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주동식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달 17일 <조선일보>에 ‘아직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라는 칼럼이 실렸다. 임지현 서강대 교수의 이 칼럼은 첫머리에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묻고 [북한 지도부의 답변은 결단코 ‘노’]라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나아가 지난해 12월 30일 김정은이 북한 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한 연설을 인용하며 ‘지금 한반도에서 시급한 것은 통일이 아닌, 평화적 외교 관계’라고 강조했다.

남과 북이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하고 평양과 서울에 대사관을 개설하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 남과 북 쌍방이 상대방 정상을 향해 일본 총리에 대하여 하는 것처럼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데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괴뢰’라고 칭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임 교수의 칼럼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이 ‘민족’ 개념에 대한 재조명이다. 임 교수는 [1990년대 김정일 위원장이 강조한 ‘우리 민족 제일주의’의 민족이 남한을 배제하고 북한만을 가리킨다는 것은 이미 북한 전문가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일이다. 민족주의적 미련 때문에 그저 모르는 척했을 뿐]이라고 설명하고, [이념과 정치 체제, 사회 구성 원칙과 경제적 삶의 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국가를 혈통적 민족의 잣대를 들이대 한데 묶는다는 발상은 황당하기 그지없다]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임 교수의 칼럼에 대한 비판은 1월 23일자 같은 신문에 손재식 전 통일원 장관의 ‘아직도 우리의 소원은 평화와 통일이다’라는 제목의 기고에 실렸다. 이 기고에서 손 전 장관은 ‘평화와 통일은 남북한에 관한 한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고 지적하고, ‘햇볕 정책의 부정적 측면을 직시해야 한다’며 ‘남북한이 통일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자유와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국가로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손 전 장관에 이어 1월 24일 천영우 前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서독은 끝까지 동독의 2국가 체제 요구를 거부했다’는 제목의 칼럼을 <조선일보>에 게재했다. 천 전 수석은 ‘우리가 독자적으로 북한 안정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도래할 때’를 전제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한다면 국제법상 유엔 안보리의 승인 없이는 자위권의 범위를 벗어난 군사 개입이 불가능’해진다며 ‘좌우 양 진영에서 차제에 통일을 포기하고 2국 체제로 가자는 주장이 분출하더라도 정부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 전 수석은 이 칼럼에서 임 교수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칼럼이 임 교수의 칼럼에 대한 답변 형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 주제에 관한 논란은 <조선일보> 지면으로 한정되지 않았다. 이승만학당 교장이기도 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도 1월 26일 이승만TV 유튜브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인가 평화인가’라는 방송에서 임 교수에게 ‘어떤 철학에 바탕을 둔, 어떤 내용의 평화를 말하는가’ 묻고, ‘북한에서 노예적 상태로 고통당하는 동포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인정하는 평화여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가장 이상적인 관점에서 통일 당위론을 설파한 내용이었다.

분단국가에서 통일 의제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최근의 통일 논의는 아무래도 북한이 지난해 12월 26일부터 30일까지 가진 조선노동당 제8기 제9차 전원회의가 촉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회의에서 김정은은 △경제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장 추이 △농업 부문의 커다란 진전 △국가방위력에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는 사변적 변혁 등 3가지 성과를 회의의 배경으로 꼽았다. 구체적으로 대중 무역량이 2019년의 83.4% 수준으로 회복되었으며, 식량 생산량이 전년도 대비 103% 증대되었고, 군사정찰위성 발사 등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통일 문제에서 최대의 쟁점은 임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민족(nation) 개념의 이해라고 본다. 임 교수는 ‘이념과 정치 체제, 사회 구성 원칙과 경제적 삶의 양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두 국가를 혈통적 민족의 잣대를 들이대 한데 묶는다는 발상은 황당’하다고 지적했다. 네이션(nation)이 혈연적(ethnic) 동족 개념이 아니라 사실은 근대 이후 역사적 신분의 맥락이 강화된, 국민 또는 국가로 번역해야 할 개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본다.

한반도 최근 역사에서 가장 많은 오해를 불러왔고 지금도 그 오해가 거의 해소되지 않은 개념이 바로 네이션(nation)이다. 네이션은 분명 혈연과 문화의 맥락도 갖고 있는 개념이다. 즉, 종족(tribe) 개념이 확장된 차원에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네이션이 역사적 맥락에서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근대 이후라고 봐야 한다.

