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삼 칼럼] 북한의 ‘건국’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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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승인 2018.08.20 09:57:04
  • 최종수정 2018.08.21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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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적 자주성은 물론 주체적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 마적단 출신이 세운 허위·기만·사기·거짓의 북한 건국 과정을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모르니까 사기의 선동 수법이 먹히는 것이다.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

‘건국’이 문제란다.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 건국일이 아니라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민중의 열망을 무시하고 미제의 힘을 끌어들여 분단정권을 출범시킨 몹쓸 날이란다. 따라서 ‘건국’은 1919년 중국 땅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한 날이 되어야 한다고 이 나라의 대통령까지 나서서 선언을 해버렸다.

제 나라 건국일에는 침을 뱉는 인간들이 북한 정부가 출범한 1948년 9월 9일은 ‘건국절’이라고 정중하게 예우한다. 반제 반봉건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혁명적 열기를 수렴하여 식민 잔재와 봉건 잔재를 척결하는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성공했으니까 예우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북한 건국절을 전후하여 남북정상회담이 예고되었으니 그야말로 민족공조에 의거하여 북한의 건국절에 축포를 쏘아 올리는 셈이 된다. 대체 뭘 어쩌자고 이러는 것일까?

정해구․최장집은 1989년 한길사가 펴낸 『해방전후사의 인식』제4권에 게재한 「해방 8년사의 총체적 인식」이란 논문에서 해방공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남한에서는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 실패하여 반혁명으로 귀결된 데 비해 북한에서의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민중들의 혁명열기가 소련군의 후원이라는 유리한 조건 속에서 혁명의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이란 공산화를 말하는데 남한에서는 그것이 실패했고,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후원을 얻어 공산화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193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이 정립한 민족·민주혁명 이론은, 나라에 따라 신민주주의혁명이나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것을 실천한 모든 나라에서 예외 없이 실패했다. 우리가 대한민국의 건국을 부정·비난·거부·부인하는 좌익·전체주의 신봉세력들의 난동에 혈압을 높이기에 앞서, 그들이 그토록 경하해 마지않는 38선 북쪽에 공산정권을 수립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진짜 건국 과정을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을 통해 해부해 보기로 한다.

소련군 대위 김성주를 면접 본 스탈린

1945년 9월 19일 오전 11시, 트롤어선을 개조하여 만든 소련 군함 푸가초프호가 원산항에 입항했다. 이 배를 타고 소련군 88특별정찰여단 소속의 대위 김성주를 비롯하여 소련 국적의 한국인 2‧3세 등 80여 명이 상륙했다.

다음날인 9월 20일, 스탈린은 극동전선 총사령관 알렉산드르 바실레프스키와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 및 제25군 군사평의회 앞으로 “북조선의 모든 반일적 민주정당과 단체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하여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력을 수립하는 것을 원조할 것”이란 극비 지령을 발송했다.

스탈린의 지령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북한에 소련을 추종하는 공산 단독정권을 수립하라”는 명령이었다. 대신 소련군정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대리인을 내세워 일을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 지시에 의거 소련군정 사령부 첩보국과 특수선동부는 자신들이 5년여 하바로프스크의 88특별정찰여단에서 훈련시킨 김성주의 출생지에서부터 가족사항, 학력, 성분, 중국공산당 입당과 활동사항, 빨치산 운동 등 신상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김성주가 만주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무공을 세웠는지에 대해서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 주민들 사이에 진짜 항일 빨치산 운동을 벌인 ‘김일성 장군’이 존재했으며, 조국이 해방되었으니 메시아를 갈망하듯 그 장군님이 개선하여 민족을 이끌어주기를 원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두뇌 회전이 뛰어난 소련군정 정치사령부 장교들은 이 대목에서 ‘미래의 수령 만들기’ 모티브를 얻었다. 소련군은 김성주를 ‘전설적인 항일 투쟁의 명장 김일성 장군’으로 바꿔치기하여 북조선 수령에 올린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소련군정 정치 책임자 스티코프 선에서 구상됐고, 휘하의 레베데프와 로마노프, 메크레르와 강미하일 등 정치장교들이 실무를 담당했다.

