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7)
[복거일 칼럼] 인공지능에 대한 철학적 고찰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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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

[지난 달 하순에 JP가 서거했습니다. 젊었을 적에 JP를 알았던 세대에겐 JP라는 별호가 김종필이라는 본명보다 훨씬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그렇게 영문 이니셜로 불린 정치가는 JP가 처음이 아닌가 합니다. 함께 ‘3김’이라 불린 김영삼. 김대중 두 분도 뒤에 YS. DJ로 불렸지만, JP의 경우보다는 어쩐지 친근한 느낌이 덜했습니다.

JP는 초기엔 박정희 대통령과 운명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박 대통령이 5.16군부정변을 주도하게 된 과정과 정변의 성공 뒤 빠르게 권력을 장악한 과정에서, JP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자연히, JP는 주로 박 대통령을 통해서 역사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가 혼자 한 일들의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정변 뒤의 몇 해 동안 JP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정치가였습니다. 집권 세력의 제2인자가 현직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들보다 더 큰 기대와 지지를 받았다는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만년의 JP만을 아는 세대들은 그런 상황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큰 인기와 기대를 누린 그가 끝내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나름의 뜻을 지닙니다. 저 자신은 JP가 당시 예상대로 박 대통령의 후계자가 되었다면, 거기서 나온 대체역사가 실재 역사보다 상당히 나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이 JP에게로 흘러가는 권력의 물길을 막아 계속 집권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무리한 일들이 일어났고,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주의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박 대통령이 계속 집권하기 위해 추진한 ‘3선 개헌’은 어쩔 수 없이 후계자로 꼽히던 JP를 고립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를 끝까지 지지했던 그의 동지들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 일에서 앞장선 것이 중앙정보부였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원래 JP가 만들어서 박정희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이용했던 기관이었습니다. 이름이 가리키듯, 중앙정보부(KCIA)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을 모형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는, 미국의 CIA와 연방수사국(FBI)를 합친 듯한 기구여서, 너무 큰 힘이 그리로 몰렸습니다. 게다가 JP의 지휘 아래 중앙정보부는 처음부터 ‘법 밖에서(extrajudicially)’ 움직였습니다. 지금도 저는 중앙정보부라는 말을 들으면, ‘고문’이라는 말이 먼저 연상됩니다.

이처럼 막강한 기구는 필연적으로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합니다. 자신이 만들어 그렇게 법 밖에서 운용한 기구에 의해 JP와 그의 지지자들이 박해를 받은 것은 몹시 씁쓸한 반어(反語)입니다.

동지들이 참혹한 고난을 겪어 더 견디기 어려워지자, JP는 1968년 5월 공화당 의장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했습니다. 그리고 아예 정계에서 은퇴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이것은 중요한 뜻을 지닌 사건입니다. 그러나 당시 시민들에겐 집권 세력 안에서 나온 작은 변화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1968년은 휴전 뒤 군사적으로 가장 험악한 시기였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 해 1월은 끔찍했습니다. 북한이 보낸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했고, 원산 앞바다에선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납치되었습니다. 월남에선 공산군의 ‘구정 공세’로 7개 성이 공산군에 점령되었고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까지 점령되었습니다. 기습을 당한 주월 미군과 한국군만이 아니라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 전체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김화 지역에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그곳 지형은 적군전차 부대들이 침공해오기 좋아서, 작전 계획엔 아군 부대들이 모두 철수하도록 되었습니다. 철수 작전엔 뒤에 남아서 주력을 엄호하는 부대의 후위 작전이 따릅니다. 제가 속한 포대에 그런 임무가 주어졌고, 남들은 물러날 준비를 하는 동안 제 포대는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포대가 추진진지에 닿은 뒤, 저는 관측병들을 데리고 다시 올라가서 남방한계선 바로 남쪽에 있는 관측소를 점령했습니다.

작전 계획엔 추진 포대의 철수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습니다. 싸움터의 ‘소모품’인 관측장교야 얘기할 것도 없었습니다. 비감한 마음이 들 만했지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한밤중에 전조등을 켜지 못한 채 이동하는 터라서, 교통 사고의 위험이 컸습니다. 서투른 운전병이 빙판 길로 차를 모는데, 한쪽은 한탄강 지류의 낭떠러지였습니다. 딴 생각 할 처지가 못 되었죠.

