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국가정보원에서 새로운 국정원 원훈석을 제막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국정원 원훈은 5년 만에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교체됐다. 2021.6.4(사진=청와대, 편집=조주형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후 국가정보원에서 새로운 국정원 원훈석을 제막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 국정원 원훈은 5년 만에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으로 교체됐다. 2021.6.4(사진=청와대, 편집=조주형 기자)

2020년 7월 27일 취임한 박지원 국정원장은 퇴임을 3개월 남짓 남겨두고 있다. 그동안 박 원장은 비밀정보기관 수장(首長)으로서의 부적절한 경력과 언행으로 자주 논란의 대상이 돼 왔다.

이달 초에는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들에 새해 인사를 하고 페이스북에 자주 글을 올린다는 점이 알려져 논란이 됐지만 박 원장과 관련된 논란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인사청문회에서부터 논란이 됐다. 국정원의 탈정치화가 중요한 시기에 사상 처음으로 정치인이 원장에 임명됐다는 점, 안보·정보와 관련된 전문 경력이 전혀 없다는 점, 북한에 우호적 성향이라는 점, 78세로 역대 최고령이라는 점, 전과(前科) 경력이 있는 유일한 원장이라는 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하지만 취임 초에는 박 원장이 남북정상회담 추진 경험과 폭넓은 인맥, 그리고 ‘정치 9단’의 뛰어난 수완을 발휘해 남북관계 복원과 원만한 국정원 개혁을 이룰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적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1년 6개월이 지난 현재의 평가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경색된 남북관계는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고, 국정원 개혁은 국정원을 ‘불구정보원’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안보 중추기관으로서의 국정원의 능력과 역할과 명성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사진=연합뉴스, 편집=조주형 기자)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사진=연합뉴스, 편집=조주형 기자)

부적절한 언행으로 논란 자초

국정원의 위상 실추에는 박 원장의 부적절한 언행도 한몫했다는 것이 정평(定評)이다. 취임 후 첫 주말 페이스북에 “교회 간다”는 글을 쓰고 미국 방문 시에는 지인의 페이스북에 “어제 D.C도 오늘 NY도 비오다”라고 댓글을 달아 동선(動線)을 노출시켰다.

목포 성당에 가서는 교황방북 추진 사실을 공개했고 작년 8월에는 김정은이 남북통신선 복원을 먼저 요청했다고 발표해 청와대와 통일부가 뒤늦게 부인하는 소동을 빚었다. 10월에는 국정원에서 개최된 한·미·일 정보기관장 회의내용을 보도자료로 배포했고 12월에는 이스라엘 방문 사실을 페이스북에 공개하는 등 기밀 사항을 자주 공개해 외교·안보 관료들 사이에서 ‘홍보원장’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개인적 언행도 자주 구설에 올랐다. 매달 적게는 2~3건, 많게는 10여 건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리는데 대부분이 가요, 손주·강아지 동영상 등 업무와 무관한 내용이다. 원장 공관에 외빈을 자주 초청해 공관근무 직원들이 힘겨워했지만 대부분 국민의당 전직 의원들이나 지인 등 업무와 무관한 사람들로 알려졌다.

이들과의 대화에서는 “나의 정보를 모두 공개하면 이혼할 사람 많을 것”이라는 부적절한 말도 했다. 북한이 한미훈련에 반발해 남북통신선을 절단한 날 ‘고발의혹’ 사주자(使嗾者)조성은과 호텔에서 점심을 했다. 국민들은 국정원장이 그렇게 할 일이 없고 한가한 자리냐고 묻는다.

내란음모·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5일 오후 수원구치소에 구속수감되기 위해 수원 남부경찰서를 나오며 결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2013.9.5(사진=연합뉴스, 편집=조주형 기자)
내란음모·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5일 오후 수원구치소에 구속수감되기 위해 수원 남부경찰서를 나오며 결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2013.9.5(사진=연합뉴스, 편집=조주형 기자)

국정원 무력화와 국가보안법 개정에 미온적 대응

국정원 업무와 관련해서도 부적절한 언행이 많았다. 2020년 8월 민주당 김병기 의원의 국정원법 개정안에는 명칭 변경, 대공수사권 및 국내보안정보 기능 폐지, 국회와 감사원의 통제 강화 등 국정원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는 독소조항들이 많았으나 반대의견 한번 내지 않아 결국 국정원 퇴직직원들의 노력으로 일부 독소조항들이 삭제될 수 있었다.