김성주는 입북하기 보름 전인 1945년 9월 초, 비밀리에 모스크바로 불려갔다. 스탈린은 크레믈린궁 별장에서 김성주를 상대로 4시간 동안 면접을 실시했다. 스탈린주의를 설파하고 여러 질문과 대화를 나눈 스탈린은 “이 사람이 좋다. 앞으로 열심히 해서 북조선을 잘 이끌어가라. 소련군은 이 사람에게 적극 협력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1946년 7월에도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두 사람을 또 다시 면접했다. 평양 주재 소련 정보기관 소속원들이 김일성의 무식과 독단적 스타일을 문제 삼아 북한 지도자를 박헌영으로 교체하는 것이 좋겠다고 스탈린에게 건의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면접에서도 스탈린은 김일성을 최종 결정했다.

소련군정은 1945년 10월 13일 박헌영이 이끌던 조선공산당을 둘로 쪼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조직한 다음 김일성에게 넘겨주었다.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규정하고 있는 1국 1당 원칙 상 분국 설치는 명분도 없고, 규정에도 어긋나는 황당한 주장이었다.

3중 국적, 3중 당적자가 북한 수상에 올라

하지만 스탈린으로부터 북한 지역에 분단정권을 수립하라는 지령을 받은 이상 명분이고 나발이고 필요 없었다. 우격다짐으로 박헌영을 몰아붙여 조선공산당을 둘로 쪼갠 다음 38선 북쪽 지역의 조선공산당 지도권을 김일성에게 안겨준 인물은 소련군정의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였다.

오늘날 북한에 존재하는 조선노동당의 모체는 1945년 10월에 만들어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다. 때문에 북한에서는 ‘서북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5도 대회)’가 열린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이라 하여 해마다 경축한다.

열심히 경축하기 바란다. 그 당을 만들어 준 주체는 스티코프와 그 휘하의 소련군정 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이었으니까. 그런 사실을 경축한다는 것은 “우리는 소련군정의 로보트였습니다”라고 자인하는 행위니까.

중요한 사실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으로 출발하여 북조선 공산당, 조선노동당으로 바뀐 이 정치결사는 소련공산당 북조선 지부였다는 점이다. 왜냐. 북한의 실권을 쥔 김일성과 빨치산파들 거의 전원이 소련군 현역 장교이자, 소련공산당(볼셰비키) 하급당원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전담 취재기자였던 한재덕의 증언에 의하면 소련군 등에 업혀 북한에 진주한 김성주는 중국 국적을 취득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데 이어, 소련으로 도주한 후 소련 국적을 취득하고, 소련공산당에 입당했다. 북한에 들어와 북한 국적과 조선노동당 입당을 통해 3중 국적, 3중 당적 소유자가 되었다.

그의 복잡한 국적과 당적이 정리된 것은 1957년 12월 16일이다. 이날 ‘조소(朝蘇) 양국의 2중국적자의 공민권 조절에 관한 협약’이 체결되면서 김일성은 국적 문제에서 해방되었다.

그는 소련군 현역 대위, 소련공산당 하급당원 신분으로서 소련공산당 당 중앙의 지시와 소련군정의 지령에 따라 북한에 북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그 당수가 되었다. 김성주는 북한 주둔 소련공산당 당원으로서 현지 당 조직의 각종 회의에 참석했다.

북한 주둔 소련공산당 상급 당 간부들로부터 지령을 받은 김일성은 곧바로 북조선공산당 회의에 참석하여 이번에는 최고 간부로서 소련공산당 회의의 결정 내용이나 지령을 북한에서 수행하도록 지시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이라는 ‘충실한 부하’를 통해 자신의 모든 뜻을 북한에서 관철시킨 것이다.