나라 안팎의 상황은 아마도 후방의 시민들에게 훨씬 위태로워 보였을 것입니다. 자연히, 모두 강력한 지도력을 희구했고, 권력이 자연스럽게 현직 대통령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1968년의 정계 은퇴는 JP에겐 물론 큰 좌절이었습니다. 그러나 길고 넓게 살피면, 그것은 그가 박 대통령과의 질긴 인연을 끊어버리고 홀로 설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적잖은 국민들이 그렇게 하기를 기대했습니다. JP가 만든 공화당에선 그런 기류가 특히 강했습니다.

그러나 JP는 1971년 6월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1969년의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로 채택되고 1971년 4월의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된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어 10월에는 ‘유신 헌법안’이 공포되었습니다.

‘10월 유신’ 뒤의 시기는 대한민국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어두운 시기였습니다. 20년 넘게 민주주의를 영위해온 나라에서 갑자기 시민들이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뽑지 못하고 ‘대통령을 뽑는 사람들을 뽑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체육관 선거’라는 비희극이 열 몇 해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야당들도 ‘보수 야당’을 내세우던 사회에서 반체제적 세력이 무섭게 자라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JP는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났습니다. 이제 그는 언젠가는 물러나게 될 박정희 정권의 일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박 대통령이 그에게 권력을 넘겨줄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권력이 그에게로 흐를 기회는 사라졌습니다.

만일 그가 권력의 박해를 받는 ‘야인’으로 남았다면, 그는 시민들의 마음에서 박정희 정권의 ‘대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권력의 물길이 흐르지 않아서 바닥을 드러낸 강을 보면서, 시민들은 한때 도도하게 흘렀던 강물이 다시 흐를 날을 그렸을 것입니다. 당시 야당 세력이 크지 않았으므로, 그에게 기회가 올 가능성은 작지 않았습니다.

야인으로 남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박 대통령의 회유가 아무리 간곡했더라도, ‘동지들이 박해를 받았는데, 제가 어떻게 다시 각하를 보좌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실세 국무총리’ 자리를 즐겼습니다.

실제로, 그의 동지들은 그가 배신했다고 여겼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JP의 생애를 살피면서, 저는 어쩔 수 없이 ‘도덕적 행동이 대체로 이익이 된다’는 진화생물학의 교훈을 떠올리게 됩니다.

JP는 허물이 많은 정치가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공은 그런 허물들을 넉넉하게 덮을 만합니다. 그가 초기에 박 대통령과 운명공동체였으므로, 그의 공은 박 대통령의 업적 속에 포함되어 잘 드러나지 않을 따름입니다. (정치를 “허업(虛業)”이라고 한 그의 얘기엔 어쩌면 그런 사정에 대한 아쉬움이 담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 대통령의 여러 업적들 가운데 으뜸은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한 것입니다.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국은 일본을 거쳐야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지정학적으로는 지금도 일본은 한국의 안보에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박 대통령은 그런 현실을 깊이 인식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데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의 불행한 역사 때문에, 모두 그 일을 꺼렸고 국민들의 지지도 받지 못했지만, 그는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오히려 사이가 나빠진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하면, 박 대통령의 국교정상화가 얼마나 큰 성취인지 분명해집니다.

일본과의 국교정상화가 워낙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협상에 나선 사람은 ‘만고 역적’이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나선 사람이 JP였습니다. 그는 홀로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지도자들과 만나 협상했습니다.

일본 지도자들은 일본 국내 여론을 고려해야 하므로, 협상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아쉬운 쪽은 우리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도, 국내 여론은 호의적이지 않았을 터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협상에 임한 JP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JP는 능소능대한 협상력을 발휘했습니다. 다행히, 미국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고, 일본에선 뛰어난 지도력을 지닌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수상이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결국 JP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만일 JP가 없었다면? 아마도 협상은 지지부진했을 터이고, 두 나라의 정치적 상황의 변화로 협상이 실패했을 가능성이 작지 않습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의 굳은 의지와 강력한 권력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이 맺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일본과의 관계가 정상화되지 않은 상태에선 한국의 경제 발전과 국방력 강화가 어려웠으리라는 점입니다. 저는 한일협정에 거세게 반대했던 ‘6.3세대’에 속합니다. 그래서 더욱 아쉽고 고마운 마음으로 JP를 떠올립니다.]

