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 칼럼] 상징자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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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8.28 09:21:47
  • 최종수정 2018.08.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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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신체자본

상류층일수록 큰 키에 얼굴이 잘 생긴 남성과 날씬한 몸매에 얼굴이 예쁜 여성들이 많다. 신체의 속성이 사회계급별 분포상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신체가 사회적 위계에 상응하므로, 한 사람의 신체에 대한 미적 표상은 그의 사회적 계급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결국 신체 자본은 경제 자본과 나란히 간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생물학적 유전이 가끔 다른 모든 측면에서 전혀 혜택 받지 못한 계층에게 최고의 미모를 선물하는 변덕을 부릴 때가 있다. 상류층의 우아함이 느껴지는 빼어난 미모의 가수와 배우들이 거의 아주 가난한 가정 출신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자주 놀란다. 일반적 계급 위계를 위협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우리는 흔히 치명적(fatale)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아름다운 재벌가 상속녀를 보고 치명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극심하게 가난한 배경에서 성장한 미모의 여성이 배우로 혹은 스파이로 한 시대를 풍미했을 때 사람들은 그녀를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고 부른다. 물론 반대로 생물학적 우연성이 상류층으로부터 큰 키나 미모 같은, 이들의 지위에 걸 맞는 신체적 속성을 박탈하는 경우도 있다. 미모와는 거리가 먼 재벌가 여인을 보며 온 나라의 소시민 계층 여성들은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낀다.

식사 예절

음식 취향이야말로 계급적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영역이다. 식사란 배고픔이라는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에 불과한데, 여기에 온갖 형식을 강요하면서 욕구를 검열할 때 우리는 그것을 상류사회라고 부른다. 상류사회의 식사는 엄격한 예의와 세련된 형식이 지배하는, 본질적으로 아래 계층과의 차별을 나타내는 사회적 의식(儀式)이다. 음식의 조리법, 내놓는 순서, 식사의 규칙이 엄격히 정해져 있고, 테이블 세팅도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거의 예술작품의 수준으로 배치된다. 좌석도 서열에 따라 배치되는 것은 물론이다. 상차림과 서빙하는 방식도 그렇지만, 손님의 태도와 몸가짐, 음식을 먹는 방식, 다양한 식기구 사용의 에티켓도 완전히 규격화되어 있다. 소리를 내 음식을 씹거나 배고픔을 드러내는 서두름은 하층민적 행동이므로 바람직하지 않다. 식사의 쾌락 자체를 검열하는 이 엄격한 의식은 결국 음식에서 즉각적 만족을 탐닉하는 하류계층의 비천한 물질적 저속함으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기 위한 상류층의 차별화 관습이다.

멋 내기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은 지배층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캐주얼하고, 그 층에 접근할수록 진지해져, 어두운 색깔에 엄격하고 고전적인 패턴이 된다. 근로계층일수록, 그리고 또 사회적으로 젊을수록, 즉 동일한 계층에서도 생물학적 나이가 젊을수록, 또는 첨단 직업에 가까울수록 정장차림은 자취를 감춘다. 이들은 정통적 예의가 요구하는 옷차림의 강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옷차림 형태, 즉 주니어 패션이나 유니섹스 복장, 청바지, 셔츠 등을 즐겨 입는다.

근로계층의 여성들은 다른 계층에 비해 미의 상품가치를 별로 의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화장이나 성형 등 신체 교정에 투자하는 돈과 시간, 노력 등이 아주 미미하거나 거의 없다. 그러나 같은 계층이라도 미용에 관한 규범을 철저히 따를 것을 요구받는 직업을 가진 여성은 신체 교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에 비해 소시민 계층 여성들은 신체가 자본으로 기능하는 시장 논리를 충분히 알고 있지만, 자신이 최대의 이윤을 획득하기에 충분한 신체 자본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심한 긴장감을 느낀다.

자신감

현실의 신체와 이상적 신체 사이의 부조화가 클수록 사람은 자기 신체에 대해 불편함, 부자유, 수줍음을 느낀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자기 존재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차분하고 논리적인 대화를 이끌지 못한다.