김일성은 5도 대회에서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대표로 선출됐고, 그 다음날인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공설운동장(현재의 김일성 경기장)에서 군중들 앞에 신비로운 모습을 드러냈다. 소련군 정치장교들이 레베데프 정치사령관 방에 모여 북조선 인민들에게 김일성을 ‘항일 빨치산 투쟁의 민족영웅’으로 부상시키는 방안을 심도 깊게 논의한 후 데뷔시킨 것이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분단정권 수립의 주범

이날 평양 군중 앞에서 김일성이 읽은 연설 원고는 소련군정 정치장교들이 작성하여 번역해 주었으며, 김일성이 입었던 양복과 구두는 소련군 장교 강미하일 소좌의 것이었다. 소련군정이 김성주라는 애송이 대위를 “조선 인민의 절세의 애국자, 항일의 민족영웅, 영명한 지도자”로 내세운 이유는 소련은 ‘위대한 지도자’의 권위를 내세워 자신들의 점령정책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김일성이 위대하면 할수록 소련군정은 북한을 지배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1946년 2월 8~9일 이틀 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장에는 당연히 김일성이 임명되었다. 이날 소련군정은 김일성의 한 손에 당권, 다른 손엔 행정권을 쥐어주었다. 이로써 김일성은 공산당 당수로서 당의 총 책임자와, 북한 전 인민을 통치하는 행정 수반이라는 권위와 권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물론 임시인민위원회 출범도 스탈린의 지시를 받은 소련군정의 치밀한 계산과 공작에 의한 결과였다.

김일성은 “행정과 입법 권한을 가지는 독재적 기관으로서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라고 선언했다. 북한은 2월 8일을 ‘진정한 인민정권이 수립된 2·8절’이라고 기념한다. 이것이 실질적인 공산 단독정권의 출범이었다.

이승만의 1946년 6월 3일 정읍 발언이 분단정권을 야기했다면서 이승만이 분단의 원흉이라고 비난한다. 이런 인간들은 스탈린의 1945년 9월 20일자 비밀지령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음미하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뇌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바란다.

1946년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된 지 한 달도 안 된 3월 5일, 소위 ‘민주개혁 5대 법령’의 첫 봉화로 무상몰수, 무상분배 방식의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고 불과 25일 만에 이를 해치웠다. 관련법령은 모두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만든 것을 제공받아 북한 현지 실정에 맞도록 고친 다음 한글로 번역한 것이었다.

김일성은 소련공산당이 제공한 공산화 프로그램을 ‘민주개혁’이라고 주장하면서 착실하게 수행하여 38선 이북 지역을 소련 추종 공산 위성국가로 변모시켰다.

38선 이남의 경우 건국은 유엔이 주도했다. 유엔총회 결의에 의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구성되었고, 유엔 감시 하에 1948년 5월 10일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198명으로 구성된 제헌의회가 탄생했고, 제헌의회에서 국호와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을 선출하여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그렇게 건국된 국가를 유엔이 승인한 결과, 대한민국은 ‘유엔의 자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유엔총회의 결의와 유엔의 승인을 받은 대한민국이기에, 불법 공산집단이 남침을 개시하자 유엔은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집단안보(collective security)를 발동하여 한국을 지원하는 근거가 되었다. 한국은 유엔의 도움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회복하고 한국의 주권 보전과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

대한민국은 유엔의 자손, 북한은 스탈린의 자손

그렇다면 북한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건국되었나? 우선 북한에도 우리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조직을 위해 복잡한 다단계 작업에 착수했다. 그 작업과정을 도식화하면 아래 표와 같이 정리되는데, 모든 과정이 소련군정의 철저한 기획과 연출, 감시와 협박, 조종과 인큐베이팅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을 예의주시하기 바란다.

