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미국에 종전선언 채택을 거듭 요구하는 가운데 미국의 전직 외교 당국자들은 북한이 의미 있는 비핵화 조치를 내놓으면 종전선언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미 국무부 비확산담당 부차관보 대행을 지낸 마크 피츠패트릭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 워싱턴사무소 소장은 미국의소리(VOA)방송에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를 ‘다목적 카드’라고 지적했다. 피츠패츠릭 소장은 “북한은 종전선언을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한다는 분명한 표시로 간주한다”며 “미국의 적대 정책 때문에 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북한은 종전선언을 미북 관계 정상화, 체제 안전 보장에 대한 미국의 의지를 확인하는 첫 조치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주한미군 주둔의 정당성을 약화시킴으로써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변화와 주한미군 철수로 이어지도록 하려는 계산도 깔렸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한국정부도 종전선언을 강력하게 원하는 만큼 한미 대북 공조의 틈을 벌리는 카드로도 활용하려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게리 세이모어 전 백악관 대량살상무기담당 조정관은 VOA에 북한의 종전선언 요구를 ‘협상전략’으로 분석했다.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추가 비핵화 조치에 대한 대가로 미국이 종전선언을 제안하면 북한은 여기에 제재해제나 경제제원을 담은 ‘역제안’을 제시할 것”이라며 “종전선언은 상징적인 선언일 뿐 체재 안전보장을 위한 실체적 혜택이 없으며 북한도 과거 경험을 통해 이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과거 1994년 제네바 합의와 2005년 9.19공동성명에도 북한 체제의 안전보장에 관한 약속이 명시됐지만 북한은 이것을 핵무기를 대체할만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설명이었다.

북핵 6자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를 지낸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VOA에 비핵화에 소극적인 북한이 비열한 선동적 속임수를 동원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힐 전 차관보는 “종전선언 압박은 비핵화와 무관하며 미북 관계 정상화, 제재 완화, 한미동맹 균열을 꾀하려는 북한의 시도”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미국 정부는 북한이 비핵화에 진지함을 보일 때 즉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할 때 종전선언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미국정부의 고민은 종전선언 요구를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조건으로 하느냐”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세이모어 전 조정관은 북한의 핵물질 생산 동결을 종전선언을 위한 선제조치로 제안했다. 그는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플루토늄과 농축 우라늄 이상의 핵물질 생산을 제한함으로써 추가 핵무기 생산 또한 동결시킬 수 있다”며 “이와 동시에 명확한 검증 메커니즘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종전선언뿐만 아니라 연락사무소 개설, 일부 제재 완화 등 모든 요소를 포함한 포괄적 제안을 준비해야 협상의 여지가 많아진다”며 “특히 제재 완화의 경우 한국정부가 희망하고 있는 남북 철도 경협과 관련된 부분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피츠패트릭 소장은 종전선언과 동시에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핵미사일을 신고하는 동시선언(dual Declaration)을 제안했다. 이에 검증을 비롯한 비핵화 시간표까지 포함된다면 더욱 이상적이라는 설명이었다. 또는 검증 가능한 핵물질 생산 동결과 종전선언을 맞바꾸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종전선언은 잘만 활용하면 미국에도 유용한 카드가 될 것”이라며 “종전선언을 대가로 북한에 의미있는 비핵화 조치를 요구하면서 한미동맹을 관리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여기엔 기회비용이 따르며 오직 한번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했다.

북한은 미국과 본격적인 비핵화 협상을 앞두고 종전선언을 거듭 압박하고 있다. 지난 23일에는 선전매체를 통해 “종전선언 채택, 외면할 이유가 없다”며 미국의 결단을 촉구했다.

양연희 기자 yeonhee@pennmik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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