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영 칼럼] '정부 만능'이라는 '치명적 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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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8.21 09:29:46
  • 최종수정 2018.08.22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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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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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포용적 성장’과 문재인 정부의 ‘포용적 성장’ 무엇이 다른가

2012년 2월 23일 이명박 대통령은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와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주최한 ‘글로벌 코리아 2012’ 기조연설에서 "시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시장만능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고 했다. 그 전날 22일에는 중소기업과 공생발전을 거부하는 대기업문화가 있다고 비판하며 대기업이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시장만능주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경제모델로 ‘포용적 성장’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는데도 소위 진보좌파는 이명박 정부 시기의 경제 운용을 ‘신자유주의’ 약탈경제로 보고 한국경제가 잘못 흘러간 기간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아이러니컬한 것은 최근 청와대 발표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을 상징하는 간판으로 ‘포용적 성장’을 내걸고 있는데 문재인 정부의 ‘포용적 경제성장’이 이명박 정부의 ‘포용적 경제성장’을 계승하는 것인지 만일 다르다면 이명박 정부의 ‘포용적 경제성장’ 또는 ‘공생발전’과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다.

핵심은 ‘시장만능주의’라는 출처 불명의 단어가 청와대를 포함하여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있다는 것이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대통령이든 고위 관료든 정치인이든 우리 경제를 ‘시장만능주의’로 인식하고 정부와 정치권의 역할을 이러한 ‘시장의 우위’를 규제하는 것으로 보는 비뚤어진 사고가 지배적이라는 점이다.

‘정부 만능주의’와 ‘치명적 자만’

하지만 ‘시장 우위’라는 현상이 대한민국에 존재한 적이 있는지 진정 의문이다. 가깝게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진행되어 온 ‘재벌 손보기’를 보더라도 일부 대기업 총수들은 찍히면 기업이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위기라며 벌벌 떨며 초긴장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모습뿐이다. 특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7월 9일 인도(India)의 삼성 신공장 준공식에서 보여준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90도 인사’와 8월 6일 삼성전자를 찾은 김동연 기획재정부 장관을 맞으면서 한 ‘90도 폴더 인사’를 보면 대한민국의 진정한 권력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대한민국에 ‘시장 우위’라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음은 정부주도 경제개발이 시작되기도 전인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역사적 사실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만난 이병철 삼성회장은 존경하는 태도로 진심으로 대통령을 대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의 경력과 국부(國父)라는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간간이 있어온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와의 만남은 철저히 기업에 대한 ‘관(官)’의 우위의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왕(王)-관료(官僚)-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서열은 근대화된 대한민국에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관료-사농공상의 서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정부 만능주의’다. 대한민국이나 중국 등 과거 유교국가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영국에서는 근대화 과정 중 부르주아에 의한 산업화가 먼저 있었고 그 산업화의 부에 바탕을 둔 부르주아가 의회를 장악하여 왕을 권좌에서 내리고 경제권력과 정치권력을 동시에 장악한 의회민주주의를 만들었기에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난 뒤 뒤늦게 진행된 산업화로 탄생한 대한민국의 기업가와는 권력의 본성이 다르다고 하겠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는 과거부터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해야 하며 또 정부만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물론 이는 ‘헛된 믿음’이다. 정부만이 이상(理想) 사회를 만드는 설계를 할 수 있고 또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을 갖추었다는 ‘잘못된 믿음’인 것이다.

이를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는 ‘치명적 자만’(fatal conceit)이라고 불렀다. ‘치명적 자만’은 하이에크가 마지막으로 쓴 책 『치명적 자만(The Fatal Conceit)』(1988)에서 전개한 개념으로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사회주의가 왜 잘못된 것인지를 논증했다. 인간의 이성(理性, reason)이 불완전한데도 이성의 힘을 과신하여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에 따라 사회주의(socialism) 계획경제(planned economy)를 만드는 오류를 인류가 범했다는 것이다. 사실 무지(無知)야말로 인간에게 자유가 필요한 근거임에도 불고하고 구성주의적 합리주의에 따라 ‘자생적 질서’를 만드는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는 ‘치명적 자만’이라는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은 유교적 사농공상의 논리에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 시장(market)을 불신하고 정부(government)에 대한 신뢰가 높다. 서양에서는 부르주아가 이룩한 산업화로 해결할 수 없는 복지의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개입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어 해결해야 한다는 수준이라면 대한민국에는 세월호 사태라는 국민 안전에서부터 무더위 전력 요금 인하라는 공공요금 수준 결정까지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정부가 나서야 하고 또 나서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이것이 정부가 일자리 창출에서 최저임금, 물가 통제, 골목상권 보호, 대기업 지배구조 변화, 대형마트 영업시간 통제까지 오지랖 넓게 모든 것에 개입하는 만능 ‘개입주의 국가’(interventionist state)가 되는 근거이다.