소련군정 지도부는 북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의 수립에서부터 실행계획과 대회진행 및 의사일정, 심지어 대의원(국회의원)의 정당별 의석 배분, 출신성분별 구성 인원과 숫자까지 세세하게 결정하여 이를 지령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만약 대한민국의 제헌의원 선거 과정에서 미군정이 선거를 실시하기 전에 정당별로 의석을 배분하고, 출신 성분별로 인원을 정해놓은 다음, 그에 맞춰 당선자를 결정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 선거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북한은 소련공산당 당중앙(스탈린)의 지령을 받은 소련군정 지도부의 결정에 의해 후보자에서부터 정당 및 성분별 비율까지, 후보자 개개인의 사상과 일제하에서의 활동 등을 엄격하게 심사한 다음 소련공산당 당 중앙의 재가를 받았다. 스티코프의 일기가 바로 김일성과 북한이 스탈린과 소련공산당의 괴뢰정권이라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다. 남한이 ‘유엔의 자손’이라면 북한은 ‘스탈린의 자손’인 셈이다.

국호·헌법까지 소련이 만들어줘

북한의 정치 드라마는 스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연해주군구와 소련군 사령부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확정되면 스탈린의 재가를 얻은 후 소련군정에 전달되었다. 소련군정 사령부는 북한 지도부를 독려하여 기획자의 의도에 충실하게 드라마의 대본과 한국인 출연자들을 준비시키고 기획자의 최종적인 결재를 받아 드라마를 연기했다.

스티코프의 책상에서 기획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의 재가를 얻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명단 하나하나가 소련군정 지도부에 의해 결정되었다. 형식상으로 투표를 거쳤는지는 몰라도, 지구를 반 바퀴 도는 요란스러운 기획 및 결재 과정을 거쳐 모스크바 당 중앙의 의지대로 선출된 대의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북한의 국회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가 출범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뿐만이 아니라 아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 이름과 헌법까지도 소련공산당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스티코프 일기를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이 한국임시위원단 조직을 결정하자 나흘 뒤인 11월 8일, 북한은 헌법제정위원회를 구성하여 ‘조선 임시헌법’ 작성에 착수했다. 그런데 헌법의 작성자는 북한 헌법학자가 아니라 소련공산당이었다.

소련군정은 1947년 말부터 국호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정하고 모스크바에서 파견된 법률 전문가들에게 동유럽 위성국들을 창설할 때 작성한 헌법을 참고하여 북조선 헌법 초안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이 초안을 소련 외무성과 소련공산당에 보고하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세부적으로 검토한 후 평양의 소련군정에 지령하여 1948년 2월 초에 헌법안 작성을 끝냈다.

1948년 4월 24일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북한의 헌법문제에 대하여’를 결정했다. 이날 모스크바 교외 스탈린의 별장에서 스탈린, 몰로토프 외상, 즈다노프 서기, 그리고 주북한 소련대사 스티코프가 참석한 가운데(북한 인사 중에서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북한의 국가건설, 즉 헌법 제정으로부터 독립에 이르는 내용이 결정되었다.

북한 헌법과 그 이후 국가건설계획의 골격이 이날 모스크바에서 결정되었다. 스탈린은 스탈린 헌법에 따라 작성된 북한 헌법 초안에 대해 제2장, 제14장을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했다. 1948년 9월 9일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북한 헌법은 전적으로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작품이다. 소련은 이런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조선 임시헌법 제정위원을 선정하라고 지령했다.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남조선에서 미국인들이 유엔 임시위원회의 협조 하에 금년 5월 10일로 예정된 선거를 실시하고 남조선 단독정부를 수립한 뒤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북조선 영내에서 실시하고 최고인민회의 선거(남한의 총선에 해당)를 실시하며 내각제 정부를 수립하라”고 그 시기와 방법까지 세세하게 지령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스탈린 헌법의 영향이었다는 점에 대해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 바 있다.

“조선인민은 위대한 스탈린 헌법―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의 영향이 최고인민회의에서 채택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에 반영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스탈린 헌법은 그 천재적인 기초자가 말하고 있듯이 파시스트의 야만성과 싸우려는 모든 사람들, 특히 오늘날 미 제국주의자의 침략에 맞서는 전사들의 최전선에 있는 조선인민에게 정신적인 원조와 실제적인 지지를 주고 있다.”