근대 이전 인민(people)들의 사회적 신분은 자신들의 선택과 무관하게 결정되었다. 즉 신민(臣民, subject)의 개념에 가까웠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민들을 신분의 제약에서 해방시켜야 할 필연성이 제기되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인민들의 노동력 활용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계약 관계의 도입이 필수적이었고 그 전제 조건으로 사유재산권 존중, 사적 자치(계약의 자유), 과실 책임 등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 민법이 성립하게 되었다. 이런 민법과 공화정을 중심으로 근대의 헌정질서가 새로 구성되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원리가 헌정에 도입되게 되었다.

즉, 네이션은 근대적 헌정질서에 대한 충성심 최소한 소속감을 기반으로 새로 성립하는 인민들의 정체성 또는 신분이다. 이 네이션이라는 정체성이 근대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보는 것은 근대 국민국가들이 의도적으로 조성한 일종의 환상 또는 착각이다. 근대 네이션의 가장 뚜렷한 공통점인 언어만 보더라도 실은 근대 국민국가가 목적의식적으로 지정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표준어이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 근대 국민국가의 표준어는 언론이나 교육 등을 통해서 새로 제정되고 통일되어간 결과물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제시대만 해도 조선 내 여러 지방의 사투리로는 의사소통이 쉽지 않아 서로 일본어로 소통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중국의 경우는 지금도 표준어인 베이징의 만다린과 광뚱 지방의 캔토니즈가 상호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

네이션이 민족 개념으로 혼동되는 이유는 근대 이전부터 비교적 동일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던 국가의 영역을 국민국가가 그대로 이어받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프랑스나 영국 등 유럽의 국가들이 그렇고 특히 동아시아의 경우 이런 경향이 심하다. 중국이나 일본, 한국이 사실상 오래 전부터 단일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이런 전통적 정체성을 네이션의 개념으로 혼동하곤 한다. 하지만 그 정체성과 근대에 들어 새로 형성된 정체성은 완전히 다르다. 근대에 들어와 새로 형성된 네이션의 정체성은 근대적 헌정질서에 대한 소속감에 근거한 정체성이다.

만일 전근대적 네이션의 정체성이 근대적 네이션의 정체성과 동일하다면 가령 이씨조선도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 즉 nation state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좌파 학자들 즉 ‘우리 민족끼리’를 내세워왔던 지식인 중에서도 이씨조선을 민족국가라고 부르는 경우는 없다.

다만 근대 네이션의 개념과 관련해서 놓쳐서는 안될 지점이 있다. 전근대적 네이션은 근대적 네이션 형성의 중요한 기반 집단이 된다는 점이다. 한반도의 경우 이씨조선 당시의 인민들이 근대적 네이션은 아니지만 이들을 모태로 하여 새로운 국민국가가 만들어진다는 의미이다. 근대화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띤 흐름이었고 이는 한반도 주민들에게도 필연적인 역사적 과제로 대두됐다. 그런 점에서 근대화의 정치적 구현체인 근대 국민국가 건설은 한반도 주민들이 근현대사 과정에서 맞닥뜨린 가장 절실한 정치적 숙제였다. 이것은 또한 한반도 주민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역사적 권리라고도 말할 수 있다.

분단은 바로 이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향한 노력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당위에는 특별한 이견이 있을 수 없었지만 어떤 국민국가인가 하는 방향성을 놓고 1945년 이후 한반도 모든 주민이 치열한 이념 투쟁과 정치 투쟁을 전개한 결과가 바로 분단이었던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냐 전체주의 사회주의냐 하는 선택의 문제였다. 6.25는 이런 이견을 물리력으로 해소하려는 마지막 시도였고 그래서 사실상 6.25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 건국전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분단은 이렇게 통일된 국민국가 건설에 실패한 남북한 인민이 체제 경쟁에 들어간 상태의 표현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한반도 주민들이 최종적인 국민국가 건설을 진행중인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우리의 국민국가 건설은 아직 미완성 상태, 현재 진행형이라고 봐야 한다.