예를 들어 정론을 펼치는 많은 경제학자들이 임금은 노동을 제공하고 제공 받는 대가에 대한 개인과 기업의 사적인 계약이므로 국가나 사회가 공적으로 개입할 사안이 아니라고 누누이 지적했음에도 정치인, 관료, 언론은 당연히 최저임금을 정부가 ‘관여’해야 – 이해관계에의 ‘개입’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식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듯이 큰 뜻의 부성주의(paternalism)에 의거하여 ‘관여한다’는 의미다 – 하는 사안으로 생각했다.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대책’ 역시 ‘정부가 당연히 계획하여 개입하고 정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정부 만능’이라는 자만심과 계획에 의한 해결이라는 ‘치명적 자만’이 동시에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치명적 자만’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자리 대책’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1호 업무지시로 ‘일자리위원회’ 구성을 지시했다. 집무실에 ‘일자리 상황판’을 설치하고 대통령이 직접 기자들 앞에서 시연하며 보여주었다. 일자리 창출이 제1의 국정과제임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일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인식과 꼭 이루겠다는 의지를 함께 보여주며 호기(好機)있게 출발했다. 그리고 언론은 적어도 일자리 창출만큼은 정권의 생명처럼 챙길 것이라고 기대 섞인 보도를 했다.

하지만 2018년이 되자 1월 10일 통계청 발표에 따른 청년실업률은 9.9%로 2000년 기준으로 최악이었고 더구나 체감실업률 22.7%는 관련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낮아졌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개입에도 불구하고 증가한 청년실업률은 무시하고 1월 25일 청년일자리 점검회의에서 청년 일자리 문제는 “정부야 꼭 해야 할 일이고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강조하면서 동시에 “일자리는 민간이 만드는 것이다, 시장에 맡겨야 한다는 식의 고정관념이 지금 정부 각 부처에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그런 고정관념이 청년 일자리 대책을 더 과감하게 구상하고 추진하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에 있어서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조하며 ‘특단 대책’을 주문했다. 핵심은 “일자리는 민간(기업)이 만든다는 관념을 깨라”는 대통령의 준엄한 지시와 일반 상식과는 다른 일자리 인식이다.

사실 일자리 창출은 한마디로 정부가 용을 쓴다고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나서주어야 한다는 것은 초등학생만 되어도 아는 사실이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과 언론이 문재인 정부의 ‘일자리 창출’ 정책이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의 실패를 되풀이 할 것을 우려했다. 정부주도의 ‘창조경제’와 정부주도의 ‘일자리 창출’이 다르지 않은 정부 만능주의라는 동일한 사고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이 공공 부문이 나서서 일자리를 만들라는 지시가 있고 난 뒤 7개월이 지난 지금 통계청이 8월 17일 발표한 ‘7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취업자 수가 2708만 300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5000명 늘었다.” 지난해 같은 기간 늘어난 취업자가 31만 명이었으니 증가 폭이 60분의 1수준으로 쪼그라든 고용 참사를 만들어낸 셈이다.

청와대는 대통령에 대한 고공(高空) 지지도로 인해 “문재인 정부는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무슨 일을 하던지 다 옳다”는 확신으로 공공부문 주도의 일자리 창출, 적폐청산,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을 강하게 밀어 붙여 왔다. 그러나 최저임금이라는 ‘선한 의도’의 정책조차도 시장의 자유에 근거하지 않는 강제적인 것이라면 시장은 반대로 반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장을 무시한 ‘치명적 자만’의 정부가 맞이한 피할 수 없는 파국적 결과였다. 정부의 “합리적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은 디자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구성주의적 합리주의”가 만들어낸 참사인 것이다.

주류 경제학 이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임금주도성장이란 정책을 추진하느라 최저임금을 2년만에 29%를 올리는 무리수를 두었기 때문이다. 무리하게 정책을 밀어 붙여도 그 ‘선한 의도’ 때문에 언론의 비판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장 왜곡으로 발생하는 문제점들은 유야무야 얼버무려 언론의 비판을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생업에 해당하는 중소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불만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따라서 중소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의 불만을 억누르고자 세금으로 손해를 메워주는 또 다른 정부개입 정책으로 나아갔다.