국가보안법 개정문제에 대해서도 미온적 태도로 일관했다. 국회법사위 전문위원이 국보법 개정안 검토를 위해 제7조(찬양·고무 등) 폐지에 관한 의견을 문의하자 답변서를 보내지 않았다. 경찰이 “청소년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낸 것과는 대조적이다. 

작년 6월 원훈(院訓)을 개정하면서 1년 전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원 방문 시 언급한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을 그대로 원훈으로 채택하고 간첩 신영복의 글체로 원훈석을 새겼다. 5년 임기 대통령의 어록을 조직 모토로 쓰고 간첩 글씨체로 원훈석을 만든 정보기관이 있다니 세계가 웃을 일이다.

국가정보원 청사 내에 설치된 '이름없는 별' 조형물. 업무 중 순직한 정보요원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형물에 새겨진 별은 18개에서 최근 19개로 늘었다. 2021.6.4 (사진=청와대, 편집=조주형 기자)
국가정보원 청사 내에 설치된 '이름없는 별' 조형물. 업무 중 순직한 정보요원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조형물에 새겨진 별은 18개에서 최근 19개로 늘었다. 2021.6.4 (사진=청와대, 편집=조주형 기자)

잘못된 업무 방향: 사이버 안전과 우주정보 주력

박지원 원장은 2020년 12월 권력기관개혁 합동브리핑에서 국정원 역사상 처음으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려는 것 같다. 박 원장 부임 이후 북한정보 분석, 대북공작, 대공수사 등 국정원 고유업무는 뒷전으로 밀리고 남북대화 복원, 종전선언 및 정상회담 추진에 올인하고 있다. 

더욱이 박 원장은 앞으로 사이버 안전과 우주정보 등 미래형 정보기관 기능을 확대할 것이며 전체 예산의 절반을 국가사이버 안전에 투입할 것이라 발표했다.

사이버 안전과 우주정보는 비밀정보기관보다는 관련기술을 보유한 정부 부처가 더 잘 할 수 있는데 국정원의 핵심업무로 설정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국가정보원 본청 현관 모습.(사진=연합뉴스)
국가정보원 본청 현관 모습.(사진=연합뉴스)

잘못된 조직 운영과 기강 해이

박 원장의 조직운영 방식도 이해하기 어렵다. 원장은 국정원을 외풍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해야 하나 박 원장은 취임 초부터 자해적인 언행을 거듭했다. 취임 3일 후 업무파악도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권력기관 개혁 당·정·청 협의’에 참석해 국정원법 개정에 적극 찬성했다.

작년 7월 국회법사위가 국가보안법 폐지에 관한 의견을 문의하자 “국정원의 국보법 범죄 수사권이 폐지돼 국보법 오·남용 소지가 줄어 국보법을 폐지하지 않아도 된다”고 답변했다. 대공수사권 이양과 관련해서는 “완벽히 준비해 대공수사권 이관을 되돌릴 수 없도록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반면, 외부기관에 대한 자료지원에도 매우 적극적이다. 국정원 서버를 뒤져 ‘명예회복심의위원회’에 부마항쟁 진실규명을 자료 132건 1,447쪽을, 5·18 진실규명조사위원회에는 101건 6,888쪽과 사진·영상자료 258건을,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는 세월호 관련자료 68만 건을 제공했다.

인사와 조직기강도 엉망이 됐다. 인사에서는 호남 출신과 국정원 서버에서 자료를 찾아 외부단체에 지원하는 업무를 담당했던 직원들을 중용하고 있고 외부 용역 발주 시에는 개인적 친분을 중시해 불만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박 원장의 조직운영 방식을 좋아하는 직원들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장이 긴장감과 업무 열정이 없으니 일 잘하라 닥달하는 간부도 없고 정시출근·정시퇴근 관행이 정착돼 업무스트레스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원들에게서 정보요원으로서의 야성(野性)과 긴장감, 사명감과 자부심이 사라지고 있어 중간급 간부들은 국정원의 미래를 크게 걱정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국정원이 당면한 문제들은 대통령만 바라보면서 인기를 중시하는 정치인 출신 원장, 전문지식이 부족한 원장, 남북화해·협력을 중시하는 원장, 무기력한 고령의 원장이 지닌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이며 박지원 원장 임명 시부터 예견돼온 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앞으로 국정원장 임명 시 참고가 됐으면 좋겠다.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사진=조주형 기자)
염돈재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사진=조주형 기자)

 

염돈재 객원 칼럼니스트(전 국정원 1차장, 전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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