소시민 계층만 그런 건 아니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 자신의 신체와 언어를 아주 수줍어하고 불편하게 느끼는 젊은이들은 대부분 소시민 계층이다. 이들은 자신의 신체와 언어를 자기와 한 몸처럼 느끼는 대신, 마치 타인의 시선으로 외부에서 바라보듯, 자기 몸과 언어를 스스로 감시한다. 이렇게 소외된 자신의 존재를 다시 가져오기 위해 교정과 수정이라는 필사적 시도를 하지만, 그러나 그 과잉교정과 서투른 시도는 실패하여, 결국 스스로를 타인의 대상으로 전락시켜버린다. 자신의 신체를 타자의 시선 앞에 본의 아니게 노출시켰다는 당혹감이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은 수동적이고 무의식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상류층의 젊은이일수록 타인의 시선을 오만한 무관심으로 중화시켜버린다. 이런 편안함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힘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기인한다. 소시민계층이나 벼락부자들은 과잉자세로 티를 냄으로써 스스로의 불안감을 노출하지만, 상류층은 무심한 신중함과 침착함으로 계급적 자신감을 드러낸다.

한 특정인의 키가 어느 정도인지 평가해 달라고 요구하면, 사람들은 그 인물이 권위나 위엄이 있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키를 실제 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위대한 사람은 신체적으로도 커다란 사람일 것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권위에 대한 이와 같은 무의식적 존경을 사심(私心)에 의한 비굴함이라고 여기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권력자를 조롱할 때 캐리커처가 사용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신체가 무너지면 카리스마도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TV 화면은 그렇게 자주 수척한 얼굴에 죄수복을 입은 박근혜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비쳐주는가.

학벌

영어의 school이나 프랑스어의 école은 그리스어의 scchope에서 나왔는데, 이는 ‘한가한 시간’이라는 의미였다. 사색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라는 의미로 특수화되어,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장소인 학교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한가한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상류층이라면, 역시 학교는 원천적으로 계급적인 장소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학교를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해 왔던 상층계급은 학벌의 상대적 희소성을 유지하고 또 계급구조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교육 투자를 계속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계층이 다 고등학교를 다니면 상류층은 대학에 투자를 해만 했고, 모든 대중이 다 대학에 가면 상류층은 그보다 높은 대학원을 만들어, 학사, 석사, 박사의 관문을 마련해야만 했다. 이처럼 학력을 부여하는 대학은 계급 간 경쟁의 핵심적 제도가 되어, 결국 교육수요의 전반적이고 계속적인 증대와 학력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여성취학률의 급속한 상승도 학력의 가치하락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 결혼시장에만 투입되었던 여성의 학력이 노동시장에 투입됨에 따라 교육 수요가 현저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25~34세의 여성으로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의 비율은 1962년에는 67.9%였지만, 1968년에는 77.5%, 그리고 1975년에는 85%에 육박했다. (이 통계숫자를 제시한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는 1979년에 나온 책이다). 같은 시기 한국의 경우는 그 숫자가 훨씬 아래를 밑돌 것이다. 그러나 ‘결혼시장에 투입되었던 여성의 학력’이라는 묘사는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도 한때 가정과와 약학과 졸업생이 신부 감에 적합하다고 인기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어쨌거나 과거 대학졸업 학력에 매겨졌던 평가는 새로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사물 특유의 관성에 의해 아직도 과거의 평가가 명목상 유지되고 있다. 학교제도와 거리가 먼 사람들일 수록, 그리고 학력 시장에 대한 정보가 적은 사람들일수록 이런 관성 효과는 더 확실하게 나타난다. 가령 이전 상태의 시장에서는 대학 졸업의 학력이 가장 높은 이익을 획득할 수 있는 자격이었지만 이제는 그 가치가 하락되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대학 졸업장은, 말하자면, 명목 임금은 유지되어도 실질임금은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 하락하고 있는 봉급 액수와도 같아서, 대학생들은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치면 일종의 불환지폐(不換紙幣)를 받고 사회에 나오는 셈이다. 대학 졸업의 학력은 더 이상 사회관계 자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이 1979년이었던 것을 여전히 상기하자. 당시 한국의 대학생들은 너무나 높은 사회자본을 누리고 있어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최고 지성으로 여겨졌었다.