모든 것이 스탈린 뜻대로

남한에서 제헌의회가 제헌헌법을 만들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던 1948년 7월 31일, 소련군정은 북한의 초대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남한의 국회의장단에 해당) 결정을 위해 한 달여 심의에 돌입했다. 스티코프 일기에 의하면 북한의 정부 조직 및 각료 인선 문제도 자신의 지시에 의해 준비되고 연출되었다.

소련은 남한의 장․차관에 해당하는 상(相)․부상(副相)의 인선은 물론, 최고인민회의 회의 장소와 청사, 내각 청사, 정부 선언문까지 작성하여 김일성에게 넘겨주었다. 스티코프의 지시를 받은 발라사노프 정보팀은 추천된 인사들의 경력과 소련에 대한 충성도 등을 세밀하게 조사하여 하바로프스크 극동군구 사령부와 모스크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냈다.

소련군정 사령부가 초대 내각 구성원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을 선정하면서 가장 중요시했던 부분은 소련에 우호적인지의 여부, 북한에서 실시한 소련 정책을 지지하는지의 여부였다. 소련군정은 이 기준에 근거하여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단을 배치하고 그 명단을 김일성에게 넘겨주어 9월 9일 발표하도록 했다.

그런데 명예직과 권위 있는 정부의 상(相·장관) 자리는 국내파와 연안파 등에게 양보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쥐고 있는 내각의 주요 부상(副相·차관)에는 소련파들을 집중 배치했다. 얼굴마담 자리는 다른 파벌에 넘겨주고, 실권은 소련 출신들이 차지하는 ‘2중 구조’ 내각 형태를 만든 것이다.

1948년 9월 8일, 평양시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제1차 최고인민회의 5일째 회의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승인하고, 이날부터 “전 조선 지역에서 인공 헌법을 실시한다”고 공포했다. 이어 최고인민회의를 이끌어갈 의장단과 상임위원회 위원장단, 상임위원 등을 선출했다. 소련군정의 지시에 따라 김일성이 수상으로 선임됐으며, 내각 조직을 김일성에게 위임했다.

다음날인 9월 9일 오전 10시, 김일성 수상은 소련공산당 당 중앙이 결정해준 내각 성원 명단을 발표했고, 대의원들은 만장일치로 내각 구성을 승인했다. 이어 김일성 수상이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3년에 걸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시와 평양 주둔 소련군정 사령부의 기획 및 연출에 의해 소련의 위성국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모든 것이 스탈린의 뜻대로 된 것이다.

이것이 북한 건국의 숨길 수 없는 민낯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칼럼 내용을 석 줄로 요약한다.

1. 북한의 건국절인 9․9절은 스탈린의, 스탈린에 의한, 스탈린을 위한 북한이 탄생한 날이다.
2. 북한의 초대 내각 수상은 물론 각 부처의 상․부상(장․차관),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국회의장단)과 대의원(국회의원)들은 소련 당중앙이 충성 심사를 거쳐 선정해주었다.
3. 북한 헌법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나라 이름도 소련공산당 작품이다.

무식이 죄다

이따위 사이비 괴뢰집단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민주․자주․주체의 월계관을 씌워주는 정신 나간 짓이 백주에, 그것도 중인환시리(衆人環視)리에 자행되고 있다. 이 나라의 학교와 언론, 포털과 영화관에서는 애오라지 김일성의 가짜 항일투쟁만을 무뇌아처럼 되새기고, 저들의 날조된 주장을 확대재생산 하는 작업에 시간과 비용과 노력과 정열을 아끼지 않는다.

민족적 자주성은 물론 주체적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존재하지 않았던 만주 마적단 출신이 세운 허위․기만․사기․거짓의 북한 건국 과정을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모르니까 사기의 선동 수법이 먹히는 것이다. 무식이 죄다.

무지막지하게 미친 나라다. 이 미친 나라가 아직도 망하지 않고 존재하는 것을 기적이라고 믿으면서 또 하루를 아슬아슬하게 산다.

김용삼 객원 칼럼니스트(박정희기념재단 기획실장/전 월간조선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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