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종성 씨는 관련 기사에서 “이야기가 사람과 사람 간에 전달될 때에는 도중에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며 1999년 5월24일자 경향신문의 기사 내용을 근거로 들어 김 소장의 주장에 오류가 있음을 주장했다.

김 씨가 언급한 경향신문의 기사는 연중기획 〈대중과 스타 ‘유행’을 노래하다〉 기사에 딸린 박스 기사 〈70년대 TV확산, 비디오 가수 시대로: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을 말한다. 해당 기사는 가요평론가 임진모 씨를 인용해 “현대적 의미의 소속사와 매니저를 갖춘 최초의 대중 스타는 이난영으로 35년 〈목포의 눈물〉을 발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이후 김정구의 〈눈물 젖은 두만강〉(36년), 손석봉의 〈귀국선〉(45년),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등이 인기 트로트로 30~50년대를 풍미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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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24일자 경향신문 기사 연중기획 〈대중과 스타 ‘유행’을 노래하다〉의 부속 기사 〈70년대 TV확산, 비디오 가수 시대로: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의 내용. 가요평론가 임진모 씨를 인용한 해당 기사에서는 손석봉 씨가 1945년 가요 〈귀국선〉을 부른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캡처=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김 씨는 이어 “음악평론가 선성원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는 가수 이인권이 이재호 작곡, 손로원 작사의 〈귀국선〉을 1946년에 불렀다고 한 뒤,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른 것은 손석봉이 먼저이나, 레코드 녹음은 이인권이 서울레코드사에서 했다’고 설명한다”고 덧붙였다. 음악평론가들의 설명을 들어 보니 1945년 손석봉 씨가 불렀다는 사실이 확인되므로 대만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가요 〈귀국선〉을 들었다는 이 씨의 주장을 허위로 볼 수 없다는 게 김 씨의 지적인 셈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편협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김 씨 역시 지적했듯, 이야기가 사람과 사람 간에 전달될 때에는 도중에 왜곡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음악평론가 임진모 씨가 “손석봉이 1945년에 〈귀국선〉을 불렀다”고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사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만일 1946년 5월 대만에서 오른 배에서 〈귀국선〉을 들었다는 이 씨의 주장이 참이고 “이 노래(〈귀국선〉)을 무대에서 부른 것은 손석봉이 먼저”라는 음악평론가 선성원의 주장도 참이라면 이 씨는 귀국선 안에 마련된 손석봉의 무대에서 〈귀국선〉을 들은 셈이 된다.

사실, 이 씨가 귀국선에서 가요 〈귀국선〉을 들었느냐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위안부피해자법’의 규정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돼 국가로부터 여러 지원을 받은 이 씨에 대해 “당신의 증언 내용이 어째서 바뀌어 왔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이는 납세자인 우리로서는 준(準)공인에 해당하는 이 씨에게 할 수 있는 당연한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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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정신대연구소 著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 제1권에는 이용수 씨의 증언이 실려 있다. 해당 부분의 내용을 보면 이 씨는 “어떤 남자로부터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를 받고서 어린 마음에 그 남자를 선뜻 따라나섰으며, 대만에 도착하고 보니 나를 데리고 간 그 남자가 바로 위안소 주인이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출처=교보문고)

이 씨는 지난 1992년 KBS의 특집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때 나이 열 여섯 살인데, 헐벗고 입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인가 원피스 한 벌하고 구두 한 켤레를 갖다 줍디다. 그걸 주면서 ‘가자’고, 그래갖고(그래서), 그걸 받아가지고, 그때는 그런 줄도 모르고 ‘좋다’하고 따라갔다”고 증언했다. 1994년 출판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한국정신대연구소 著) 제1권에서도 이 씨는 동일한 취지의 주장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 씨는 돌연 어느 시점 이후로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꿨다. “한밤 중에 일본군 병사들이 우리 집으로 쳐들어와 등에 뾰족한 것을 대고 입을 막고 강제로 끌어갔다”(2007년 미 하원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의 이용수 씨 증언 내용 참조) 등이 바로 그것이다.

범죄 수사에 있어서도 진술자의 진술이 계속해 바뀌면 해당 진술의 신빙성은 없는 것으로 본다. 그럼에도 굳이 꼽자면 첫 번째 진술이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한다.

‘위안부’ 또는 ‘정신대’가 된 경위와 관련한 이 씨의 첫 진술은 “빨간 원피스와 가죽 구두를 받고 어린 마음에 ‘좋다’하고 따라갔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사건이 일어난 시점(1943년경)에 가장 가까운 시기에 이뤄진 것으로써, 당시 이 씨의 나이 60대였다.

지난 2020년 5월 이 씨가 대구에서 첫 기자회견을 한 직후 한경희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은 ‘이 씨가 나이가 많이 들어 기억상의 왜곡이 발생해 벌어진 해프닝’이라는 취지로 이 씨의 주장에 반대 의견을 개진한 사실이 있다. 이에 대해 이 씨는 두 번째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기억력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과시했다. 90대가 된 지금도 기억력이 멀쩡한데, 60대였던 당시 이 씨의 기억력은 얼마나 더 멀쩡했을까?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 씨는 자신의 기사에서 이같은 문제점은 전혀 다루지 않은 채, 과거 기사 등을 인용해 가요 〈귀국선〉이 처음 불리게 된 시점에만 집중하고 있다. 진정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고 이 씨의 ‘증언 변경’ 문제다. 그 밤중에 일본군 병사들에게 흉기로 협박을 당하며 끌려갔는데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을 리 만무하고, 그런 기억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법이다. 그럼에도 이 씨는 자신의 증언 내용을 변경하고 있다. 기자라면 의당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야 하지 않을까?

김 기자님, 우리 함께 손잡고 이용수 할머니께 가서 증언을 바꾸는 이유가 뭔지 이 할머니께 좀 여쭤봅시다.

박순종 기자 francis@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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