경제자본, 문화자본, 사회자본

마르크스는 돈이 많고 부유하다는 것만으로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을 갈랐다. 자본가 계급과 무산 계급이라는 명칭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현대의 상류층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건강하고 잘 생긴 외모에 고가의 옷을 입고 쾌적한 넓은 집에서 산다. 알고 보니 공부도 잘 하여 일류 학교를 나왔다. 어릴 때 익힌 솜씨로 악기 연주 능력이 탁월하고, 어릴 때부터 유명 화가의 회화 작품을 집안 거실에서 보고 자랐던 터라 미술에 대한 안목도 상당히 높다. 소위 문화자본을 소유하고 있다. 게다가 비슷한 수준의 계층과 교류함으로써 친구들도 대부분 상당한 재력과 권력을 가진 상류층이다. 뭔가 도움이 필요할 때 즉각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인맥이다. 사회 자본을 갖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는 경제적 자본만이 아니라 문화자본, 사회자본, 상징자본 등도 역시 계급을 구성하는 중요 지표라고 했다. 단순히 생산수단의 소유로만 계급을 규정했던 마르크스와 달리 부르디외는 문화요소를 계급의 주요 변수로 분석했다. 또한 경제를 하부구조, 문화를 상부구조로 확연하게 구분했던 마르크시즘과 달리 경제와 문화가 서로 혼합되어 계급을 구성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자본이란 경제자본만이 아니라,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이 추가된 총체적 자본이다.

경제자본은 누구나 잘 알다시피 금전이나 부동산 등 물질적 자원이다.

문화자본을 딛고 계급의 장벽을 넘는 어린이.
문화자본을 딛고 계급의 장벽을 넘는 어린이.

문화자본은 물론 일차적으로는 골동품이나 미술작품처럼 수집가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적 사물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한 개인의 육체와 정신 속에 체화된 문화적 취향이다. 주로 교육과 훈련에 의해 얻어지며, 언어능력이나, 문화 인식, 미적 선호, 학벌 같은 것들이다. 문화자본은 경제적 수단과 상관없이 사회적 유동성을 높여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결코 상류층이 아닌 작가, 예술가들이 작품이라는 상징 자산을 통해 최고급 상류층과 가까이 지내면서 사회적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사회자본은 사회 연결망 속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잠재적 자본으로, 인맥 같은 것이다. 만일의 경우 유용한 후원을 제공해줄 수 있는 사회 저명인사와의 친분 관계, 유력한 단체의 회원으로 소속되어 활동하기, 경제자본이 많은 재산가나 문화자산이 높은 문화계 인사들과의 교류 관계 등이 그것이다.

상징자본은 이 세 자본들이 합쳐져 형성된 명성이나 명예 또는 사회적 이미지이다. 실체적 자본이 아니라 추상적 자본이라는 점에서 모든 문화자본이나 사회자본을 포괄적으로 상징자본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자본들의 분배가 계급을 결정짓는다. 그러니까 이 자본들을 다 합친 자본의 총체가 클수록 상류층이 되거나 상류층에 가까워진다. 이 세 가지 자본들은 각기 다른 자본들을 취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돈이 많아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되고, 골프나 스키 같은 고가의 스포츠나 레저도 즐길 수 있다. 그러다 보면 비슷한 취미의 사람들과 교류하게 되어 자연스럽게 사회적 자본도 쌓이게 된다. 사회적 자본을 소유한 사람은 신뢰의 이점으로 인해 쉽게 사회적으로 성공할 수도 있으므로, 또한 경제적 자본도 쉽게 얻을 수 있다. 이처럼 각각의 자본 유형은 상호 관련되어 상호순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일종의 순환출자라고나 할까.

더군다나 당장은 아니라도 한 세대 내려가 자식들을 상류층으로 만들어 줄 수 있다. 가령 자수성가하여 경제적 자본을 소유하게 된 사업가가 비록 자신은 예술에 대한 특별한 선호가 없더라도 풍부한 재력으로 인해 자녀들에게 그런 교육을 시킬 여유가 있으므로, 그의 자녀들은 얼마간의 시간적 격차를 두고 문화자본을 소유하게 된다. 다른 부유한 가정과의 교류로 인맥도 구축할 수 있어 사회적 자본도 소유하게 된다.

