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근 칼럼] ‘평등경제’ 지향, 가난과 질곡에의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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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20.06.15 14:32:31
  • 최종수정 2020.06.15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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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대통령의 '평등경제', 北체제를 연상...'물질이 충족되지 않는 평등'은 그 자체가 질곡
인간은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간'은 평등하지만 '인생'은 평등하지 않아
평등경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가져오지 않아...평등이 아닌 자유가 모두를 번영시켜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은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우리는 마음껏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지만 남의 몫을 빼앗을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라고 밝힌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O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한 저의는 ?

 ‘너무나 당연한 말을 한 저의’가 무엇인 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는 “내 몫을 늘리려고 남의 몫을 훔치거나 빼앗을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남의 몫을 부당하게 침탈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제도적 장치가 사유재산제도인 것이다. 재산권은 신성불가침의 ‘자연적 기본권’인 것이다. 오히려 모든 것이 국가소유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역설적으로 국가의 자의적 판단으로 개인의 몫을 부당하게 취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북한을 향해 이런 말을 던졌어야 맞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갔다. “평등 경제는 우리가 성취해야 할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주지하디시피 북한체제는 ‘평등경제’를 추구해 왔다. 사유재산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가장 뚜렷한 징표이다. 그러면 반대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북한에 실질적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는 가” 말이다. 평등경제를 지상과제로 삼아온 만큼 북한에는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정착되고도 남았어야 한다. ‘물질이 충족되지 않는 평등’은 그 자체가 질곡이다. 역사의 가르침이다. 북한이 이를 웅변하고 있다. 
  
O ‘오염되지 않는’ 본래적 의미의 평등

 자유와 평등은 인류가 지향해온 보편적 가치이다. 하지만 평등은 이런 저런 정치적 편의로 심하게 오염되었다. 오염되지 않는 본래적 의미의 숭고한 평등은 다음 2가지로 압축된다. “인간은 신(神)에 의해 천부적 인권을 갖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인간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한 것이다. 더 이상 무슨 평등이 필요한 가. “신 앞에, 법 앞에 평등하면” 된 것 아닌 가.   
 
 인간은 ‘던져진 존재’이다. 자신의 외모를, 자신의 부모(재력)를, 자신의 지능(DNA)을 선택하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인간은 자기의지와 관계없이 신(god)에 의해 던져진 존재(被投性)인 것이다. 미제스(Mises)는 이를, ‘자연의 공장문’을 나오는 순간 다시는 같은 것을 두 번 다시 만들지 않는다는 도장이 찍힌 것으로 은유했다. 신(神)에 의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로, 즉 ‘다를 수밖에 없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실존적 자아인 것이다. 

 자연법 및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모든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므로 모든 이에게 같은 양의 정치적, 시민적 권리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를 “동일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평등한 인간”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인류구성원이 동일하다’는 주장보다 더 근거 없는 것은 없다. 사후적, 물리적 평등이 아닌 사전적, 기회의 평등이 맞는 개념인 것이다. 

 ‘인간’은 평등하지만 ‘인생’은 평등하지 않다. 인생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에 ‘한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좌파의 단골 메뉴는 사람은 ‘동일한 출발선상에 서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학은 이를 ‘원초적 상황‘(original position)으로 가르친다. 하지만 원초적 상황은 가상의 개념이다. 사회를 처음 조직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늘 동일한 초기조건을 만들어 왔다. 대학동기도 초기조건의 한 예이다. 입학할 때는 같은 출발이지만 졸업할 때는 이미 차이가 나 있다. 동일한 출발선상에서의 출발을 고집하면, ’프로테스크 침대‘가 되는 것이다. 원초적 불평등은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통제 불가능하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제도적 불공정’을 줄이는 것이다. 경쟁을 인정하되 ‘패자부활전’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O ‘개인’이라는 이름의 기적

