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규 부장판사 "이제는 블랙리스트 의혹 제기한 분들이 답해야 할 차례" 비판
김명수 대법원장, 아랑곳 않고 김소영 법원행정처장 사실상 경질
신임 법원행정처장에 안철상 대법관 임명

소위 ‘판사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법원의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지난 24일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실상 블랙리스트에 대한 3차 추가조사를 하겠다고 발표한 뒤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 추가조사위에 대한 판사들의 비판 의견이 올라왔다. 

김 대법원장은 그러나 법원행정처의 인사 ‘물갈이’를 시작하며 일선 판사들과 힘 대결을 지속하는 양상이다.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은 김소영 법원행정처장(53‧19기‧대법관에 대한 사실상의 ‘경질’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김태규 부장판사
김태규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

김태규 울산지방법원 부장판사(51·28기)는 24일 코트넷에 “이제는 블랙리스트의 의혹을 제기하신 분과 추가진상위원회가 답해야 할 차례”라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당사자의 말을 무시하고 조사를 시작했음에도 찾아내지 이를 찾아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법원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이었다.

김 판사는 “블랙리스트는 없었지만 동향보고 및 대책수립은 있지 않았느냐고 쟁점을 흐리지 말라”며 “진실이라는 이유로 강제적인 수단에 대한 봉인이 무작정 풀리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 “사법부가 정치적 영향이나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면 이는 사법부 몰락이 아니라 국가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했다.

지금까지 주로 목소리를 내오던 좌파 성향의 판사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주장과 배치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법원 내부에서는 ‘침묵하던 다수가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한 현직 판사는 “(큰 목소리를 내는) 10여명의 판사가 전체를 대변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김 대법원장은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에도 예고한대로 대대적 인사 ‘물갈이’를 시작했다. 대법원은 25일 김소영 법원행정처장)의 후임으로 안철상 대법관(61·사진·사법연수원 15기)을 임명했다고 밝혔다.

김 처장은 2년의 법원행정처장 임기를 채우지 않고 약 7개월만에 처장직에서 물러났다.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 처장의 이러한 결정은 김 대법원장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 추가조사위원회가 지난 22일 ‘행정처 컴퓨터에서 판사 동향 문서들은 나왔지만, 블랙리스트는 찾지 못했다’는 내용의 재조사 결과를 발표한 뒤의 일이다. 김 처장도 즉각 사의를 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원 내부에선 처장직을 시작으로 법원행정처의 대대적 인적 개편이 이뤄질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음은 김태규 판사의 글 전문.

<이제는 블랙리스트의 의혹을 제기하신 분과 추가진상위원회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 거의 1년에 가까운 법원 내부의 갈등 속에 드디어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가 발표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선홍빛의 살생부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동향파악과 그 대응책 정도에 그쳤습니다. 결과가 그러하다면 이제는 블랙리스트의 의혹을 제기하신 분과 추가진상위원회가 답변할 차례가 되었다는 생각입니다.

○ 블랙리스트가 없다는 당사자의 말을 무시했고, 그리하여 조직된 최초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도 부정했습니다. 결국에는 의혹을 제기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이들로 구성되었다는 지적까지 받아가며 조직된 추가조사위원회가 영장주의 위배, 프라이버시 침해, 절차위반 등의 지적을 정면으로 돌파해 가면서까지 이루어낸 조사의 결과는 ‘블랙리스트가 없다’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렇게 무리한 방법을 동원해가면서 겪었던 일들로 인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서로에 대한 반목과 마음의 깊은 생채기라면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당사자의 해명은 적어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 블랙리스트는 없었지만 그래도 동향보고 및 대책수립은 있지 않았느냐고 쟁점을 흐리시겠습니까. 동향보고에 깊은 주문이라도 걸어 그것을 블랙리스트로 변신이라도 시키고자 하는 것인지요. 애초 강제조사로 전환하더라도 대상과 방법, 시기를 모두 제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렇다면 그 범위는 애초 블랙리스트에 한정되었어야 하는 것이고, 그 외에 것은 조사대상에서 모두 배제시켰어야 합니다. 혹여 조사과정에서 블랙리스트와 무관한 비위가 드러나더라도 그것은 애써 조사를 피했어야 했고, 더욱이 발표까지는 나아가지 말았어야 합니다.

