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재판거래' 의혹 관련...'사법부판 적폐청산’ 현실화 우려

전국 각급 법원을 대표하는 판사들이 전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대해 제기된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해 격론을 펼친 끝에 형사 절차를 포함하는 성역 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을 의결했다.

법원이 직접 검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것으로 비출 수 있는 ‘수사 촉구’라는 문구는 공정성 논란 끝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관련 판사들에 대한 국회 탄핵을 염두에 둔 내용의 의결안도 결의돼 ‘사법부판 적폐 청산’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전국법관대표회의는 11일 오전 10시10분에 경기도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임시회를 열고 논의를 시작해 이날 오후 8시께 선언문을 발표했다.

법관대표들은 선언문에서 “우리는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관해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께 머리 숙여 사죄드린다”며 “이번 사태로 주권자인 국민의 공정한 재판에 대한 신뢰 및 법관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훼손된 점을 심각하게 우려한다”고 밝혔다. 이어 “사법행정권 남용사태에 대해 형사절차를 포함하는 성역없는 진상조사와 철저한 책임 추궁이 필요하다”고 명시했다.

앞서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 하의 특별조사단 등은 3차례에 걸쳐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추가 조사한 끝에 재판거래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에 김 대법원장은 “각계의 의견을 종합하여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 조치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겠다”며 형사 고발을 암시했다.

그러나 이날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는 ‘대법원장이 직접 관련자들을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주를 이룬 것으로 전해졌다. 법관회의 관계자는 “다만 형사절차를 통해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했다”고 말했다.

법관대표회의 공보판사인 송승용 부장판사는 “회의에서 법관들은 대법원장이 직접 형사고발을 직접 취하는 것에는 부정적 입장을 밝혔다”며 “이는 이미 관련자들에 대한 고소.고발이 충분히 이뤄져 있는 것이 고려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법관 대표로 참석한 한 부장판사도 시민단체 등을 통해 이미 검찰 고발이 이뤄진 상황이므로 ‘수사 협조’ 등의 소극적 방법을 택하겠다는 뜻”이라며 “전국법원장회의에서 지적한대로 수사 촉구를 하게되면 공정성 논란이 생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판사들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내용의 의결안도 결의됐다. 추후 해당 판사들에 대한 탄핵 추진을 염두한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실제로 좌파 성향의 판사소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들은 회의 전부터 ‘최순실 사태’와 이번 사태를 비교하며 법관 탄핵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한 법관은 전국법관대표회의 카카오톡 단체대화방에서 “형사처벌은 시간이 오래 걸리니 신속한 탄핵 절차를 밟는 게 좋겠다”는 취지로 최순실 사태 당시 탄핵과 형사절차의 소요 시간을 비교해 올리기도 했다.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형사 절차를 통한 처벌이 어렵다면, 국회에 진상규명을 맡겨 탄핵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자는 뜻이다. ‘법관 탄핵’ 방안이 실제로 진행된다면 탄핵과 형사처벌이라는 두 트랙(Two-track)을 이용해 사법부 적폐청산이 이뤄지는 셈이다.

김 대법원장은 이날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의결한 내용까지 취합해 최종 결정을 위한 검토에 들어갈 예정이다. 12일로 예정된 미북 정상회담과 13일 지방선거 일정 등을 고려해 오는 14일 이후 김 대법원장이 결정을 내릴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법관대표회의는 일선 판사들에게 사법행정에 대해 건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올해 2월 상설화된 사법부 공식 건의기구다. 사법행정 책임자들이 논의하는 전국 법원장 간담회, 법원 안팎 인사가 사법개혁 방안을 검토하는 사법발전위원회와 등 두 자문기구와 더불어 김 대법원장의 결단을 가를 핵심 의견이다.

앞서 지난 7일 전국 법원장들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관여한 전‧현직 판사들을 사법부가 직접 검찰에 고발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결론 냈다.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사법발전위)'는 5일 간담회를 열었으나 후속조치에 대한 결론을 내지 못했다.

한편 좌파 성향의 변호사단체인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중심으로 모인 전국 변호사 2,015명은 이날 서울 서초동 서울지방변호사회관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양승태 전 대법관 시절에 대해 제기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날 오전 9시까지 2,105명에게 서명을 받고, ▲미공개 문건 공개 ▲책임자에 대한 형사처벌‧징계‧탄핵 등을 요구했다.

이슬기 기자 s.l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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