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4년 3월 20일 – 나선정벌 시작

 조선은 청나라에 두 번이나 침략당한 후 1637년 끝내 항복했다. 조선 임금 인조는 죄수 옷을 입고 삼전도 나루터에 나아가 청 태종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예를 바쳐야 했다. 굴욕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세자를 비롯한 왕자들을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고, 방어를 위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 매년 예물을 청나라에 세폐로 보낼 것, 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하여 우의를 다질 것 등을 강요당했다.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효종이 즉위했는데 효종은 청나라 수도 선양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으며 강한 반청 사상을 갖게 되었다. 효종은 즉위 직후부터 친청 세력을 몰아내고 척화론자를 중용하며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군제 개편, 군사 훈련 강화 등에 힘쓰는 등 북벌을 위한 군비 확충 작업을 실시했다. 

러시아와 중국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아무르강. 중국에서는 헤이룽강이라 불린다.
러시아와 중국 국경을 따라 흐르는 아무르강. 중국에서는 헤이룽강이라 불린다.

 

 그런데 이때 영의정에서 파직당한 후 원한을 품고 있던 김자점이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밀고 했다. 그는 인조 장릉 조성 때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 지문’을 증거로 보내기도 했다. 이후 청나라는 북벌에 대해 더욱 경계하였고 조선은 북벌 계획을 실천으로 옮길 틈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효종은 나름대로 군사도 증강하고 한양 외곽의 방비를 보강하며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을 대폭 개편, 강화하였다. 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박연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만들게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임진, 병자 양란을 치른 지 얼마 안 된 때라 국력이 쇠진한 상태였다. 재정도 빈약하고 민생도 곤궁해진 반면 청나라의 국세는 갈수록 흥성해져 북벌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북벌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졌고 오히려 러시아와 청나라의 충돌이 일어나자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여 청나라를 도와야 했다. 조선은 1654년과 1658년, 중국과 러시아의 국경 분쟁에 두 차례나 군사를 파병해야 했다. 바로 나선정벌이다. ‘나선’은 러시아의 한자어이다. 

 1654년 3월 20일에 청나라에 다녀온 차사 한거원이 “조창(鳥槍)을 잘 쓰는 사람 100여 명을 뽑아 보내라”라는 청나라 예부의 요구를 전달했다. 당시 러시아는 아무르강(헤이룽강) 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불법적인 약탈 행위를 일삼고 있었다. 청나라에서는 러시아 사람들이 국경 넘는 것을 여러 차례 막았지만 그들의 노략질은 잦아들지 않았다.  

 청나라의 파병 요구에 효종은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을 대장으로 하여 조총수 100명과 여타 병력 50명을 보내도록 어명을 내렸다. 이 군사들은 청나라 정벌을 위해 훈련 중이던 병력이었다. 그런데 이때 효종은 한거원에게 “나선은 어떤 나라인가?”라고 물었다. 군대를 파병하면서 상대가 어떤 나라인지 파악도 안 되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러시아는 조선과 국경을 거의 맞대고 있는 나라인 데다 효종은 조선의 왕으로서는 흔치 않게 10년 가까이나 외국에 살았던 사람인데 말이다. 그런 효종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당시 조선 왕실이 국제 정세에 얼마나 어두웠는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한거원은 효종의 질문에 “닝구타[寧古塔,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현] 옆에 별종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나선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한거원도 그 나라가 얼마나 큰지, 어떤 정체를 가진 자들인지는 말하지 못했다. 변급의 조선군과 청나라 연합군이 아무르강에서 러시아군과 처음 마주쳤을 때 러시아군은 큰 배 열세 척, 작은 배 스물여섯 척을 거느리고 있었다. 조선군은 후방에서 포 사격으로 청나라 군대를 지원했다. 러시아 배들은 거센 물살을 이기지 못해 떠내려갔고 변급은 8월경에 닝구타로 귀환했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있는 동상. 검은 호랑이 바브르는 러시아를, 담비는 중국을 상징한다.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있는 동상. 검은 호랑이 바브르는 러시아를, 담비는 중국을 상징한다.

 

 1658년 두 번째 정벌 때 청나라 황제의 칙서를 가져온 차사 이일선은 “대국(중국)이 군병을 동원하여 나선을 토벌하려는데 군량이 매우 부족합니다. 본국(조선)에서도 군병을 도와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국에서 다섯 달 치의 군량을 보내주시오”라고 요구했다. 이때 효종이 러시아군의 형세를 물으니 이일선은, “적병은 1,000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효종은 “먼 지역에 군량을 운송하자면 형세상 매우 어렵기는 하겠으나, 어찌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파병을 허락했다. 

 두 번째 정벌 때도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러시아군이 타고 있던 배에 불을 지르고 총과 불화살로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다. 이때 조선군은 러시아군 복병의 습격을 당해 일곱 명이나 전사했다.  

 알바진을 중심으로 한 러시아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청나라는 그때마다 출병하여 러시아군을 응징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두 차례 나선정벌 이후 더 이상 조선에 군대 동원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의 기회를 끝내 잡을 수 없었다. 1659년 효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이후 북벌 계획이 아예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음으로써 러시아와 청나라의 국경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아무르강 외지류인 고르비차강과 외흥안령을 양국 국경선으로 확정

2. 국경을 넘는 사람의 인도와 처벌 문제

3. 양국 민간인의 자유 교역 허용

 이 조약은 중국과 러시아가 대등한 지위에서 체결한 최초의 조약이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 사진 윤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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