임지현 교수의 ‘통일보다 평화’라는 주장은 이런 한반도 근현대사의 핵심 이슈인 근대화와 근대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업이 얼마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는지 간과한 논리일 수밖에 없다. 임 교수는 역사학자로서 중심에 갖추고 있어야 할 역사철학이라는 점에서 약점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해보게 된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역사철학 본연의 임무나 기능은 어떤 시대 고유의 내러티브(敍事)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내러티브의 기본은 인류사가 운동하는 법칙성이다. 그 법칙성이 특정한 시대에 어떤 구체성을 띠고 발현 구현되는지 해명하고 소개하는 것이 바로 내러티브이고 이것을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의 소명 아닐까? 그 법칙성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그런 법칙성과 내러티브가 드러나지 않는 역사학은 설득력도 없고 강한 울림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업이 독일과 한반도 분단의 근본적인 차이를 만들어냈다. 독일은 프로이센의 통일 등 비스마르크 시대에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완성했다. 그래서 그들의 분단은 국민국가 정체성 형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통일은 애초에 성립한 국민국가의 원상 회복이라는 의미였다. 한반도의 분단은 그 성격이 독일과 완전히 다르다. 근대 국민국가를 미처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성립을 위한 진통의 정치적인 표현이 한반도의 분단이었다.

한반도 통일이 독일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달라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독일은 이미 이루어진 근대 국민국가가 분열되었다는 점에서 동서독의 적대성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동서독 간 유혈 분쟁이 없었던 것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경우는 다르다. 완전히 적대적인 대립구도이고 통일 역시 평화적인 방식이 아닌,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북한의 전근대적 전체주의를 흡수 해소하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북한 체제는 사실상 근대 국민국가가 아니라는 것이 분단 과정에서 도저히 감출 수 없게 명백해진 것도 대한민국 주도의 흡수 통일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입증해 보여준다.

한반도는 일제시대에 근대적 헌정질서의 도입 등 국민국가의 맹아적 형태를 맛보았을 뿐이다. 본격적인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위한 투쟁은 1945년 8월 이후에 본격화됐다. 그리고 그 대립과 분열, 투쟁은 여전히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선택한 국민국가가 체제 경쟁에서 완승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 승부는 최종적으로 통일을 통해서 입증하지 않으면 안된다. 통일이야말로 한반도 주민들이 개항기 이후 2세기에 걸쳐 피땀 흘려 전개해온 근대화 노력의 마무리라고 봐야 한다. 이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역사적 필연성에 대한 철저한 무지의 결과이다.

근대화는 세계사적으로 보편성을 지닌 명제지만 모든 보편성은 항상 특이성을 띤 형태로 구체화된다. 한반도의 근대화가 갖는 특이성과 구체성은 바로 중국의 영향으로부터의 완전한 탈피와 자유라는 방향성을 갖는다. 중국은 지금도 북한 체제와 그 연장인 대한민국 내부의 종북 주사파들을 레버리지 삼아 대한민국에 사악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구조는 대한민국이 아무리 평화를 외치고 흡수 통일을 포기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실상의 무장해제론과 국가 헌납으로 이어질 뿐이다.

중국과 북한은 결코 이런 영향력을 포기할 수 없다. 원래 남북한은 통일하지 않으면 통일 당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분단 자체가 어느 국민국가 체제가 옳은지 검증하는 경쟁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통일을 포기한다는 건 흡수 당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김정은은 결코 적화통일을 포기할 수 없다. 김정은이 지난해 연말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 한 연설을 통일 포기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태도이다.

남북한 사이의 평화 주장은 분단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의 햇볕정책이야말로 87체제의 최대 사기극의 하나라고 봐야 한다. 김대중은 이미 죽었지만 그 정치적 후예들은 그의 행적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 사죄해야 한다. 햇볕정책이 이 나라에 끼친 해악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이다.

임지현 교수의 조선일보 기고는 그런 점에서 보다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임 교수의 내공에 감히 비교할 수 없는 필자가 감히 이런 졸문을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족하지만 이 글이 이 문제를 둘러싼 논의를 촉발시키는 작은 역할이라도 하게 되기를 기대해본다.

주동식 지역평등시민연대 대표(前 국민의힘 광주서구갑 당협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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