○ 블랙리스트에 대한 조사로 시작하여 두고는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대하여는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서 동향보고에 대한 조사와 발표를 하는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꿩을 잡겠다고 했다가 못 잡았으면 못 잡았다고 하면 될 일을 굳이 닭을 잡았노라고 목청을 높일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혹여 블랙리스트 조사에 대한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구실거리로 사용된 것이라면, 이는 제가 종전에 올린 글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떠한 내용이어도 위원회의 자의에 따라 해석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조사보고서의 조사결과는 조사위원회의 일방적인 입장만을 담고 있을 뿐 조사대상자의 입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아 편향적인 평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 비록 절차나 수단은 다소 부적절했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더 알게 되었으니 의미 있는 조사였다고 위안으로 삼으시겠습니까. 하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더 큰 원칙을 잃어버렸고 더 자유롭지 못한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그 어느 누구든 그럴 듯한 의혹을 제기하면 그때도 법률에 근거가 없는 위원회를 조직하고, 의혹을 제기한 사람을 위원으로 위촉하며, 강제적인 수단으로 우리 개인의 컴퓨터를 강제로 열어볼 것인지요. 그리고 우리는 내 컴퓨터가 개봉될 때 그 옆에서 그저 묵묵히 지켜보아야만 하는 건가요.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진실이라면 저는 그 진실을 포기하고 자유를 선택하겠습니다. 진실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문이라는 수단을 쓸 수 없듯이, 진실이라는 이유로 강제적인 수단에 대한 봉인이 무작정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 앞으로 누구든 법관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해서 이번과 같은 사태가 재연된다면 그 게임은 아마도 대부분 의혹을 제기한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이 될 것입니다. 판사에게 부정적인 의혹이 씌어 졌으니 언론은 좋다고 판사 개인과 나아가서 법원 전체를 공격할 것이 충분히 예견 가능합니다. 위원회는 강제조사를 통해 애초 목적한 의혹이 현실로 드러내게 되면 성공하는 것이고, 실패하게 된다하더라도 조사범위를 넓혀 조사대상자의 비위를 하나라도 건져낼 수만 있다면 언론과 세상은 잘했다고 할지도 모르지요. 조사대상이 된 법관이 순수무결의 결정체가 아니라면 이 게임에서 승산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 한 발짝 더 물러서지요. 경위야 어떠하든 추가조사위원회가 얻은 동향보고 등의 조사결과를 성과로 간주를 하겠습니다. 법관들 중에는 법원행정처에서 그런 식의 동향보고를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놀라신 분도 있으시리라 생각됩니다. 법원이라고 하더라도 순결한 성직자의 인품을 갖춘 사람들만으로 조직되지는 않았다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여기고 있는 저로서도 다소 과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고 또 조사대상자들이 저지른 일이라면 그들은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 형사처벌이 필요하다면 이 역시도 사정을 두지 않아야 합니다.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는 데는 양보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한 근거도 없는 의혹을 제기하여, 조사대상자들에게 상처를 주고, 법원 전체가 장시간 지향점을 잃고 방황하게 하였으며,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만드는데 원인을 제공했던 사람들로부터도 분명한 해명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사대상자들에 대한 비난이나 책임추궁을 이유로 하여 이들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추가조사위원회가 PC를 강제로 개봉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어떤 언론사는 벌써 블랙리스트가 나왔다고 사실관계도 확인하지 않은 기사를 내고 이참에 사법개혁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이제 이런 기사가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또 어떤 기사는 검찰에 의한 강제수사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개혁이 필요한지 여부를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또 여론이나 검찰에 의해 조직이 훼손되는 것을 방어해야한다는 조직 이기주의를 말하지도 않겠습니다. 조직의 행태가 국익에 반하고 국민의 자유․생명․재산에 위해가 된다면 그것은 개혁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배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혹시나 하며 우려하는 것은 ① 법원 내부의 갈등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켜 부정적인 이미지를 더해 마치 법원 스스로는 문제해결의 능력이 없는 것처럼 명분을 축적하는 것, ② 그리고 이러한 명분 위에 사법개혁 등의 기치를 내세우며 다수의 위부인사가 참가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법관의 인사 등에 관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 ③ 그 다음에는 그 위원회 안에 정치적 성향의 인사들을 채워 법관의 인사를 포함한 법원의 행정사무가 그들의 정치적 입김에 휘둘리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정치적 인사들이 법원 내부의 행정사무에 관여하면서 법원을 자신들의 정치적 지향에 맞도록 조정해 나가려한다면 이것은 사법부의 위기가 아니라 국가와 국민의 위기가 됩니다. 위와 같은 우려에 대하여 아직은 막연한 기우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고 앞으로도 그러해서는 안 됩니다.

○ 그래서 묻습니다. 애초 블랙리스트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하신 분은 누구신지, 그리고 그러한 의혹이 생기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또 그러한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자료로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또 추가조사위원회는 어떠한 이유와 근거에서 위 의혹에 대하여 충분히 조사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인지, 강제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면서 조사를 강행했어야 할 필요성은 어디에 있었는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책임 있는 분의 답변을 들을 자격은 적어도 그 소용돌이를 겪어오면서 자존감에 상처를 받았을 우리 법관 모두에게 있다는 생각입니다.

○ 만약 답변이 없다면 의혹제기의 배경에 대한 역조사위원회의 구성을 제안합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추가조사위원회가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불리한 내용은 제외시킨 채 공개했다는 또 다른 의혹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대법관님들 전원이 특정재판의 공정성에 대하여 해명하는 공개성명을 발표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정치권에서는 가칭 ‘김명수방지법’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이 많은 혼란이 막연한 의혹에서 시작되었다면 그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 하고 없다면 이제는 강제로라도 들어야겠습니다.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번 추가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는 조사위원회의 입장만을 담았을 뿐 조사대상자나 조사위원회와 다른 입장에 대한 제대로 된 소개가 없습니다. 애초 위원회 구성의 공정성에 대한 지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 사족을 첨언하자면, 아마 혹자는 저자가 왜 저리 나서나 싶으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힘 있다는 법원행정처와는 참으로 먼 거리에 있고, 요즘 잘 나간다는 국제인권법연구회에 가입할 만한 깜냥도 없는 그저 시골에서 맡겨진 재판하면서 판사라는 자부심만을 삶의 버팀목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입니다. 다만 사법부가 국가를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라는 신념이 있고, 그러한 사법부가 정치적 영향이나 외부의 압력에 굴복할 경우에는 그것은 사법부의 몰락이 아니라 국가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심정에서 이글을 올립니다.

○ 묵묵히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에 충실하면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지금도 하루하루를 성실히 엮어 가시는 대부분의 법관들에게 제 글이 혹여라도 불편하셨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슬기 기자 s.l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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