보편적 다윈주의 (Universal Darwinism)

다윈주의(Darwinism)라 불리는 자연선택 이론은 ‘생존에 적합한 특질을 지닌 개체들이 살아남아서 자손들을 남기며,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주장이다. 이런 과정은 3단계로 이루어진다.

어떤 특질에 관해서 여러 변이들(variations)이 생성된다;

그런 변이들 가운데 환경에 적합한 것들이 생존하고 덜 적합한 것들은 사라진다.

선택되지 못한 것들이 비운 공간을 선택된 것들이 차지한다.

이런 자연선택 과정은 여러 대안들(변이들) 가운데 가장 나은 것을 찾는 방법이므로 ‘발견법(heuristic)’이라 불렸다. 요즈음엔 인공지능 연구에서 영향을 받아, ‘진화적 알고리즘(evolutionary algorithm)’이란 표현이 주로 쓰인다.

진화적 알고리즘이 작용하는 대상은 물론 유기체(organism)들이다. 그러나 진화적 알고리즘이 워낙 강력한 힘이므로, 다른 존재들에도 작용하리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실제로, 문화나 사회적 현상들에도 진화적 알고리즘이 적용된다는 주장은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나오자 곧바로 나왔다.

다윈 자신이 그런 생각을 품었고, 영국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를 비롯한 19세기의 학자들이 그런 이론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과 인종 차별을 다윈주의로 정당화하는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가 거센 비판을 받으면서, 이런 시도들은 배척을 받았다.

1950년대에 미국 심리학자 도널드 캠벨(Donald T. Campbell)이 이런 전통을 되살렸다. 사회적 다윈주의의 문제적 주장들에 가려진 합리적 생각들을 새롭게 정립하고서, 그는 생물학 이외의 분야들에 다윈주의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그의 학설을 널리 전파했다.

켐벨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이론을 ‘보편적 선택 이론(universal selection theory)’이라 불렀다. 지금은 ‘보편적 다윈주의(universal Darwinim)’라는 이름이 널리 쓰인다. 이 이름을 처음 쓴 사람은 리처드 도킨스 (Richard Dawkins)다. 도킨스는 문화의 단위에 ‘밈(meme)’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두 번 작명을 잘 한 덕분에, 그는 학문적 업적에 걸맞은 수준보다 훨씬 큰 명성을 얻었다. 명성은 명성을 부른다.

도킨스는 진화적 알고리즘이 지구 생태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에 적용이 되리라고 주장했다. 외계 생명체들이 어떤 모습을 하든, 그들은 지구 생명체들과 똑 같은 진화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리라는 얘기다.

도킨스의 주장은 대담하고 신선하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중요한 것은 진화적 알고리즘이 생물학 이외의 분야들에도 적용된다는 캠벨의 주장이다. 그의 보편적 다윈주의 이론이 받아들여지면서, 모든 학문들에서 새로운 기운이 일었다. 우주 자체가 진화한다는 주장까지 나와서 ‘우주론적 자연선택 가정(cosmological natural selection hypothesis)’이란 이름을 얻었다. 물리학자들이 진지하게 다중우주를 주장하는 터라, 이 가정은 언뜻 보기보다는 훨씬 진지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흥미로운 주장은 과학 자체가 진화적 알고리즘의 한 형태라는 이론이다. 과학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는 지식의 성장이 “가정들의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of hypotheses)”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지적했다. 물론 과학은 문화의 한 부분이고, 문화는 진화적 과정을 밟는다는 것이 이제는 널리 받아들여진다.

가장 보편적인 ‘보편적 다윈주의’는 미국 생물철학자 대니얼 데네트(Daniel Dennett)의 주장이다. 그는 진화적 알고리즘이 ‘기질중립적 (substrate-neutral)’이라 주장한다. 생명체들만이 아니라, 문화 현상들, 나아가서 비생명적 현상들도, 조건들이 갖추어지면, 진화적 알고리즘이 작동해서 진화가 나온다는 얘기다.

이제는 어떤 학문에 종사하든, 진화론적 관점에서 학문의 대상을 살피지 않으면, 실은 학문 자체를 진화적 알고리즘이 작용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면, 근본적 한계를 안게 된다. 우리 자신을 낳은 원리가 진화적 알고리즘이니, 당연한 일이다.

복거일 객원 칼럼니스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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