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안 먹었더니 당근에 싹이 났다. 파릇한 게 얼마나 귀엽고 섹시한지 차마 칼을 댈 수가 없었다. 당근 하나 빠졌다고 카레 맛 크게 달라질 것도 아니고 빈 병에 물을 채우고 담가놓았더니 기분까지 좋아졌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런 거다. 넓게 보아 측은지심이다. 그런데 만약 싹이 난 채소를 먹어서는 안 된다, 같은 규정이 있었더라면 반발심에서라도 그 즉시 토막을 냈을 것이다.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거니까. 강제가 개입하면 불만이 생기니까.

얼마 전 개 식용금지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2027년부터는 식용을 목적으로 개를 사육하거나 도살하거나 유통하고 판매하는 행위를 일체 할 수 없게 된다. 결론부터 말한다. 이 정부는 앞으로 절대 ‘자유’의 지읒 자도 꺼내지 말라. 듣는 사람 매우 지읒 같고 불쾌하니 어떠한 경우에도 입 밖에 내지 말라. 의식주에 금지라는 황당한 발상을 하는 분들이 무슨 얼어 죽을 자유란 말인가. 게다가 정부가 자유 못지않게 떠들어댄 게 ‘시장’이다. 그 단어 역시 사용을 자제하기 바란다. 금지법은 시장과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것이니까. 시장은 누구나 자율적으로, 자유롭게 참여하는 것이니까. 금지란 게 없어야 시장이니까. 알아서 금하거나 알아서 퇴출 되는 것이 시장이니까.

뭐 이런 사소한 일로 핏대를 올리십니까, 하실지 모르겠다. 사람은 원래 사소한 일에 분노한다. 시인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글에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왜 조그마한 일에 분개 하는가/5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 하는가/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사람 마음이 다 그런 거다. 그리고 개식용 금지 관련 분개는 그보다는 훨씬 장엄하고 실존적이며 창세기創世記적이다. 강제로 나의 행동에 지침을 내리는 것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불태우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성찰함과 동시에 생명에 대해 생각하는 숭고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법안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찾아보았더니 ‘개의 식용 금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로 되어 있다. 대체 사회적 요구란 게 뭘까. 개인적으로 ‘사회적’이라는 단어에는 경기를 일으키는 성향이지만 특히 이번의 사회적은 도대체 납득이 안 간다. 자료를 보니 개를 파는 집이 꽤 되는 모양이다. 그 말은 먹는 사람이 제법 있다는 반증이겠다. 그럼 그 분들은 반사회적인 인간들이고 그들의 개식용은 지탄받아야 할 행동인가. 법안 말고 이른바 ‘식용 금지에 대한 사회적 요구’에 해당하는 것 중에 ‘이제는 안 먹을 때도 되었다’가 있다. 이건 그나마 좀 낫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국민 소득이 1천 달러에서 3만 달러로 올랐다는 것은 한 그릇 먹던 밥을 서른 그릇 먹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다른 재화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제 단백질이 귀한 시대는 아니므로 약간은 동의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지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2000년 초반 IT 버블 당시 투자자들을 상대로 한 기업 설명회가 하루 건너였다. 버블답게 정말 돈이 넘쳤다. 로비에 음식을 쫙 깔아놨는데 심지어 푸아그라도 있었다. 그것도 접시에 듬뿍 담겨서. 그거만 찾아 먹었다. 혹시 누가 뺏어 먹을까봐 이게 뭐냐고 묻는 사람에게는 물에 담가 불린 돼지 간이라고 했다. 나중에 푸아그라 만드는 법에 대해 들었다. 동물 학대가 아니라 잔혹한 고문이었다. 이후로 안 먹었다. 안 먹는 것과 강제에 의해 못 먹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국회 본회의 투표에서 재석 210인 중 208명은 찬성하고 2명은 기권했다. 기권이 아니라 “나는 먹지 않지만 이 법안은 개인의 자유를 뭉개는 법안이기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반대표를 던졌더라면 얼마나 멋졌을까. 어차피 사라져가는 식문화다. 법으로 금지까지 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절대로, 죽어도 이해를 못하겠다.

남정욱 객원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문화예술인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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