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년 3월 1일 - 발해 멸망

 

 발해는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분명히 살아 있는 고대 국가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나라 중 하나이다. 그것도 698년부터 926년까지 200년 넘게,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넓은 영토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우리는 발해에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예전에 통일신라 시대라 부르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로 고쳐 우리 역사에서 발해의 위상을 확실히 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발해를 세운 사람은 옛 고구려의 장수였던 대조영으로, 초기의 나라 이름은 ‘진국(振國, 震國)’이었다. 대조영 무리는 랴오둥의 동쪽 동모산에 자리 잡았는데 동모산은 지금의 지린성 둔화 부근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713년에 당나라 현종은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책봉하고 발해와 국교를 맺었다. 발해라는 이름은 이 무렵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발해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받는 관계에 있었지만 당나라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다. 발해는 존속하는 내내 독자적인 연호와 시호를 사용하였고, 제3대 문왕 때부터는 황제국 체제를 갖춘 독립 국가였다. 

 제10대 선왕(재위 818∼830) 때부터 발해는 융성기를 맞았다.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삼은 선왕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하여 영토를 크게 여는 데 공이 있어” 당나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이 시기에 발해는 실제로 영토를 넓히고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북쪽으로는 헤이룽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월희말갈, 흑수말갈 등을 복속‧통제하였고 서남쪽으로는 랴오둥 지방으로,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으로 진출하여 신라 등 주변 나라를 긴장케 했다. 이 무렵 발해의 경계는 사방 5,000리에 이르렀고 5경, 15부, 62주의 행정 구역이 이때 갖추어졌다. 

러시아연해주 끌류치 산성 성벽. [사진=연합뉴스]
러시아연해주 끌류치 산성 성벽. [사진=연합뉴스]

 

 선왕 이후 융성기를 맞은 발해는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 즉 ‘바다 동쪽의 번성한 나라’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해동성국이 얼마나 발전한 나라였는지 자세한 면모는 알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 통일신라 못지 않은 국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기록은 있다. 897년 발해 왕자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했을 때 당나라 황제는 “국명의 선후는 본래 강약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이 기록으로 당시 발해의 국력이 신라를 능가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당나라의 과거 빈공과에서 발해인이 신라인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한 기록도 있다. 

 발해의 마지막 왕이 재위했던 시기에는 발해뿐만 아니라 주변 나라들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1,000년 역사를 가진 통일신라는 세 나라로 분열되었고 중국에서도 통일 국가 당나라가 멸망하였다. 큰 나라가 망한 자리에 작은 나라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는데 거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도 그 틈에 크게 힘을 떨치게 되었다. 거란은 발해를 계속 침략했고 서방과 발해 정복을 ‘양사(兩事)’라 부르며 숙원 사업으로 삼기도 했다. 924년 거란은 양사 중 하나인 서방 정벌을 단행했고 이듬해 연말부터 발해를 집중 공략하여 926년 3월 1일 기어이 발해를 쓰러뜨리고 말았다.

 영토가 넓고 주변국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던 발해는 거란의 침략에 제대로 힘도 못 써보고 ‘느닷없이’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 멸망 이유가 미스터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마음이 갈라진 것을 틈타서 싸우지 않고 이겼다”라는 정복자 거란의 기록이 있어 발해 내부의 문제로 거란이 발해를 손쉽게 취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의 멸망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백두산 화산 폭발은 10세기인 960년 정도에 있었고 발해는 926년에 멸망했으니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백두산은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두 번 폭발했는데 9세기 폭발이 발해를 쇠퇴하게 했을 것이라는, 그래서 거란이 손쉽게 차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백두산 화산이 폭발하기 전부터 징조가 나타났을 텐데 그 때문에 민심이 흔들려 거란에 쉽게 나라를 내주었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무튼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도 12세기까지 그 지역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는데 이것도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거란에 투항했던 한족 진만(陳滿)의 묘지명을 통해 거란이 923년과 925년에 발해를 공격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마지막 전쟁도 훨씬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거란이 발해를 차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고 발해는 망하기 전까지 몇 년 동안 그 공격을 막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분으로 허망하고 ‘느닷없이’ 멸망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발해의 유민들은 후발해, 오사국, 흥료국, 대발해 등을 세우며 부흥 운동도 한동안 이어나갔다.  

속초에 있는 발해역사관. [사진=연합뉴스]
속초에 있는 발해역사관. [사진=연합뉴스]

 

 발해는 일본에 보내는 외교 문서에서 ‘고려(高麗)’라 칭하며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스스로 나타냈다. 또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 왕조는 발해 멸망 후 유민들을 받아들였고 형제국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배척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발해는 말갈족의 나라이며 고구려와는 상관 없는 나라라고 주장해왔다. 그에 비해 오늘의 우리는 발해 역사를 아직도 희미한 신화 시대 이야기로 생각하고 소홀히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확한 면적은 알 수 없으나 우리 민족 역대 국가 중 가장 넓은 땅을 가졌던 이 발해를 말이다. 

황인희 작가(다상량인문학당 대표·역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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