 흙수저와 금수저는 양극화를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기보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는 프레임이다. 패배의식과 책임전가의 발로일 수 있다. 종국적으로는 자신의 가족(부모)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흙수저, 금수저론은 ‘헬조선’으로 비약된다. 흙수저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불만을 결집시키고 증폭시켜야 ‘정치적 지지’로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청년활동’ 박스를 제시하고 청년수당을 요구하는 정치적 포퍼먼스(performance)를 종종 목도한다. 청년수당이 정당하다면 노년수당을 요구하는 노년단체도 나와야 한다. ‘청년수당’이 흙수저에 대한 보상일 수는 없다. 수저 색깔을 정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과 노력 및 운이다. ‘기회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면 사회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개인은 달리 태어났기 때문에 평등은 집단 논리이다. 달리 태어난 개인을 평등이라는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 ‘개인’이라는 이름의 기적을 받아들여야 한다. 사회의 미래가 아닌 개인차원의 미래라면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점쟁이는 ‘과거’는 잘 맞히지만, ‘미래’를 맞힐 수는 없다. 미래는 말 그대로 ‘아직 도래되지 않았기 때문’(not yet determined)이다. ‘미래라는 그릇’을 빚는 도공(陶工)은 ‘나’이기 때문에 나만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다. 내가 성공해야, 남의 좋은 이웃이 되고 사회가 건강해 지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이다. 나의 영원한 멘토는 바로 나인 것이다. “사회적·구조적 모순으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을 벗을 수 없다”는 사회 일각의 주장은 과장된 것이다. 사회적 모순을 완화하는 노력을 기울이면 된다. 평등해지기 위해 그런 모순을 제거하는 것이 아닌, 그런 모순을 제거하면 평등해 지는 것이다. 좌파는 늘 ‘인과도치(因果倒置)’의 함정에 빠져있다. 자유를 허(許)하면 세상은 평등해지는 쪽으로 전개된다. 좌파는 구조적 사고에 빠져있기 때문에 ‘자유의지’를 보지 못하고 있다.

 신부(神父)가 탄 마차가 진흙에 빠졌다. 신부는 하나님께 마차가 진흙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혼신을 다해 기도했다. 이때 천사가 나타나 신부의 뒤통수를 치면서, “신부님, 마차를 밀면서 기도를 하셔 야지요”라고 했다. 전율이 솟을 만한 촌철살인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하고 나서 절대자에게 의지해야 한다. ‘구조적·사회적 모순’이라는 허수아비를 공격하면서 모든 것을 남 탓으로 돌리는 사회가 건강할 수는 없다. 

O 여전히 배회하는 ‘마르크스의 유령’ 

 마르크스 ‘공산당 선언(1848)’ 메시지는 명료하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사슬 말고는 잃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The workers have nothing to lose but their chains.) “그들은 세계를 얻을 수 있다. 세계의 노동자들이여, 뭉쳐라”는 것이다. (They have a world to gain. Workers of the world, unite.)  

 선동은 쉽지만, 설득은 어렵다. 만약 대중에게 ‘자유의 가치’를 설득시키려면 긴 설명이 필요하다. ‘대중이 선동의 대상이 되는 사회’는 가난과 질곡에 빠지게 되어 있다. 공산당 선언에 선동되었기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받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이는 분명 낙원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면 개인은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자신의 ‘필요’는 모두 드러낼 것이다. 공산주의가 지속가능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능력에 따라 생산한 것’으로 ‘필요에 따른 분배량’을 충족시킬 수 없게 돼  만성적인 물자부족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O 자유주의에 대한 오해 

 자유주의는 사회 일부분, 유산계급, 자본가 및 기업가의 이익을 다른 계층보다 우선시 하는 것으로 왜곡돼 왔다. 자유주의는 특정집단이 아닌 ‘모든 이의 복지’를 향상시키고자 한 최초의 정치운동이다. 자유주의가 노예제도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노동이 노예노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생산적이어서,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번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모두를 위한 번영(prosperity for all)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6·10 민주항쟁 기념식에서 밝힌 “우리는 마음껏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있지만 남의 몫을 빼앗을 자유는 갖고 있지 않다”라는 소신을 진정 펼치기를 원한다면 ‘평등이 아닌 자유’를 추구해야 한다. 정당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를 자신의 것으로 취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될 때, 남이 내 몫을 뺐지 못하고 내가 남의 것을 침탈하지 못한다. 평등경제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며, 자유를 보장해 경제의 역동성을 높일 때 빈곤에서 벗어나 실질적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것이다.

조동근 객원 칼럼니스트 (명지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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