정부개입이 정책 실패를 낳고 그 실패를 흐지부지 잠재우고자 더 큰 정부개입을 준비하느라 날을 지새우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또 다른 정부 개입의 실패는 역대 정부도 똑 같이 저지르는 부동산정책이다.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는 약속은 거의 모든 정권이 했고 거의 모든 정권이 동일하게 실패했다. 문재인 정부가 ‘투기 세력을 잡겠다’고 시행한 8·2 부동산 대책의 결과는 지방은 집값을 묶어두고 서울지역의 ‘집값 급등’이었다. 투자냐 투기냐는 시장이 결정함에도 정부 결정으로 투기로 몰았으니 시장이 거꾸로 반응하였던 것이다. 문제는 서울지역 집값을 잡기 위해 또 다른 정부 규제가 필요한 상황이 된 현실이다. 규제는 또 다른 규제를 낳고 또 더 강력한 규제를 필요로 한다. 개입만능 정부의 결과는 규제공화국인 것이다.

이제 정부가 개입할수록 시장은 반대로 반응하며 정부의 무능(無能)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현상이 되풀이 되고 있다. 과거 정부에서 집값 잡기에 실패하고 그 실패를 무마하고자 만든 저소득층임대주택이나 저소득청년 반값월세 등 집값잡기 정책이 성공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없다. 모두 정부가 집값을 통제해야 하고 정부만이 할 수 있다는 정부와 정치권의 정부 만능주의가 그 실패의 핵심에 있다.

문재인 정부의 국정 제1과제인 일자리 창출 정책이 일자리 참사로 드러났음에도 청와대와 정부는 계속해서 ‘남 탓하기’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인구 구조의 변화로 취업인구가 줄고 있다느니 고령화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고 있다느니 ‘사드 제재’의 후유증으로 아직 중국 관광객이 예상만큼 돌아오고 있지 않다는 변명은 이미 일반인들도 아는 고정화된 상수이다. 따라서 그런 ‘남 탓’은 이젠 변명거리가 될 수조차 없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의 일부 의원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의 ‘고용 악화’도, ‘분배 악화’도, ‘성장 둔화’도 모두 이명박·박근혜 정부 탓이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현 청와대와 정부는 과거의 잘못을 극복하기 위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지난 15개월 동안 손 놓고 있었다는 자기 고백 밖에 되지 않는다. 나아가 청와대가 변명의 근거로 삼고 있는 예상하지 못하는 외부적 요인도 사실은 예상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정부의 역할을 시장의 실패를 교정하는 ‘전능(全能)함’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시장의 변화도 예측하지 못하는 정부가 시장의 실패를 어떻게 교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제 국민도 언론도 얼치기 관변학자도 정부가 만능이 아님을 확인해야 한다. 정부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또 잘 할 수 있다는 사고는 환상(幻想)이자 거짓된 판타지(fantasy)다. 정부는 실패와 실수로 망치기만 할뿐이고, 가끔 시장과 기업 덕분에 성공을 기록할 뿐임을 기억해야 한다.

정부의 ‘치명적 자만’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을 무시하고 말살했기 때문에 발생했었다. 정부가 자신의 능력을 인지하고 ‘작지만 작은 행복의 추구’ 등 개인에게 맡길 것은 개인에게 맡기고, 입시는 대학에게 맡기고, 일자리는 기업에게 맡기고, 최저임금은 개인과 기업의 사적(私的) 계약에 맡기고, 집값은 수요와 공급 메카니즘에 맡기는 등 자제하면 외부의 개입이 없으니 도리어 성공할 수 있다. 과거 박정희 경제개발의 핵심은 정부주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정부가 기업의 경영이나 지배구조(governance)에는 개입하지 않고, 기업끼리 해외시장에서 경쟁시키고, 또 잘한 기업인에 대해 사농공상의 서열을 파괴하고 최고로 대우했기 때문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내걸었던 구호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였고 전국을 뒤흔들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 본질은 이승만 독재나 정치 탄압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었고 당시에 만연한 ‘빈곤과 실업’으로부터 탈출을 요구한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가 친노조 정책 때문에 최저임금 인상과 주당 52시간 노동시간 단축을 고집하고 기업을 멀리하여 실업 재난이 계속되고 악화되어 과거의 ‘못살겠다’는 구호가 다시 나올 것이 두렵다.

김인영 객원 칼럼니스트(한림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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