아비투스(habitus)

자본 중에서는 문화자본이 가장 중요하다. 문화자본은 아비투스의 형태로 한 개인 안에 내재화되어 계급을 재생산 한다. 아비투스란 한 개인의 문화적 취향 또는 관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사회적 지위, 교육 수준, 사회 계층, 가정환경 등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한 개인 안에 내면화된 문화적 성향이다. 정치적 견해와 철학적 신념, 도덕적 확신과 미적 선호 같은 고차원의 경향만이 아니라 성, 음식, 의복 등과 관련된 일상적 습관들이 모두 아비투스이다. 포도주보다 소주를 좋아하거나, 정치 영화보다 액션 영화를 좋아하는 것, 또 좌파보다 우파에 표를 던지는 것이 모두 아비투스의 산물이다. 사회화 과정에서 은밀하게 자손에게 상속되기 때문에 얼핏 개인적인 산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개인적인 현상이면서 동시에 특정 계급의 동질적 성향이다. 학교에서 얻어지기 보다는 가족을 통해 먼저 얻어지므로, 부(富)가 대물림 되듯 아비투스도 전승된다.

결국 아비투스란 한 마디로 개인 안에 내재된 사회계급이다. 각 개인은 자기 내면 안에 자기가 속한 계급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즉 상류층은 상류계급의 아비투스를, 하층민은 하층계급의 아비투스를 내면화하고 있다. 한 개인의 문화적 취향도 아비투스이고, 한 계급의 문화적 취향도 아비투스이다. 개인은 자신을 계급 아비투스에 확실하게 동화시킴으로써 계급을 재생산하고, 동시에 자신도 지속적으로 그 계급에 귀속된다. 아비투스는 사회 질서를 재생산하는 토대이고, 계급을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용어의 어원은 성질, 기질(disposition)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엑시스(hexis)이다.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번역하면서 아비투스로 번역했다. 현대에 와 이 용어가 되살아난 것은 부르디외가 1967년 어윈 파노프스키의 『고딕 건축과 스콜라철학』의 후기에서 사용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이 말은 부르디외 고유의 사회학 용어가 됐다.

상징 폭력

취향은 귀족적 품격의 가장 확실한 기호(記號)이다. 한 사람의 미학적 선택은 그의 계급 영역을 결정하면서, 하나의 계급을 다른 계급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더구나 취향은 어린 나이에 가르쳐지므로 그것은 아주 깊숙이 내면화된다. 예컨대 한 상류층 어린이에게 어떤 종류의 음식이나, 음악, 미술에 대한 성향을 가르치고 주입하면, 이 아이는 자신에게 내면화된 이 계급-특정적 취향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걸 맞는 계급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어린 시절에 습득된 이런 행동과 가치들은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하여 다른 사회 계급의 문화나 예술과 조우하게 되면 마치 공포에 의해 유발된 듯 심한 불쾌감을 느낀다. 인간은 타자의 취향을 거의 본능적으로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 주입되고 취득된 취향은 영원히 한 인간을 한 사회계급의 구성원으로 만들어주며, 사회적 유동성을 방해한다. 즉 다른 계급으로 이동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계급이 재생산되고 유지되는 것은 그러므로 경제자본 보다는 차라리 문화자본을 통해서이다. 문화자본의 취득과 주입은 지배계급의 문화적 재생산과 사회적 재생산을 확보하기 위한 은밀한 메커니즘이다. 결국 취향은 문화적 헤게모니와 계급을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방식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하층 계급은 언제나 상류층의 취향을 선망한다. 그리하여 계급적 차이를 아주 자연스럽게, 또는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한편 지배계급은 아래 계층 사람들을 무식하고, 거칠고, 몰취미하다고 규정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지배적 취향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이렇게 해서 다른 사회계급의 취향을 지배한다. 이것이 상징 폭력이다. 우리의 조선 시대가 양반과 상놈의 계급 차이를 5백년 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런 식으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상징폭력도 양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층계급은 상층계급의 틀에 박힌 상투성을 무식과 위선이라고 조롱한다. 하층계급이 상류층의 생활양식을 악착같이 모방함으로써 모든 상류계급의 관습이 대중화되기도 하였다. 상류층 자신들도 하류 문화에 동화되려 애쓰고 있다. 아비투스도 영원히 고착된 것은 아니며, 사회변화에 민감하게 변화한다. 상류층 젊은이들이 캐주얼한 스트리트 패션을 선호하는 바람에, 값비싼 명품 시장이 심각한 매출 하락을 겪고 있다고 한다. 여하튼 세상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시대착오적 정책 실험을 그치지 않는 현 정권 담당자들만이 아직 대학생이 최고의 지성인이던 시절의 아비투스를 고수하고 있는듯하다.

박정자 객원 칼럼니스트(상명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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